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경제포럼(WEF) 아시아지역 공동의장으로 활동중인 최태원 회장이 지난 10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회의 폐회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
이 모임에 대해 주변에서는 ‘5인방 협의체’니, ‘선경패밀리 협의회’니 하는 여러가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이 모임의 공식 명칭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4촌 형제들이 모인 것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모임이 재계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구성원들이 모두 SK그룹 내부에서는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업주의 아들과 당시 경영을 맡고 있던 최종현 회장의 아들이 주축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모임이 구성된 배경은 SK그룹 경영승계 구도가 미묘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점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SK그룹의 경우 다른 재벌과 달리 창업자의 동생이 경영을 승계했기 때문에 차기 구도와 관련해 복잡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다.
최종건 회장의 직계와 최종현 회장의 직계가 모두 승계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74년 최종현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한 이후 대한석유공사 인수 등으로 그룹규모가 크게 신장된 부분도 작용했다. 이 때문에 비록 최종건 회장 직계 아들이 경영승계를 위한 기득권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최종현 회장 직계 아들보다 우선순위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1989년의 5인협의회는 이런 복잡한 차기구도를 사전에 정리하기 위한 내부조율 창구역할을 한 셈이었다. 이와 관련해 최신원 SKC 회장은 “후계구도와 관련해 이 모임에서 논의했으며, 당시 누가 그룹을 맡든 형제들이 힘을 모아주기로 했다”고 회고했다. 이 모임은 그후 최종현 회장이 타계하던 1998년 8월까지 계속 존속했다. 이 모임의 마지막 결정은 최종현 회장이 타계한 직후인 1998년 8월30일 최태원 회장에게 대주주 대표권을 몰아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 후 5인협의회는 사실상 없어졌다. 대신 2세들은 1999년부터 새로운 가족모임을 만들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2세들의 모임인 ‘선가회(鮮家會)’가 그 것이다. 선가회 멤버는, 과거의 5인협의회와는 달리 4촌 형제들이 모두 회원으로 가입했다. 최태원 회장이 차기 경영권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것은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의 직계들이 기득권을 포기한 데 힘입은 바가 크다.
물론 이같은 결과는 가족들이 최태원 회장의 경영능력을 높이 산 이유도 있지만, 경영권 승계 1순위로 지목돼온 최윤원 전 SK케미컬 회장(최종건 회장의 장남)의 건강문제와 관련이 깊었다. 최윤원 회장은 평소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2000년에 작고했다. 어쨌든 최태원 회장이 4촌 형제들의 양보에 의해 경영승계자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4촌 형제들이 기득권을 포기한 것은 가족간 불화가 가져올 해악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신원 SKC 회장은 “형제들이 서로 자신의 이해만 따진다면 모두 패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은 현재 가족들의 지원 아래 그룹 경영권 장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 가지 당면과제가 있다.
첫째는 경영권 안정이고, 둘째는 그룹의 장래에 대한 확실한 경영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의 첫째 과제인 경영권 안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촌 형제들간의 이해관계를, 최대 이익을 위해 풀어내야 하는 부분이다. 이는 최 회장 자신이 그룹 창업주의 직계가 아니라, 대주주인 가족들로부터 대표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최 회장이 그룹에 대한 소유권을 강화하더라도, 오너십은 한계가 있다. 이 한계는 최 회장이 가시적 경영 성과를 보이지 못할 경우 가족 내부의 불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고 최종현 회장의 경우 창업주가 아님에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룹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 대한석유공사와 제2이동통신의 인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최종현 회장의 이같은 업적은 창업주 직계들이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최태원 회장은 상황이 다르다. 사촌 형제들 중 맏형격인 최윤원 전 SK케미컬 회장이 이미 작고(2000년 8월 작고)하긴 했지만, 최신원 SKC 회장, 최창원 SK글로벌 부사장 등 최종건 회장의 2세들이 건재하다. 게다가 최태원 회장은 아직 그룹의 경영권 전체를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데다, 아직 대표권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의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다. 따라서 최 회장은 4촌 형제들과의 관계설정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어떤 모양새로 그룹 경영을 이끌어 나가느냐가 경영권 안정의 최대 관건인 것이다.
현재 SK그룹의 경영판도를 보면 최태원 회장이 SK(주)를 중심으로 그룹 전체를 관장하고 있고, 그의 친동생인 최재원 부사장이 SK텔레콤의 경영을 맡고 있다. 또 현재 4촌 형제들 중 최고 연장자인 최신원 회장이 SKC의 경영을 담당하고 있고, 그의 동생인 최창원 부사장은 SK글로벌 경영을 맡고 있다.
이 중 최신원 회장의 경우 SKC를 중심으로 사실상 독립적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최창원, 최재원 부사장은 아직 나이가 30대인 탓인지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최창원, 재원 두 사람은 구조조정본부 부사장도 겸직하면서 최태원 회장이 현재 그룹 전문경영인 가운데 가장 신뢰하는 김창근 구조조정본부장(SK사장 겸직)으로부터 수업을 받고 있다.
