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4월 태평로 삼성본관으로 첫 출근하고 있는 이재용 상무보. | ||
▲1968년 6월23일 서울생
▲1984년 2월 서울 청운중 졸
▲1987년 2월 경복고 졸
▲1992년 2월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학사)
▲1991년 12월 삼성전자 입사
▲1995년 3월 일본 게이오대 경영대 경영관리연구과 졸(석사)
▲1997년 8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행정학) 석사과정 이수
▲1998년 6월 임세령씨와 결혼
▲2000년 12월 장남 지호군 출생
▲2001년 3월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경영학 박사(D.B.A.) 과정 수료
▲2001년 3월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재벌그룹의 세대교체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올해로 반세기를 넘긴 한국 재벌은 1980년대에 접어들어 창업 2세로 경영권이 이양되기 시작했고, 2000년을 기점으로 신경영 인맥 구축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 재벌인 삼성을 필두로 롯데,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 제일제당, 신세계그룹 등 상당수 재벌들이 차세대 경영인에 대한 경영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SK나, 한솔, 태평양그룹 등은 세대교체 작업이 사실상 마무리 수순에 돌입했다. 재계도 2010년 이전에 현존 재벌의 대부분이 차세대 경영인으로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고 있다. 현재 경영 현장에서 실습에 돌입했거나, 실제 경영 전면에 나선 신경영인의 면면을 보면 몇가지 특징이 있다.
이들은 창업세대, 혹은 창업 2세 경영인들과 달리 좋은 생활 여건 덕택에 대부분 미국 등 선진국에서 경영과 관련된 교육을 받았다. 이론적으로 경영자의 자질을 수업받은 셈이다. 때문에 이들은 금융, IT, 엔터테인먼트 등 신경제에 대한 지식이 선대 경영인에 비해 풍부하다. 이는 향후 한국 재벌들의 사업전개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가늠케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들은 창업 세대나 선대에 비해 도전정신이나 동물적 비즈니스 감각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소액주주운동 등 주주들의 권익이 강화됨에 따라 선대 경영인 시대에 누렸던 카리스마를 가지는 데 한계도 있다. 잭 웰치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경영은 피를 말리는 작업이고, 경영자는 고독한 심판자”라고 술회했다. 고독한 심판자의 대열에서 한국 재벌의 미래를 짊어질 신 황태자들의 현주소와 그들이 펼쳐갈 미래 경영은 어떨지 진단해본다.
2001년 3월10일 오후, 태평로 삼성본관 25층 삼성전자 회의실. 이날 이 곳에서는 삼성전자 이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사회에는 일본 출장길에 오른 이건희 회장을 제외한 13명의 이사(사외이사 7명 포함)가 전원 참석했다. 이사회에 참석한 사람은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학수 구조조정본부 사장, 이윤우 삼성전자 사장,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 최도석 삼성전자 사장, 김인주 구조조정본부 부사장 등 76명과 정기 주총에서 사외이사로 새로 선임된 김석수 전 대법관, 이갑현 전 외환은행장, 요란맘 Icon Mdialab 사장 등이었다.
삼성전자의 이사는 사외이사를 포함해 2000년 말까지 21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긴축 경영의 일환으로 이사진을 30% 축소키로 하면서 2001년부터 이사수가 14명으로 줄었다. 이날 이사회가 열린 것은 전날 정기주총을 통과한 2001년 임원승진안을 최종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윤 부회장이 의사진행을 맡은 이사회는 이재용 상무보가 포함된 정기 임원 승진안에 대해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사회는 또 이 상무보를 삼성전자의 경영기획팀에 배치하고 경영전략업무를 담당토록 하는 세부 인사도 확정했다. 이로써 그동안 많은 추측과 논란을 빚었던 이재용 상무보의 경영참여 문제는 일단락됐다.
한국의 재벌사를 보면 몇가지 특징이 있다. 동양의 유교적 사고에서 출발한 장자상속이라든지, 아들에게 경영권을 대물림하는 남성 중심주의라든지, 선대의 낙점을 받은 자식이 경영권을 이어받는 지명상속의 전통 등이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에 이르러 동양의 관습 중 하나는 깨졌다고 볼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이 이병철 회장의 3남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항목은 유교적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1987년 11월19일 이병철 회장이 작고한 직후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을 대물림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상인(商人)으로서 당대 최고의 경영인인 이병철 회장이 선택한 인물이었으니 새삼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경영을 맡은 이후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니 이병철 회장의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다. 새삼 삼성그룹의 경영 대물림을 상기하는 것은, 누가 경영을 이어가느냐 하는 부분이 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비록 경영 환경이 바뀌어 전문 경영인의 중요성이 커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국 재벌의 현실에서는 오너 경영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임을 부정할 수 없다. 삼성의 현 위상에 비춰 이건희 회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에 주목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며, 그에게 모아진 재계의 기대와 관심은 비단 삼성그룹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의 선택은 장차 삼성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고, 한국 경제에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상무보가 장차 삼성의 경영권을 이어받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추측은 다분히 흥미성 가십거리에 불과해 보인다. 이 상무보는 숙명적(宿命的)으로 삼성그룹을 이끌어 가야만 할 입장에 있다. 그의 태생적 조건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삼성그룹의 경영권 계승과 관련해 이 상무보의 가족관계는 부친 이건희 회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이건희 회장이 이병철 회장의 적자 3형제(맹희, 창희, 건희) 중 막내라는 운명을 극복해야 했다면, 이 상무보는 적어도 부친과는 차이가 있다. 삼성의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의 직계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제할 때 외동 아들인 이 상무보 이외의 다른 선택은 가능치 않아 보인다. 이 상무보의 4촌 형제들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그룹에서 독립한 상태인 데다, 이미 삼성의 경영 지배권은 이건희 회장의 직계에 의해 장악된 것으로 보인다.
