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 한국을 방문한 미국 HP사 피오리나 회장을 접 견하고 있는 구본무 회장. | ||
“구본무 회장은 1995년 2월 한국 3대 재벌인 LG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 직전 그룹의 이름을 현대적인 이름인 LG로 바꾸었고, 취임 후에는 그룹의 임원들을 GE나 모토롤라에 파견시켜 다국적 기업의 경영을 배워오도록 했다. 그는 취임 후 임원들이 매출뿐 아니라 자금융통에 관해 힘든 목표를 달성토록 촉구했다. 그리고 옛날식 안이한 경영스타일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골프와 탐조를 즐기는 구 회장은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관리자들과 비공식적인 모임을 갖기를 즐긴다. 하지만 때론 필요에 따라 단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실례로 구 회장은 몇몇 계열사에서 경영계층을 10단계에서 3단계로 대폭 축소하는 과감성을 보이기도 했다.”
<포브스>의 이 기사는 구본무 회장의 경영관과 성격, 스타일을 압축한 것이었다. 그는 ‘컨트리스타일’의 털털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경영과 관련해서는 단호하고 과감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그의 장점은 남을 속이는 상혼(商魂)이나 상술(商術)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LG그룹의 회장에 오른지 만 5년이 된 2000년부터 자신의 경영관을 정도경영과 일등주의라는 두 가지로 압축했다. 물론 이같은 경영관이 그에게 새삼스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룹회장에 오른 이후 줄곧 이같은 경영관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다시 이를 강조한 것은 IMF사태를 거치면서 겪은 쓰디쓴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IMF사태가 몰아친 직후 다른 재벌과 마찬가지로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는 등의 끝없는 악성 루머에 시달렸다. 당시 그는 그룹의 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김기영 연세대 경영학과 석좌교수의 구본무 회장에 대한 회고.
“과거 LG그룹의 이미지는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IMF 사태를 겪으면서 LG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LG는 유연한 기업문화를 새롭게 창출하면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바로 그 변화의 중심에 구본무 회장이 서 있다. 구 회장은 소탈하며, 꾸밈없이 담백하고 말과 행동이 한결같은 정직한 성품을 지녔다. 그는 성장의 모멘텀을 만드는 능력과 위기를 관리하는 두 가지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구 회장에게서 느껴지는 인상은 언제나 한결같다.” 구 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외양만 번지르하게 포장하는 위선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말한 것은 반드시 실천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가 ‘약속을 꼭 지킨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다. 그의 정도경영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정을 배격하고,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그의 정도경영은 ‘규칙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Rule)’이 요체다. 이 원칙은 경영정책 결정의 민주화, 형식주의의 배격, 인본주의 경영 등 세 가지 경영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본무 회장이 금성사 임원으로 재직할 때 함께 근무했던 경영인이 전해준 얘기. “처음에는 그룹회장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대하기가 거북했지만, 털털한 인간적인 매력 때문에 허물없이 지내게 됐다. 특히 부하 직원들이 본의 아니게 저지른 실수를 잘 감싸줘 직원들 사이에서는 ‘본무 이사 밑에서 일하면 편하다’는 농담까지 오갈 정도였다.”
▲ 연구개발현황 보고회에 참석한 구 회장이 설명을 경청 하고 있다. | ||
그런데 유독 구 회장이 주창하고 나선 ‘일등주의’가 관심을 끄는 것은 LG그룹의 기존 이미지가 도전적이거나 모험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것으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구 회장의 일등주의는 과거와 다른 도전정신과 모험주의가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사실 LG그룹의 기업사를 보면 모험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재계 관계자들 중에는 LG그룹을 가르켜 ‘행운의 기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LG그룹은 초기부터 묘하게도 손댄 사업마다 독점적 성격이 강했고, 개발한 제품이 히트치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럭키크림의 탄생과 크림원료 독점 신화, 플래스틱 용기제품 대박, 럭키치약 빅히트, 진공관식 라디오의 성공 등은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들과 맞물려 그때마다 LG그룹을 돈방석에 올라앉게 했다. LG그룹은 창업 10주년이 되던 1957년에 재벌순위 10위권에 들었고, 20주년이던 1967년에는 재계랭킹 1위에 올랐다.
