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 정원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오태현 박사
[대전=일요신문]육심무 기자 = 지난 23일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오태현씨(31)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자동차 정비소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며 생계와 학업을 유지하다가 다니던 특성화 고등학교마저 다닐 돈이 없어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했다.
광운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오씨는 2010년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석사과정에 진학해 7년여의 재학기간(석사 2년, 박사 5년) 동안 교내 연구 실적평가 최우수상, 삼성 휴먼테크 논문대상 금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미 MIT에서 박사후연구원(Post-Doc)으로 위촉돼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오 박사의 성장기를 들어본다.
Q. KAIST에 입학한 계기는?
A. 학부에서 배우지 못했던 부분들을 더 세부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서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습니다. KAIST는 어린 시절 드라마를 보며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학교였습니다. 자퇴생이었을 때 소속감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열등감이었는데 이제는 나도 저런 멋진 집단에 속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물론 그런 감정적인 요인이 아니더라도 현실적으로도 최상의 연구 성과를 내는 학교인 데다가 등록금, 군 입대 등 제게 큰 부담이었던 문제들까지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 지원하게 됐습니다. KAIST 랩에 대해서 조언해줄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해 제가 관심 있는 학과와 연구실을 일일이 조사했습니다. 원론적이고 근본적인 탐구를 하면서도 실용적인 것과 동떨어지지 않은 연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신호, 영상, 음성 등의 분야를 연구하는 전기및전자공학과 권인소 교수님 랩 홈페이지에 들어가 첫 화면을 보는 순간 제가 찾던 곳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 랩에서 저를 학생으로 받아준 것이 제 인생에 큰 터닝 포인트가 됐습니다.
Q. 석박사 과정에서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낸 비결은?
A. 제가 좋아하는 일을 잘 하고 싶다는 성취욕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어릴 때 일자리를 찾아 전전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지금 하는 것이 얼마나 나에게 잘 맞고 재미있는 일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구 하는 과정에서는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엔 이겨내고 성과가 나오고 그것을 해외 학회에서 발표하고 인정받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연구를 좋아하게 되고 즐기게 된 것 같습니다.
Q. 유년 시절 어떻게 자랐는 지?
A. 어릴 때 친조부모님이 양육해주셨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외가에서 엄마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까지도 한글을 떼지 못해서 받아쓰기를 늘 틀리고 방과 후에는 나머지 공부를 하던 아이였습니다. 중학생 때는 40명 중에 중간 정도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 무렵이 학교 업무를 전산화하던 시기였는데 ‘정보화 도우미’라는 직책으로 전산실에서 선생님들 심부름을 하면서 컴퓨터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됐습니다. 인터넷이나 게임 보다는 컴퓨터를 조립하고 수리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며 재미를 느끼게 됐고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영어 매뉴얼을 가지고 고군분투했던 경험들이 지금의 진로를 선택하게 한 밑거름이 되어준 것 같습니다.
Q. 전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계기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이유는?
A. IMF로 실직하신 홀어머니가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학을 가는 것이 어머니께 너무 큰 짐이 되는 것 같아 빨리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전산 분야의 전문계 고등학교가 신설된다는 공고를 보게 됐고 졸업하자마자 취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진학했습니다. 막상 입학하고 보니 기숙사도 완공되지 않아 낯선 곳에서 방을 구해 살아야 했고, 수십만 원을 훌쩍 넘는 교복 비용 등 예상하지 못했던 금전적 부담에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생활은 나빠져만 갔습니다. 수업시간에 계속 잠만 잤고 당연히 성적은 떨어졌고 그런 불안정한 상태가 분노로 표출되어 선생님들께 반항하기도 했습니다. 극도로 예민해졌고 엉망으로 생활하는 저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어 더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나중엔 체력과 정신력이 모두 바닥난 상태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가 정말 힘들면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아봐도 된다고 하시며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너는 잘 해나갈 거라고 믿는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고민 끝에 2학년을 제대로 다니기 전에 자퇴를 결정했습니다.
Q. 자퇴 후에 계획이 있었는 지와 자동차 정비소에 취업한 계기는?
A. 어린 마음에 일단 자퇴만 하면 어디든 취직해서 빨리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또래보다 빨리 돈 버는 사람이 될 거라는 기대에 우쭐한 마음을 가졌을 정도로 철없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부딪힌 현실은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최종학력이 중졸인 자퇴생에게 일자리를 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사고를 일으키고 왔을 것이라고, 문제의 소지가 있을 것이라고, 실패자일 거라고 단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결국엔 어디서도 채용해주지 않아 두 달간 집에만 있게 됐습니다. 사람에게 소속감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절절하게 체험하던 때였습니다.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마지막에 가게 된 곳이 자동차 정비소였습니다.
Q.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A.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추운 날씨에 밖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 너무나 고되게 느껴졌습니다. 이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아오신 주변 분들을 보며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제가 육체적으로는 약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정비소에서 돈을 모으고 기술을 익힌 후에 본격적으로 정비 학교에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일했지만 지금 시작한 일을 평생 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또래 친구들이 교복 입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괜히 우울해지곤 했습니다. 누가 봐도 앳된 얼굴인데 기름 묻은 정비복을 입고 일하는 제 모습을 보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훈계를 하고 간다거나 심지어 자녀와 함께 온 한 손님은 저를 가리키며 “너도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커서 저렇게 된다”는 말을 제게 다 들리도록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상처가 쌓이면서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Q. 대학에 입학하기까지의 과정은?