2001년 3월10일은 삼성그룹뿐 아니라 이 상무보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삼성그룹은 이 상무보에 대한 본격적인 ‘경영자 수업’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이건희 회장은 2001년 1월 공식 석상에서 아들 이재용 상무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재용이가 기업 경영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재용이는 경영인으로서의 자질도 엿 보이는 것 같다.” 이 회장의 이 말은 아들에 대해 가급적 말을 아껴왔던 그의 과거 태도에 비춰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의 말 속에는 그룹의 미래 경영 계승과 관련해 그의 속마음이 담겨 있었다.
물론 그는 다음과 같은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기업 경영은 고민과 결단의 과정이고, 정신적 고통이 뒤따르는 행위이다. (재용이가) 이를 감내할 사명감이 없이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말리고 싶다” 이 회장의 말은 이 상무보가 일단 경영에 참여해보고, 경영인으로서 자신이 없으면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경영 참여를 앞둔 아들에 대한 충고 이상은 아니었다. 이 회장이 약관 26세이던 1968년 중앙일보 이사로 그룹 경영에 참여한 이후 30여년 동안 체험해온 경영인으로서의 소회를 아들에게 전해준 것뿐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이례적으로 2001년 초 아들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 상무보의 경영 참여가 임박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회장이 아들에 대해 언급하기 전부터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이 상무보의 경영 참여에 대해 많은 예측을 했다. 예측을 종합하면 ‘이 상무보가 경영에 참여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그가 언제 경영에 참여할 것이냐 하는 시기 문제만 남았을 뿐이었다.
이 상무보에 대한 경영 승계작업이 그룹 차원에서 진행된 것은 1995년 중반 무렵으로 파악되고 있다. 승계작업은 삼성그룹의 헤드쿼터격인 회장비서실(현재의 구조조정본부)에서 주도했다는 게 정설이다.
1995년 당시 비서실은 현명관 비서실장(사장급), 이학수 비서실 차장(부사장급. 재무팀장 겸임)이 최정점에 있었다. 승계작업을 실무에서 주도한 것은 비서실 재무팀이었다. 재무팀은 예나 지금이나 비서실의 핵심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룹 내에서는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고 있다.
1995년부터 착수된 비서실 재무팀의 경영 승계작업은 두 단계로 진행됐다. 첫 단계는 이 상무보의 소유권을 강화하는 작업이었고, 두번째 단계는 이 상무보를 경영에 참여시키는 작업이었다. 당초 비서실은 두 작업을 1995년부터 2000년 말까지 6년에 걸쳐 진행할 작정이었다. 시한을 2000년으로 못박은 것은 이 상무보의 미국 유학이 끝나는 시점과 연관이 깊었다.
첫 단계인 소유권 강화작업은 1995년 이 상무보가 당시 비상장 기업이던 에스원과 삼성엔지니어링 주식을 매입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그 후 이 상무보는 중앙개발 전환사채, 삼성SDS 전환사채, 제일기획 전환사채 , 삼성전자 전환사채 매입 등 일련의 계열사 유가증권을 사들이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결과 2001년 말 현재 이 상무보는 지주회사격인 중앙개발(에버랜드) 지분 25.1%를 확보하는 한편 삼성전자 지분 0.8%도 보유하게 됐다. 1997년 말까지 3년에 걸쳐 진행된 이 작업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비상장 계열사 주식과 유가증권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절차상, 혹은 인수가격 등의 문제가 불거져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삼성그룹의 정보력과 상황 판단력을 감안해 볼 때 시민단체의 이같은 저항을 미리 예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삼성그룹이 무리라고도 보일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서까지 이 상무보의 지분확장에 나섰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준다. 당시 시민단체, 법률학자 등은 이 상무보의 지분확장 방법이 세금없는 부의 상속이라는 점을 들어 공평한 과세를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국내 최대 재벌 삼성가의 후계자인 이 상무보가 굳이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가면서 세금을 줄여 재산 늘리기에 나서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때문에 이 상무보의 지분확장은 재산증식보다는 경영권 확보를 위한 목적이 더 강했다.
삼성그룹은 소액주주나 기관투자가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은 지분확보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실행에 들어갔던 것이다.
삼성은 1997년 말까지 이 상무보의 계열사 소유권 강화작업을 마무리한 뒤 두번째 단계인 경영권 진입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작업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변화된 경영기류 탓에 멈칫 했다. 재벌의 경영권 대물림에 대한 사회여론이 악화된 때문이었다. 여기에 1998년부터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이 상무보의 재산문제에 시비를 걸고 나온 부분도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같은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삼성그룹은 이 상무보의 경영참여라는 두번째 작업도 강행했다. 삼성그룹이 이 상무보의 경영참여를 강행하게 된 이면에는 1999년 말 불거진 이건희 회장의 건강 이상이라는 뜻밖의 사건이 터진 것과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