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직원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고 있는 이웅열 회장. 활달 한 성격을 타고난 이 회장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도전 적인 자세로 그룹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다. | ||
▲생년월일:1956년 4월18일
▲주 소: 서울 성북구 성북동
▲본 적: 서울 종로구 세종로 1-14
▲학 력:1975. 2 서울 신일고 졸업
1977. 3 고려대 경영학과 수료
1983. 2 미국 아메리카대 졸업(경영학 전공)
1985. 2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원 졸업(MBA)
▲경 력:1977.11 (주)코오롱 입사
1985.2 (주)코오롱 이사(뉴욕지사 근무)
1986.2 (주)코오롱 도쿄지사 근무
1987.1 코오롱그룹 아주본부장
1987.7 (주)코오롱 상무이사
1989.7 코오롱그룹 기획조정실장(전무)
1991.2 코오롱그룹 부회장
1994.7 (주)코오롱 대표이사 사장
1996.1 코오롱그룹회장 취임
가계도
▲조부:이원만 창업주(작고)
▲조모:이위문(작고)
▲부:이동찬(81) 코오롱 명예회장
▲모:신덕진(79)
▲자:경숙(56)
▲자형:이문조(62) 영남대 교수
▲자:상희(53)
▲자형:고석진(작고)
▲자:혜숙(50)
▲자형:이동혁(55) 고려해운 사장
▲자:은주(48)
▲자형:신영철(52) 재미 의사
▲본인:웅열(46)
▲부인:서창희(42)
▲매:경주(43)
▲매제:최윤석(43) 브릿지증권 한국지사 전무
▲장남:규호(고3)
▲장녀:소윤(중3)
▲차녀:소민(중1)
‘신구(新舊) 조화’, ‘보혁(保革) 화합’. 이 말들은 역사적으로,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했던 모양이다. 고대 유물에도 ‘요즘 젊은 것들’이란 표현이 있다고 한다. 최근 한국 재계도 이 문제에 봉착해 있다. 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를 지배해온 오프라인 경제활동의 근간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른바 e-비즈니스라는 새로운 경제개념이 등장한 때문이다.
e-비즈니스의 등장은 전통적 사고를 지닌 경제인들을 궁지에 몰고 있다. 낯선 컴퓨터 용어와 신조어 앞에 옛 사고를 가진 경영인들은 말문이 막혔다. 1백원을 투자해 만든 물건을 일일이 손으로 들고 다니며 팔아 1백10원을 버는데 길든 옛 경영이 왠지 시대에 뒤처진 것 같고, 입지가 좁아지는 느낌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대체 얼마나 벌 수 있는지도 모르는 사업에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쾌척하고, 투자금은 또다른 투자로 승수효과를 내며 불어나는 점이다. 옛 경영인들은 번개처럼 내달리는 경영환경의 급변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심각한 박탈감에 빠졌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한국 재계에서 이같은 변화의 선두에 선 신경영인으로 꼽힌다. 이 회장의 올해 나이는 46세.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그의 경영마인드는 글자 그대로 ‘첨단 신세대’다. 그는 재벌총수들의 모임인 전경련에서도 ‘e-비즈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사실 이웅열 회장이 신경제의 첨단에 서 있는 점은, 코오롱의 기업 역사성에 비춰보면 매우 아이러니해 보인다. 코오롱은 비록 규모면에서 재벌 서열 20위권이지만, 한국 재계의 대표적인 전통 재벌에 속한다.
‘나일론’ 화학섬유를 팔아 부를 축적했고, 지금도 섬유를 주업으로 하고 있는 코오롱의 사업 구조상 이 회장이 ‘e-비즈’를 주창하는 게 어색한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지금도 코오롱의 경영인들 중에는 이 회장의 e-비즈론에 익숙지 않은 사람도 없지 않아 보인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이 회장은 ‘청바지와 곡괭이론’을 들며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주)코오롱이 원사를 만드는 회사라고 해서 인터넷과 관련이 없습니까. 원료 구매과정만 해도 인터넷을 이용하면 비용이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습니까. 미국의 골드러시 때 금광을 갖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청바지와 곡괭이를 만드는 회사도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청바지와 곡괭이 제조회사가 바로 인터넷과 IT사업인 것입니다.“ 신경제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웅열 회장의 집안은 대대로 남자 손이 귀한 편이다. 코오롱그룹 창업주이자, 이 회장의 조부인 이원만 회장도 외아들인 이동찬 명예회장만 두었고, 자신 역시 1남5녀의 외아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회장은 스스로 자신이 그룹을 물려받은 것에 대해 “내가 잘나서라기보다 외아들이라는 행운 때문”이라고 자주 말한다.
이 회장은 어려서부터 다섯명의 누이들과 자랐지만, 오히려 그의 성격은 여성적이기보다는 남성적인 것을 좋아했다. 특히 구기운동을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축구, 야구, 테니스, 탁구 등 운동이라면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운동광이었다. 그는 커서도 당구, 골프 등 모든 운동을 좋아했고, 한번 시작하면 웬만한 프로 수준이 될 때까지 끝장을 볼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 1980년대 중반 미국 유학 시절 이 회장은 골프에 흥미를 느껴 일주일 동안 미국 PGA 선수들이 훈련받는 골프 스쿨에 입학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매일 새벽 5시반에 일어나, 하루 3천~4천개의 연습공을 쳤다.