현재로선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지만, 이들 두 사람은 최태원 회장이 그룹경영 전체를 접수하면서 친정체제에 들어가는 시점을 전후해 계열사를 맡아 독자경영에 나설 공산이 커 보인다. 이와 관련해 오너 일가의 핵심 관계자는 “계열사를 맡아 경영을 펼 수는 있겠지만, SK그룹이라는 우산속에서 서로 공통된 목표를 추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독자경영을 하더라도 여느 재벌가처럼 재산권을 분리한다든지, 딴살림을 차려 분가하는 형태의 핵분열현상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최태원 회장에게 주어진 또다른 과제는 확실한 경영 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경영 일선에 나선 지 4년이 넘은 상황이고 보면 그룹의 미래 청사진을 내놓아야 할 시기가 임박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이 부분에 대해 서두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 지난 4월 ‘신임 임원과의 대화’ 자리에 나온 최태원 회장. | ||
이와 관련 최 회장은 “대기업은 커다란 항공모함과 같으며 벤처기업은 이 항공모함의 항로를 결정하는 정찰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해 경영구상의 일단을 드러내기도 했다. 최 회장은 SK그룹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석유화학과 이동통신 사업은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두 사업을 기반으로 미래형 사업을 접목한다는 게 그의 전략이다. 그는 자신의 미래사업을 신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을 중심으로 동남아 시장을 통해 한발짝씩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2001년에 중국 상하이 발전 자문위원회(International Business Leaders’ Advisory Council For The Mayor Of Shanghai) 위원에 오른 것도 이같은 전략의 하나였다. 최 회장은 이에 앞서 그룹의 기존 사업모델을 전면 수정하는 구조조정에도 집중하고 있다. 2002년 10월 제주에서 열린 그룹구조조정회의에서 그는 수익성이 불확실한 계열사의 비즈니스모델을 전면 개편하는 방안을 밝혔다. 이 회의에서 최 회장은 “장기적인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룹의 주력이자 초우량 기업인 SK텔레콤마저 퇴출시키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구조조정에 대한 그의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그의 현실 경영관에 기인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국경 개념의 실종, 글로벌 마켓화, 소비자 욕구의 다양화 등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영방식으론 불가능하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불확실한 경제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변신도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기존 사업모델만으로는 미래에 대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정유사업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SK(주)의 사업구조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총괄하는 종합 마케팅기업으로 변신시키기 위해 OK캐쉬백 등 온-오프라인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다. 특히 그는 SK(주)의 사업모델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필요하다면 아이디어와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는 벤처기업과도 제휴하겠다는 윈-윈전략을 짜고 있다.
이에 따라 SK(주)는 1999년말부터 2002년 10월 현재까지 1백50여개의 벤처기업에 1천6백억원을 투자했다. 앞으로도 부가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사업에 지속적인 투자에 나설 작정이다. 최 회장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경영전략은 무형자산의 상품화이다. 과거의 자본집약적, 노동집약적 사업모델에서 탈피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집약적 산업으로 그룹 사업구조를 변화시킬 계획이다.
물론 이같은 경영구상은 SK(주), SK텔레콤 등 현재의 주력사업 토대 위에 가능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기존 비즈니스의 경쟁력을 최대한 강화해 부가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한 뒤 여기에서 나온 모든 형태의 무형 자산을 신사업과 연계하는 선순환의 사업구조를 가져가겠다는 전략인 것이다. 최 회장의 이같은 경영구상은 철저한 자기 공부와 넓은 인적 교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평소 차 안에 경영 관련 국내외 서적을 싣고 다니며 탐독할 정도로 많은 책을 읽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그는 젊은 경영인답지 않게 넓은 인적교류도 쌓고 있다. 국내 벤처 경영인이나 재계의 젊은 경영인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고 실제로 이런 교류를 통해 경영 학습이나 사업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현재 국내 대다수 기업들은 투입(Input)에 비해 산출(Output)이 낮은 저효율 사업구조를 갖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같은 저효율 경영구조를 탈피하려면 무엇보다 기업의 경영구성 요소인 경영시스템과 경영진의 경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경영철학을 만들어야 하고, 성장과 생존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을 수립해야 하며, 더 나은 회사(Better Company)를 지향하는 바람직한 지배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가 경영 일선에 참여한 이후 최종현 회장 시절 확립된 ‘SUPEX 운동’의 개념 자체를 새롭게 만든 ‘SUPEX 2000’으로 전환한 것도 그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존 ‘SUPEX 운동’의 목표가 초일류라면, 그가 주창하는 ‘SUPEX 2000’은 기업 가치의 제고를 목표로 하는 ‘TO-BE 모델 경영’이다. 비교적 단기간이라 할 수 있는 2년 내지 3년 기간에 추진되는 ‘TO-BE 모델경영’은 빠르게 변화하는 최근의 경영환경에 적절히 대비하는 경영전술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
그는 10년 후 SK그룹의 미래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굳이 10년 뒤 SK그룹의 모습을 정리한다면 고객과 주주, 종업원 모두가 만족하는 이상적인 기업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구상하고 있는 ‘이상적 기업’이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 것인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