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5월 기아자동차의 신차발표회에 참석한 정의선 부사장이 환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 ||
▲성명 정의선(鄭義宣, Chung Eui-Sun)
▲생년월일 1970년 10월18일 생
▲학력
1986년 2월 구정중학교 졸업
1989년 2월 휘문고등학교 졸업
1989년 3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1993년 8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경영학사 학위 취득)
1995년 9월 미 샌프란시스코대
(University of San Francisco) 비즈니스스쿨 입학
1997년 8월 동 대학 졸업(MBA 취득)
▲경력
1997년 9월~1999년 12월 이토추상사 뉴욕지사 근무
1999년 12월∼2001년 4월 현대자동차 자재본부 구매실장(이사)
2000년 3월∼2002년 12월 현대자동차 정보기술센타 부본부장(겸직)
2001년 1월 1일 상무 승진
2001년 4월∼2002년 2월 현대자동차 영업지원사업부장(겸직)
2001년 4월∼2002년 12월 현대·기아차 A/S 총괄본부 부본부장(겸직)
2002년 1월 1일 전무 승진
2002년 2월∼2002년 12월 현대자동차 국내영업본부 부본부장
2002년 2월∼현재 현대·기아자동차 기획총괄부본부장(겸직)
2003년 1월 2일 부사장 승진
2003년 1월∼현재 기아자동차
기획실장
가계도
조부:정주영(작고)
조모:변중석
부:정몽구 현대, 기아자동차 회장
모:이정화
본인:정의선
처:정지선
자:정성이
자형:선두훈(의사)
자:정명이
자형:정태영(현대카드 부사장)
자:정윤이
자형:신성재(현대하이스코 부사장)
2001년 3월21일 밤. 심야뉴스를 통해 전해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은 많은 국민들을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한국 재계에 우뚝섰던 거목 정주영 명예회장.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동 건설, 소떼 방북 등은 그의 업적 중 단편에 불과했다. 한국 경제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주인공인 그의 타계는 그래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의 타계 소식은 또다른 점에서 국민들의 마음 한편을 안타깝게 했다. 당시 복잡하게 전개되던 현대그룹 내부의 경영권 내분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 정 명예회장이 타계했으니, 현대그룹의 앞날은 안개 속에 휩싸였다. ‘누가 벼랑에 선 현대를 구할 것인가’하는 것이 당시 한국 재계의 화두였다.
2001년 3월25일 오전 8시.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을 나선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운구행렬은, 가족과 국민들의 깊은 애도 속에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으로 향했다. 7백여 미터에 이르는 청운동 골목길은 새벽부터 시민들로 메워졌다. 시민들 중에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거나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정 명예회장의 장례행렬이 청운동 골목길을 지나갈 때 세인의 이목은 장례행렬 맨앞에 선 30대 초반의 한 젊은이에게 쏠렸다. 침울한 표정으로 고인의 영정을 가슴에 꼭 껴안은 모습의 그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손이자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의 외아들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사장이었다. 평소 언론에 거의 소개되지 않아 낯선 얼굴이었지만, 정 명예회장의 영정을 들고 장례행렬의 맨 앞에 선 그가 현대가의 장자임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성급한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서 현대그룹의 미래를 찾으려 했다.
정 부사장의 감회. “할아버님의 영정을 들고 나오면서 형언할 수 없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장자로서의 사명감이라고 할까요. 할아버님이 일궈놓으신 집안을 잘 이끌어가려면 아버님(정몽구 회장)을 더욱 잘 모셔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할머님(변중석 여사)께도 더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의 표정에는 비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할아버님께선 평생 기업을 일구시느라 바쁘셨기 때문에 할머님은 적적한 시간을 보내시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사실 일에도 성공하고 집안 일도 완벽하게 건사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워낙 효자이시지만, 저도 장손으로서 할머님을 더욱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응시하면서 무겁게 입을 연 정 부사장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현대가의 장자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정 부사장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인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이지만, 백부인 몽필씨가 슬하에 딸만 둘을 남기고 작고해 정주영가의 장손이 되었다. 정 부사장의 부상은 어쩌면 운명적인지도 모른다. 현대건설이 매각되는 등 사실상 그룹이 해체된 상황에서 현대자동차가 현대가의 정통성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에 손주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손자나 손녀를 안아준다거나, 특정 손자를 챙기는 것은 삼갔다. 누구를 편애한다는 주변의 오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정 명예회장도 유교적 전통과 보수적 가문의 풍토를 중요시했던 탓에 장손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달랐다.
그래서인지 정 부사장은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그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와의 추억 중 하나는 강릉에 갔던 일이다. 그는 강릉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테니스도 치고, 산에 오르며 진한 정을 나누었다.
