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LG CNS 신사명 선포식에 참석한 구본무 회장 (왼쪽서 세번째) | ||
원모씨의 갑작스런 죽음은 구 회장에게뿐만 아니라, LG그룹 오너 일가 전체의 크나큰 비극이었다. LG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원모씨의 죽음이 가족이나 그룹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이 사건은 구 회장 본인뿐 아니라 그룹의 경영구도를 흔들어 놓았다는 게 재계 인사들의 분석이다. 원모씨는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 2대 회장인 구자경 명예회장, 3대 회장인 구본무 회장의 다음 대를 이어갈 주인공이었다. 이는 LG가의 가풍이 장자 중심의 유교 전통을 철저히 지킨다는 점에서 예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잠시 LG가의 가풍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LG가에는 1947년 구인회 회장이 락희공업사를 설립하면서 사업을 시작한 이후 세가지의 전통이 생겼다. 첫째는 그룹의 대표권은 구씨 가문에서 맡되 적장자로 이어지며, 둘째는 구씨와 허씨의 역할을 7대3 비율로 분할하고, 셋째는 여자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 이 전통은 1969년 말 구인회 회장이 작고한 이후 적장자인 구자경 회장이 경영권을 이었고, 다시 1995년 구본무 회장이 3대 총수에 오르면서 확인됐다.
또 LG가의 적장자에 대한 가문 내 예우는 여느 집안보다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문을 이어갈 적장자는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교육받고 가문의 어른이 아니면 어떤 경우도 외부인에게 큰절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다.
LG그룹의 사시(社是)가 ‘인화’인 것은 가족의 연대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같은 LG가의 가부장적 의식은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넌다’는 안전성에는 도움이 되지만 적극성이나 진취성에서 약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 LG그룹 고위 경영인 출신 인사의 말에 의하면 구자경 명예회장은 장손인 원모씨에게 항상 “가문의 대통을 이어갈 장손”이라는 의식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원모씨의 죽음은 사적으로 구본무 회장 부부와 LG가의 큰 슬픔이기도 했지만, 공적으로는 그룹의 경영구도에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이어온 LG가의 특성상 종손인 원모씨의 죽음은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될 수 없었다. 원모씨가 죽은지 2년 뒤 구본무 회장이 51세의 늦은 나이에 막내딸을 얻은 데서도 아들을 잃은 구 회장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시 LG그룹 안팎에서 오간 얘기를 종합해보면 당시 구 회장 부부는 남다른 지극 정성을 들여 늦둥이를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반드시 원모씨의 요절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구본무 회장이 경영권을 받은 이후 그룹 내부의 소유 및 경영구조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만은 사실이다.
재계에서는 LG그룹이 다른 재벌에 앞서 지주회사 구조를 만들고, 구 회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소유구조를 개편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는 시각이 없지 않다. LG그룹의 소유 및 경영구조에 가시적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98년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LG그룹은 LG화학을 축으로 한 석유화학 계열과 LG전자를 축으로 한 전자 계열 등 크게 두 줄기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1998년 이후부터 창업 동지이자 경영 동반자인 허씨 집안과 구본무 회장의 형제 및 친족들이 하나둘씩 계열사를 맡아 독자경영에 나서기 시작했다. 실제로 구본무 회장의 당숙인 구자훈 회장과 삼촌인 구자학 회장이 LG화재와 LG유통의 단체 급식사업인 아워홈을 갖고 각각 독립했고, 조부(구인회 회장)의 형제인 구태회, 구평회, 구두회 회장이 LG전선, LG닛코동제련, LG칼텍스가스, 극동도시가스 등 4개사에 대한 계열분리로 사실상 그룹에서 독립했다.
▲ 지난 98년 12월 당시 LG반도체 구본준(구본무 회장의 둘째 남동생) 대표이사 부사장이 빅딜 과 관련한 LG측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
허씨 집안도 하나둘씩 LG그룹에서 독립하고 있다. 물론 대다수 허씨 집안 경영인들이 LG그룹의 우산 속에 머물고 있지만,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 허경수 코스모산업 사장 등도 독자 경영을 하고 있다. 1998년 이후부터 허씨 집안은 건설, 유통, 정유 등의 계열사를 맡아 독자경영에 대비하고 있다. LG그룹의 경영구조는 2003년 벽두부터 엄청난 변화를 보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구 회장이 그룹총수에 오른 이후 단계적으로 추진해온 경영구조 개편작업이 2003년부터 가시화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미 분가했거나 독자경영에 나선 계열사를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의 소유구조는 2003년 3월에 출범할 (주)LG라는 지주회사를 정점으로 한데 묶이게 된다. 이 작업이 끝나면 LG그룹의 소유구조 및 경영구조는 지주회사인 (주)LG와 각 자회사가 줄기를 중심으로 매달린 포도송이처럼 전체 그룹이 수직적으로 연결되는 단순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소유 및 경영구조의 개편은 계열사간 상호보증이나 지급보증으로 동반 부실화되는 부작용을 막을 뿐 아니라, 계열사간 경영투명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그룹측은 내다보고 있다. 사실 이같은 소유 및 경영구조를 형성할 경우 LG그룹의 예상처럼 경영투명성을 높이는 효과는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주회사를 통한 계열사 지배는 이상적인 소유구조이긴 하지만, 오너의 계열사 지배권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수 재벌들은 변형된 지주회사 개념을 도입하거나 도입 자체를 망설이고 있다.
