▲ 미국의 유명한 게시판 사이트인 ‘4챈’ 메인 화면. 원 안 사진은 4챈을 처음 만든 크리스토퍼 풀. | ||
사실 <타임>이 발표한 1위부터 21위까지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평균 영향력 점수 100점 만점에 무려 90점을 받아 1위에 오른 크리스토퍼 풀의 뒤를 이어 2위에는 말레이시아의 안와르 이브라힘 전 부총리, 3위에는 릭 워렌 목사, 4위에는 탈레반 반군 지도자인 바이툴라 메수드가 이름을 올려 놓았다. 그리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8위), 농구선수인 코비 브라이언트(9위), 중국의 후진타오 총리(16위) 등도 눈에 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바마 미국 대통령, 오프라 윈프리, 스티브 잡스, 달라이 라마 등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뭔가 수상해도 한참은 수상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미국의 한 누리꾼이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다시 말해 <타임>의 온라인 투표 사이트가 해킹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누리꾼이 어느 ‘4챈’ 사용자한테 들었다는 해킹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익명의 ‘4챈’ 사용자가 어느 날 <타임>이 선정한 100명의 후보들에 ‘무트’도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그는 손쉽게 <타임>의 온라인 투표 사이트를 해킹했고, 이어 자동투표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1분에 최대 500번을 투표할 수 있는 ‘스팸 URL’ 주소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주소는 곧 ‘4챈’ 사용자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 나갔고, 이에 힘입어 ‘무트’는 쟁쟁한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섰던 것이다. 순식간에 ‘무트’라는 이름과 ‘4챈’이라는 사이트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4챈’이란 사이트는 어떤 곳일까. 우리나라에 ‘디시인사이드’가 있다면 미국에는 ‘4챈’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4챈’은 미국 내에서 수많은 인터넷 유행어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모든 주제를 다루는 인터넷 게시판 사이트다. 등록된 게시물 수만 지난해 5000만 건을 넘었으며, 현재 매달 500만 명 이상이 이 사이트를 방문하고 있다.
이 사이트의 가장 큰 특징은 ‘익명성’과 ‘이미지 게시판’. ‘4챈’에서는 회원가입을 할 필요 없이 모든 게시물이 익명으로 올라오게 된다. 또한 텍스트 대신 이미지를 올리고 공유하며, 이미지에 다시 이미지로 댓글을 다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기존의 텍스트 게시판과는 확연히 다르다.
처음 풀이 ‘4챈’을 만든 것은 15세이던 지난 2003년이었다. 당시 그는 일본 만화와 TV쇼에 빠져 지내던 뉴욕의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처럼 일본 만화에 빠진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미국판 ‘후타바채널’이었다. 본래 후바타채널은 일본의 유명한 게시판 사이트인 ‘2채널(www.2ch.net)’의 서브 사이트이자 이미지 업로드 중심의 사이트다. 엄마의 신용카드를 빌려서 서버 공간을 구입한 그는 곧 사이트를 개설했다.
▲ 롤캣(LOLcat) : ‘크게 웃다(Laugh Out Loud)’는 뜻의 약어와 ‘고양이(cat)’라는 단어로 만든 합성어. 2005년 처음 등장해 주로 고양이 사진에 짧은 글이 합성된 사진을 가리킨다(오른쪽) 개죽이 : 국내 유명 게시판 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의 마스코트 강아지(왼쪽) | ||
현재 이 사이트는 44개의 다양한 주제를 가진 게시판들이 분리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은 게시판이자 ‘4챈’의 대표적인 게시판은 바로 /b/ 게시판이라고 불리는 익명 게시판, 즉 ‘랜덤 게시판’이다. 하지만 익명으로 운영되다 보니 문제가 속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폭력물이나 저질 콘텐츠, 아동 포르노 등이 올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 또한 자기들끼리 난해한 유머를 만들고는 낄낄거리는 일도 비일비재한데 한마디로 ‘4챈 폐인’들만이 이해하는 정신세계가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뉴욕타임스>는 /b/ 게시판을 가리켜 ‘고등학교의 남학생 화장실 같은 곳’이라고 묘사했는가 하면, 가십 사이트인 <거커닷컴(Gawker.com)>은 ‘/b/ 게시판을 읽으면 뇌가 녹아 없어진다’고 비꼬았다.
그럼에도 현재 ‘4챈’의 영향력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다. 중대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인터넷 여론을 형성하거나 온라인 유행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미 대선이 한창일 때 당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의 ‘야후’ 메일이 해킹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다름 아닌 ‘4챈’ 사용자들. 이들은 페일린 후보의 편지함과 가족사진 등을 정부 및 기업의 비리나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사이트인 ‘위키리크스’에 올렸으며, 이로 인해 한때 정치인들이 정부 업무와 관련해서 사적인 이메일을 사용한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심지어 대형 검색 사이트인 ‘구글’도 ‘4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적이 있었다. 지난해 7월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와 비슷한 구글의 ‘핫 트렌드’ 서비스에는 잠시 동안 나치 문양(卍)이 버젓이 1위에 올라 있었다. 이것 역시 ‘4챈’ 사용자들의 장난이었다. 한 사용자가 /b/ 게시판에 “구글에 ‘…#221328;’을 입력하면 나치 문양이 나온다”는 포스트를 올렸고, 이 글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한 수천 명의 ‘4챈’ 사용자들이 동시에 이 숫자를 구글에 입력해 버렸던 것이다.
/b/ 게시판에 올라오는 거짓 정보가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한 사례도 많았다. 지난해 10월 컴퓨터 기업인 ‘애플’사의 주가가 갑자기 폭락했다. 이유는 CNN의 시민기자 사이트인 ‘아이리포트(iReport)’에 “스티브 잡스 최고경영자가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글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훗날 확인 결과 이 정보가 처음 올라왔던 곳은 ‘아이리포트’가 아니라 ‘4챈’이었다. 결국 ‘4챈’의 한 사용자가 올린 부정확한 글이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져 결국에는 ‘애플’을 흔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2006년에는 미국의 미식축구 경기장 7곳이 한꺼번에 폭탄테러 협박을 받고 마비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4챈’에 40회 이상 글을 올린 협박범은 “폭탄을 실은 트럭을 타고 7개 도시의 경기장에 돌진할 것이다. 테러는 이슬람 라마단이 끝나는 10월 22일 벌어질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다행히 예고된 날 미식축구 경기장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인즉슨 식료품점 점원이었던 한 평범한 청년이 재미 삼아 ‘4챈’에 올린 글이 인터넷에 급속도로 퍼져나가 협박 글로 둔갑하고 말았던 것이다.
현재 ‘4챈’ 사이트는 경영난에 봉착해 있다. 사이트 자체의 수익모델이 없어 광고가 주된 수입원인데 ‘4챈’의 경우에는 광고주들이 꺼리는 사이트란 게 문제다. 일부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가 광고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챈’은 일부 사용자들의 기부금과 때때로 들어오는 광고비, 그리고 풀 개인의 돈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풀은 2만 달러(약 2600만 원)의 빚을 진 상태며, 채무액은 해가 갈수록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챈’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 과연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