정 명예회장은 평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입으로 나열하기보다는 직접 행동으로 보이는 성격이었다. 정 부사장은 어려서부터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몸으로 체득했다. 정 부사장의 눈에 비친 할아버지의 모습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소탈하고 검소하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과감한 추진력과 치밀한 계획성이 할아버지가 한국 최고의 기업 현대를 키워낸 원천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 지난 2001년 3월 별세한 고 정주영 회장의 장례 식 때 영정을 들고 청운동 자택을 나서는 정 부 사장. 아래는 생전의 정 명예회장과 함께한 정 부사장 부부. | ||
정 부사장에게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할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인물이면서, 기업인으로서는 그가 반드시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일 수도 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로서 현재 일선에 나선 현대가의 경영 3세대는 정 부사장을 비롯해 정몽근 회장의 장남인 정지선 현대백화점 부회장, 작고한 정몽우씨의 장남인 정일선 비앤지스틸 부사장 등을 꼽을 수 있다.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이은 현대자동차는 1999년 정몽구 회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현대차는 품질 개선과 미국·중국 등 해외 생산거점 확보, 월드컵 마케팅을 비롯한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바탕으로 2010년 세계 5대 메이커 진입이라는 야심찬 장기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그리고 하나하나 그 디딤돌을 마련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의선 부사장의 입지는 더욱 무게를 얻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현대차그룹을 이끌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는 정 부사장은 사실상 그룹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고, 이에 발맞춰 그의 행보 역시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정 부사장은 현대·기아차 구매본부와 국내영업본부, A/S 총괄본부, 정보기술 센터 등에서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쌓고 있다. 단지 오너 2세라는 이유로 경영에 참여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검증받은 경영인으로서 자리매김 하기 위한 포석이다.
정 부사장과 함께 근무하는 국내마케팅실 임원의 말. “3년여 정 부사장과 함께 근무하면서 오너 2세라는 부담감보다는 멋진 파트너를 만났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많이 부담스러울 거라 걱정했으나, 상당히 예의 바르고 신중하며 모든 면에서 합리적으로 상대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 인간적으로 끌렸어요. 그는 현대자동차의 경영자이기 전에 요즘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예절바른 젊은이입니다.”
국내영업본부 직원이 전하는 에피소드. “팀장급 이상 간부들의 회식이 끝난 뒤, 참석자들이 정 부사장에게 먼저 가라고 권했지만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임원들을 모두 배웅하고 난 후에야 귀가했어요.” 그는 회사내 복도에서 직원들을 만나도 늘 먼저 인사를 할 정도여서, 임직원들은 그를 가리켜 ‘분위기 메이커’로 부를 정도다.
또 올해로 경영수업 5년째에 접어든 정 부사장은, 가끔 직원들과 구내식당을 이용하지만 대부분 점심은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다가 사무실에서 혼자 때우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심 때우기’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미처 식당에 내려갈 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 유학시절 몸에 밴 실용적 생활 습관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사실 검소하고 소탈한 성격은 선대인 정주영 명예회장으로부터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을 거쳐 정의선 부사장에게로 이어진 일종의 유전적 가풍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전의 정 명예회장은 다 해진 바지를 몇 겹으로 덧대어 입고 다니고, 오래된 낡은 구두를 사무실에서 실내화 대용으로 신었을 정도로 검소함이 몸에 밴 기업인이었다.
정몽구 회장 또한 회사에서는 꼼꼼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지만 사석에서는 금방 허물없는 농담을 할 정도로 옆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푸근함을 가지고 있다. 정 회장은 지방사업장 개소식이나 야유회 등 행사에 참석할 경우, 심심찮게 직원들과 즉석 막걸리 파티를 벌일 정도로 서민적이다.
특히 정 회장은 한번 맺은 인연과 의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낼 정도로 신뢰를 중요시한다. 이런 신뢰는 직원은 물론 협력업체와도 두텁게 이어져 현대차 협력업체 중에는 사업 초기 맺은 협력관계를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이어가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은 정 부사장도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라고 주변 사람들은 전한다. 정 부사장은 소주를 즐기고, 냉면과 김치찌개를 무척 좋아한다. 직원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격식없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종종 갖는다.
정 부사장과 가끔 술자리를 함께 한다는 직원의 한마디. “정 부사장과 포장마차를 자주 가요.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오너 2세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릴 정도로 격의 없고 솔직한 성격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좀 실망스럽기도 하지요.”
대부분 오너 2세라고 하면 뭔가 다를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는 게 일반인들의 선입견이다. 특히 일부에선 재벌 2세에 대해 ‘특혜받은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정 부사장을 아는 사람들이 전하는 그의 캐릭터는 ‘보통사람’일 뿐이다. 모나거나 튀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얘기이다.
정 부사장과 함께 근무하는 또다른 부서원이 전하는 얘기. “정 부사장은 본인이 제안한 회식자리의 비용은 절대 회사 공금으로 처리하는 법이 없습니다. 한번은 ‘왜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사는 술을 왜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느냐’고 하더라구요. 일견 수긍이 가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주위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기도 했습니다.”
현대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정 부사장의 이런 모습은 ‘결코 가장이 아니다’고 말한다. 정주영 명예회장이나 정몽구 회장이 쉽게 범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지게 된 것도 ‘있는 그대로’라는 소탈함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이같은 정 부사장의 소탈함은, 그가 직원들의 신뢰를 구축하는 데 큰 밑천이 되고 있다. 정 부사장과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물론이고 그와 업무적이든, 사적이든 한번이라도 접해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겸손하고 소탈하며 신중한 사람” 이라며 신뢰를 보냈다.
그의 또다른 특성은 어느 자리에서건 자신의 의견을 강조하기보다는 늘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다는 점이다. 군자의 덕목으로 꼽히는 ‘경청의 미덕’을 통해 그는 어쩌면 영원한 평행선으로 남을 수 있는 오너와 피고용자의 관계를 ‘멋진 파트너’로 승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고경영자에 오르기까지 그가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수없이 많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갈 많은 ‘아군’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대자동차의 향후 경영구도에 큰 힘으로 작용할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