A.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고3이 됐을 2004년 4월에 검정고시를 통과했습니다. 그해 수능시험을 봤는데, 500점 만점에 200점도 안 되는 점수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대학엔 떨어졌고 다시 우울감에 빠졌습니다. 혼자서는 취업도 공부도 아무것도 못하는 구나 좌절감이 몰려와서 한동안 집에만 있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에 빠져 시간을 보냈는데, ‘굿 윌 헌팅’을 보며 ‘저 주인공에겐 먼저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데 왜 나에겐 그런 존재가 없을까?’ 비교하게 되고 집안 형편, 주변 환경, 과거에 제가 한 선택들 모든 것을 원망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때 혼자서 참 많은 생각을 했는데 맨 마지막엔 ‘내가 남 탓을 하고 불평하는 것 외에 무엇을 했나? 그것들을 스스로 극복해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 적이 있는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더이상 같은 실패를 반복하기 싫다는 마음에 털고 일어나 한 번 더 수능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외가 가족들은 공부를 잘 하지 않는 제가 이미 한번 실패한 대학 진학을 고집하는 것이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일이라고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 군 장학생이 되어 학비를 충당한 후에 직업군인으로 안정된 직장을 얻겠다고 겨우 설득해서 다시 공부했고 다음 입시에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무언가 증명해내야 한다는 조바심, 그 와중에 홀로 저를 믿어주시고 지원해주시는 어머니께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한 원동력이 되어준 것 같습니다.
오태현 박사
Q. 대학 생활은 어땠는 지?
A. 처음엔 계획대로 때가 되면 군 장학생에 지원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1학기를 보내고 성적표를 받았는데 과에서 차석이었습니다. 기대를 못했던 결과라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받은 높은 석차였고 처음 맛본 성취감이었습니다. 그 벅찬 기분을 알고 나니 공부하는 것이 점점 더 재미있어졌고, 2학년 때는 졸업할 때까지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장학생으로 선정됐습니다. 직업 군인보다 저에게 더 잘 맞는 다른 길이 열렸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과제를 하면서 스스로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원서를 찾아가며 공부했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설픈 실력이지만 영어로 리포트를 작성해서 제출하곤 했습니다. 주어진 학업량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키워드를 발견하고 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공부했더니 4.5만점 학점에 4.43을 받아 숨마쿰라우데(Summa cum laude)로 졸업하게 됐습니다.
Q. 석박사 과정 중에 세계적인 IT기업에서 두 차례 인턴을 한 이유는?
A. 해외 학회를 다니면서 기업과 협업한 논문 사례들을 보게 됐습니다. 같은 연구라고 해도 대학과 기업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그런 협업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기업이 막강한 자본력과 리소스를 투자해 성과를 내고 있어서 기업과 함께 연구하면 더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교수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해외 학회에 가서 네가 눈여겨본 연구자들을 직접 찾아가 문의해보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해외 연구자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며 어필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2014년에 베이징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지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됐습니다. 처음 정해진 기간은 3개월이었는데 늘 밤새듯 일하며 연구 논문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그때 쓴 논문이 삼성 휴먼 테크 논문대상에서 금상을 받게 됐고 제 노력을 신뢰해준 멘토들이 인턴십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다시 1년까지 연장해줬습니다. 그때 경험이 2016년에는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인턴십 선발로도 이어졌습니다.
Q. 졸업 후 진로를 MIT로 결정한 이유는?
A. 박사 과정이 끝날 무렵에 제 연구와 관련된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많은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인터뷰도 여러 번 했지만 채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실용 기술이 아닌 수학적인 알고리즘을 근본적으로 연구하는 제 논문 분야가 최신 트렌드에 맞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추측 합니다. 그래서 기업 대신 대학의 박사후연구과정을 통해 조금 더 커리어를 쌓는 방향으로 전환했습니다. 다시 수많은 학교에 지원서를 보냈습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100통 가까이 제출한 것 같습니다.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연락이 오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었고 인터뷰를 몇 군데 했지만 최종 합격으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학회에서 몇 번 얼굴을 뵈었던 것이 인연의 전부인 경희대 배성호 교수님께서 제 이력서를 보시고는 MIT의 한 연구실에 박사후연구원을 채용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지금의 지도교수님은 본인이 박사과정이 다뤘던 원론적인 주제를 최신 트렌드에 접목해 응용하는 연구를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제 석박사 논문 역시 실용기술의 근간이 되는 근본적인 연구였는데 그 가치를 알아봐 준 곳이 MIT였다는 것이 제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Q. 현재 연구 분야는?
A. 컴퓨터비전과 머신러닝입니다. 컴퓨터비전은 인공지능의 한 분야로 카메라, 스캐너 등의 시각(vision) 매체를 통해 입력한 영상을 컴퓨터가 인지하고 분석하게 하는 연구입니다. 무인자동차나 로봇에 눈의 기능을 탑재하고 컴퓨터가 본 영상 속에서 보행자를 감지하고 신호등이나 표지판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실용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 일반 카메라를 사용해 촬영한 영상을 3D 모션으로 캡처해서 변환시키는 기술도 상용화 단계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Q. 향후 계획은?
A. 박사후연구과정을 끝내면 미국의 IT기업에서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기계가 인간의 일반적인 상식 수준까지 학습할 수 있는 핵심 엔진을 만들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탁자 모퉁이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는 물컵을 본 로봇이 사람의 명령 없이 스스로 판단해서 물 컵을 안전한 자리로 이동하게 만드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오며 경험한 물리 현상이나 상식을 로봇에게 내재화시켜 현실 세계의 변수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단계까지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충분한 경력을 쌓은 후엔 한국으로 돌아와서 국내 기업의 연구 환경을 글로벌하게 바꾸는 일에도 일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교수직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나를 이끌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한 원망이 많았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타인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그때는 제가 누군가에게 경험을 공유하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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