1주일간 2만5천개 가량의 공을 쳤으니 손바닥이 갈라져 진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반창고를 붙이고 계속 연습했다. 이런 탓인지 이 회장의 요즘 골프 핸디캡은 ‘3’. 웬만한 프로선수에 못지 않은 실력이다. 이 회장은 재계 내에서 골프를 잘치는 재벌총수 3인방 중 한 사람에 꼽힌다.
▲ 지난 96년 회장 취임식에서 아버지인 이동찬 명예 회장과 함께 손을 맞잡아 들어보이는 이웅열 회장. | ||
그의 학창 시절 친구들은 “웅열이는 짠돌이였다”고 기억한다. 재벌집 아들임에도 그는 친구들에게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그릇을 사주지 못할 정도였다. 이는 이 회장 집안의 가훈이 ‘근검, 절약, 약속’인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부친 이동찬 명예회장은 이 회장이 학교에 다닐 때 한번도 용돈을 풍족하게 준 적이 없었단다.
모친 신덕진 여사도 외아들인 이 회장에게 “남자가 돈을 쓰고 바보 소리는 듣지 마라”며 돈의 귀중함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다. 가훈인 근검, 절약, 약속의 세 가지 덕목은 장성한 지금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회장은 지금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약속을 잘 지키고,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통한다.
이 회장의 성격은 한마디로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도전적이다. 그의 이런 사교성과 승부를 보는 도전적인 성격은 사업을 해나가는 데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부친 이동찬 명예회장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명예회장은 평생 경영에서도 ‘인정과 의리’를 중요시했다. 부친이 ‘내실위주 경영’을 중시했다면, 이 회장은 ‘도전경영’에 초점을 둔다.
그의 이런 성격은 조부 이원만 창업주(1992년 작고)의 성품과 매우 닮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참의원을 지냈던 이원만 창업주는 호방한 성격으로 대외 활동을 많이 했으며, 당시 박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이동찬 명예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웅열이는 성격이 활달하고 호방하여 할아버지(이원만 창업주)를 많이 닮았다”고 술회했다.
이 회장은 효심이 깊기로 소문이 나 있다. 지금도 그는 이원만 창업주 시절부터 살아온 성북동 자택에서 부친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출장을 가거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침식사는 반드시 부모님과 함께 할 정도이다. 1956년 생인 이 회장은 원숭이띠다. 또 혈액형이 O형인 그의 별자리는 양자리. 그의 별자리는 ‘천부적 재능과 함께 거칠고 격렬한 모습과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을 함께 지녔다’고 한다.
신일고를 졸업한 뒤 고려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이 회장은 2학년을 마치고 현역으로 군에 입대를 했다. 군에 입대하면서 그는 (주)코오롱에 입사했다. 그는 최전방 일선에서 사병으로 3년 동안 복무했다. 제대 후 1979년 대학에 복학했으나, 때마침 터진 10·26사태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어수선해 가족과 상의를 거쳐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 아메리카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조지워싱턴대에서 MBA를 받았다. 그후 1985년 (주)코오롱 이사로 승진한 뒤 뉴욕지사에서 근무하다가 이듬해 도쿄지사로 자리를 옮겼다. 1989년 그룹기조실장으로 본격 경영수업에 들어간 그는 1991년 그룹부회장, 1994년 (주)코오롱 대표이사, 1996년 그룹회장에 올랐다. 그룹회장에 취임할 당시 그의 나이는 만 40세였다.
이 회장은 아메리카대를 졸업하던 1983년 벽지 전문 생산업체인 동남갈포 서병식 회장의 외동딸인 서창희씨와 결혼했다. 창희씨는 이 회장보다 4살 아래였다. 창희씨는 이화여대 사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결혼 후 창희씨는 대외 활동보다는 조용히 집에서 자녀 교육과 남편 내조를 하고 있다.
이 회장 부부의 만남은, 이 회장의 큰 누나인 경숙씨 소개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결혼 주례는 신병현 전 총리가 맡았는데, 신 전 총리는 이 회장의 넷째 누나인 은주씨의 시아버지였다.
이 회장은 장남 규호, 장녀 소윤, 차녀 소민 등 1남2녀를 두고 있다. 장남과 장녀는 현재 영국에 유학중이어서 막내 딸과 살고 있다. 이 회장은 자녀들의 의사를 존중해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한다.
그러나 부친으로부터 받았던 가르침인 ‘근면, 절약, 약속’의 세 가지 덕목에 대해서는 반드시 지키도록 하고 있다. 이 회장은 자녀들의 용돈도 철저하게 중류가정 이하 수준으로 주고 있다. 본인이 그렇게 자라왔듯이 아이들에게도 돈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