구 회장이 경영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가장 큰 슬픔은 1998년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긴 일이다. 구 회장은 지금도 그와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질 정도다.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기는, 이른바 반도체 빅딜이 처음 공개된 것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 뒤인 1998년 6월10일이었다. 최초로 빅딜을 공개한 주인공은 김중권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이날 김 비서실장은 서울 시청앞 조선호텔에서 열린 능률협회 주최 강연회에 참석해 “대기업의 사업조정을 위한 빅딜이 있을 것이다”고 폭탄 발언을 했다. 김 실장의 이 발언은 정•재계를 들쑤셔 놓을 정도로 폭발력이 대단했다. 빅딜정책이 모습을 드러내자 재벌들은 아연 긴장했다. 어떤 재벌의 사업이 빅딜 대상 1호가 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와 함께 재벌들 사이에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느냐’는 색다른 의문도 고개를 들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재계에서는 심각한 내분이 일어났다. 빅딜 대상에 LG반도체, 삼성자동차, LG PCS, 현대석유화학, 삼성석유화학 등이 오르내리면서 재벌끼리 치고받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빅딜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난상토론으로 이어지던 빅딜은 시간이 지나면서 LG반도체와 현대전자가 1호 대상으로 압축되고 만 것이었다. 당시 LG그룹 고위 경영진에 있었던 관계자의 회고.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시 LG반도체는 미국 인텔사로부터 투자유치를 협상중이었는데, 빅딜 대상으로 거론되면서 협상이 중단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구본무 회장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반도체 빅딜은 석달이나 공방전을 벌인 끝에 1998년 10월7일 현대전자와 LG반도체를 합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 결정을 발표한 사람은 당시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전경련의 이 결정에 대해 구본무 회장은 펄펄 뛰었다. 당시 회장비서실 직원이 전하는 얘기. “전경련 모임에 다녀오신 회장님께서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찬물 한컵을 벌컥벌컥 들이키셨다. 자리에 앉지도 않으신 채 두세 시간을 상기된 표정으로 분을 삭이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만했다. 당시 LG반도체는 상당한 흑자를 남기고 있었고, 일시적으로 반도체값이 떨어지긴 했지만 사업특성상 금방 회복이 가능했다.
그러나 빅딜 파트너인 현대전자는 달랐다. 현대전자는 이미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는 데다, 반도체 가격이 급락해 적자가 눈덩이처럼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현대전자가 LG반도체에 합병된다면 모를까,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기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구본무 회장의 생각이었다. 더욱 구 회장을 괴롭게 한 것은 선대회장 시절부터 잘해오던 사업을 자신의 대에서 잃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평소 입버릇처럼 말한 부친의 충고를 수없이 되뇌었다.
구 회장은 그때부터 전경련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평소 좋아하던 골프 회동에도 구 회장은 불참했다. 그는 한동안 재계 관계자들을 만나길 꺼렸다. 구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재계 고위 인사의 얘기. “빅딜이 있은지 얼마 안돼 구 회장과 저녁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식당에 있는 TV에서 반도체 빅딜과 관련된 뉴스가 나왔는데, 갑자기 구 회장이 깊은 한숨을 쉬고는 ‘그만 먹고 나가자’고 했다. 구 회장이 이 문제로 인해 얼마나 가슴에 못이 박혔는지 알 수 있었다.”
재계 인사들은 구 회장이 이런 모습을 보인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구 회장은 반도체 빅딜이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빅딜 추진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LG가 불리한 조건을 수용해야 했던 점에 대해 그는 분노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구 회장은 1999년 1월6일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LG반도체를 넘기기로 하는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
당시 강유식 구조조정본부장은 1999년 1월7일 기자회견에서 반도체 빅딜을 수용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빅딜이 국가적인 관심사이고, 정부의 구조조정 문제를 결정짓는 문제라 그렇게(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정부의 압력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구 회장은 LG반도체를 넘기는 대신 통신회사인 데이콤을 인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중에 구 회장의 뜻은 성사되긴 했지만, 데이콤을 인수하기까지는 적잖은 우여곡절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