당시 막강한 재력을 자랑하던 삼성그룹, 한국화약그룹, 삼호그룹, 개풍그룹 등을 제친 것이다. LG그룹이 재계랭킹 수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호남정유를 수중에 넣은 것이었다. 1965년 제2정유공장 공모경쟁에서 LG그룹은 한국화약, 롯데, 한양학원, 판본방적 등 당시 막강한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은 재벌들을 물리치고 행운을 잡은 것이다.
LG그룹이 호남정유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던 데는 몇가지 요인이 있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지목됐던 삼성그룹이 ‘사카린 밀수사건’이라는 한비사건에 휘말려 수주전에 나서지 못한 것이 LG그룹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제2정유업자 신청에 나선 LG그룹이 정유공장 부지를 여수에 마련한 점이었다. 이는 당시 196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호남지역 푸대접이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당시 재계에서는 LG그룹이 제2정유사업자로 선정된 배경에 서정귀 전 호남정유 사장의 물밑지원이 있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실제 서정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후배로 나중에 5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당시 재계의 막후 실력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어쨌든 당시 재계 관계자들은 LG그룹이 막강한 재벌들을 제치고 제2정유사업권을 따내자 “남보다 한발 앞서 생각하고, 손댄 사업마다 행운을 잡는 재복(財福)있는 기업”이라며 부러운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이같은 성공은 LG그룹의 기업문화를 보수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라는 평가가 많다.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LG그룹은 재계서열 5위권 밖으로 벗어난 적은 없다. 그러나 LG그룹은 1980년 재계랭킹 1위에 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수위자리를 재탈환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현대나 대우 같은 신흥재벌이 급부상한 것도 원인이지만, 독과점에 익숙했던 LG그룹의 보수적 사업성향이 더 큰 원인이었다.
독과점에 가까웠던 비누와 치약사업, 라디오와 TV사업, 그리고 정유사업으로 막강 재벌이 됐으나, 주력사업 부문에서의 독점적 지위가 무너지면서 흔들렸다. 특히 삼성그룹이 전자사업에 진출한 것은 LG그룹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전자부문 시장을 두고 LG그룹이 30년 가까이 삼성그룹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LG그룹의 보수성은 독점적 체제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강한 ‘수성(守城)’심리에서 비롯됐다는 게 재계의 해석이다. 1981년 발효된 독점규제법은 모든 사업에 대한 거센 도전을 불러와 LG그룹을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구본무 회장의 ‘일등주의’는 바로 이같은 과거의 경영정책을 탈피하는 것이다. 그가 ‘과거의 안이한 경영관행에서 벗어나 도전적인 경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배경이다.
구 회장의 경영목표는 LG그룹이 ‘세계 빅스리’의 대열에 드는 것이다. 그는 2002년 신년 인사에서 이 목표를 자신의 취임 15주년이 되는 2010년까지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이런 야망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의 강한 승부욕과 치열한 도전정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부정적이지 않다. 구 회장은 이미 자신의 목표를 향해 뚜벅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구회장과 형제들]
구본무 회장은 두 명의 여동생과 세 명의 남동생이 있다. 희성그룹 회장인 본능씨, LG필립스LCD 사장인 본준씨, 희성정밀 부사장인 본식씨, 그리고 여동생인 훤미씨와 미정씨 등이다. 남동생 중에 구 회장을 측근에서 도와주고 있는 사람은 셋째동생인 본준씨뿐이다. 본능씨는 구 회장이 그룹회장에 오른 직후인 1996년 희성그룹을 이끌고 독립했다. 막내인 본식씨도 둘째형을 도와 희성그룹 계열사인 희성정밀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 형제들 중 유일하게 LG그룹에 몸담고 있는 본준씨는 세계 LCD(액정표시장치) 시장점유율 1위(전체시장의 16% 점유)를 차지하고 있는 LG필립스LCD의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졸업한 본준씨는 시카고대 경영학 석사 출신이다. 1951년생인 본준씨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잠시 미국 AT&T사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다.
그후 본준씨는 반도체 빅딜로 사라진 LG반도체 부장으로 1986년에 합류했으며, LG전자, LG화학 등 주력사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98년 반도체 빅딜 당시 LG반도체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형인 구본무 회장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 LG반도체가 현대전자에 넘어가고 나서 2000년부터 현재의 LG필립스LCD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