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빈 부회장이 회사관계자들과 함께 롯데 계열 유통업 체를 직접 둘러보고 있다. | ||
요즘 신 부회장의 관심은 일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아들과 막내딸에 쏠려 있다. 특히 그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는 장남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 신 부회장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한국 국적을 취득하길 바라고 있다. 장차 장남이 그룹의 사업을 이어받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그는 아들이 반드시 자신을 이어 경영을 맡아야 한다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아들이 다른 특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자유스럽게 진로를 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생각이다.
신 부회장은 아직 아들의 국적문제에 대해 확실한 매듭을 짓지는 못했다. 신 부회장은 아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길 바라지만, 부친인 신격호 회장과도 이 문제를 깊이 상의해야 하고, 부인을 포함해 가족들과도 상의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현재는 가족들 간에도 여러가지 의견이 오가고 있는 형편이어서 이 문제만큼은 아들의 생각을 우선시해 차근차근 풀어나갈 생각이다.
신 부회장의 가정적인 면은 부친 신격호 회장과 대조적이다. 신 회장은 사업에 바빠 거의 가족을 챙기지 못했다. 신 회장은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래 줄곧 1개월씩 일본과 한국을 번갈아 오가며 지냈다. 때문에 가족에 대해서는 등한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 부회장은 부친의 이같은 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국 땅에서 치열한 사업경쟁을 벌여 성공의 문턱을 넘기까지는 가족에 앞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 부회장이 가족을 유난히 아끼고 챙기는 것은 부친으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자신의 가족에게는 주고싶은 보상심리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 부회장은 부친의 처지를 이해하지만,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신 부회장은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부친을 겁낸다. 물론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일종의 경외감에서 오는 것이다. 사실 부친은 누구에게도 살갑게 대하는 성격이 아니다.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신격호 회장은 5남5녀의 형제 중 맏이다. 때문에 신 부회장의 4촌형제는 20명에 이른다. 그러나 신 부회장은 4촌형제들과 그리 가깝게 지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주로 일본에서 살아 가족간에 교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격호 회장도 이런저런 이유로 형제들과 사이가 친밀하진 않다. 지금은 독자사업으로 재벌대열에 낀 농심그룹 신춘호 회장과는 신격호 회장이 한국에서 사업을 벌일 때부터 창업동지 관계였다. 하지만 재산문제와 사업방향 문제로 갈라선 이후 두 사람은 지금까지 왕래가 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춘호 회장과 신격호 회장의 마찰은 1970년대 중반 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창업동지였던 두 사람은 중국 아서원 부지를 두고 마찰을 빚은 이후 갈라섰다. 그후 신춘호 회장은 식품업체인 롯데공업을 갖고 나가 농심으로 이름을 바꿔 성공했다.
신격호 회장의 형제 중에는 막내 남동생인 신준호 전 롯데건설 회장만이 형과 함께 사업을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신준호 회장은 얼마전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신격호 회장은 자식들에게도 드러나게 따뜻함을 표시하지는 않는 편이다. 마찬가지로 자식들의 문제를 간섭하거나 지나치게 개입하지도 않는다. 신 부회장은 어려서부터 부친과 오랫동안 정답게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자식들이 어리광을 부려도 그냥 빙긋이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가족간에 일어나는 거의 모든 문제는 모친이 알아서 처리했다.
▲ 신격호 회장 | ||
부친의 경영수업 방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심전심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친은 어떤 문제든 처음부터 결론을 짓는 법이 없다. 신사업을 하기 위해 브리핑을 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몇마디 물어보는 게 전부일 뿐이다.
신 부회장도 장차 최고경영자가 되면 부친과 같은 경영을 해나가고 싶다. 부친은 참신한 생각을 매우 중시한다. 물론 과정과 결과도 중요시하지만, 훌륭한 생각이 앞서야 결과도 좋은 것이다.
2000년 이후 롯데그룹이 동양카드를 인수하고, 많은 신사업을 추진하자 주변에서는 신격호 회장이 물러나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많았다. 팽창경영을 경계하는 신 회장의 경영마인드에 비춰볼 때 변화가 일고 있다는 시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점은 신 회장의 경영관을 잘 몰라서 하는 말들이라는 게 신 부회장의 생각이다. 부친은 누구보다 공격적인 경영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신 부회장은 생각한다. 다만 부친은 사업을 추진할 때 남보다 많은 분석을 한다.
부친은 어떤 사업을 시작할 때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같은 예측을 하기까지는 객관적인 데이타와 상황분석을 근거로 한다. 때때로 전문경영인들이 회사업무를 보고할 때 매우 긴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친은 임원들이 경영내용을 보고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몇가지 질문을 던지곤 한다. 질문은 임원들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임원들이 놀라는 것은 사업전개 과정에서 부친이 던졌던 질문내용이 핵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1994년 무렵 신 부회장이 편의점인 코리아세븐 사업을 시작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당시 신 부회장은 편의점 사업을 만만하게 보았다. ‘백화점도 1등을 하는데, 편의점 쯤이야 거저먹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세븐일레븐은 이미 일본에서 승승장구한 사업이라는 점도 편의점 사업을 만만하게 생각한 이유였다.
그러나 당시 이 사업에 대한 보고를 들은 부친은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편의점에 대한 현행 국내 법규상의 문제와 경쟁업체와의 차별성에 대한 것이었다.
순간, 신 부회장은 아찔했다. 자신감에 충만했던 그는 그런 문제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터였다. 그러나 사업을 시작한 이후 지금도 부친이 질문했던 사항과 관련된 문제들로 애를 먹고 있다.
신 부회장은 경영참여 이후 부친의 무게를 더 크게 느끼고 있다. 때때로 자신도 부친처럼 미래를 헤아려 볼 수 있는 눈이 있을까 의문을 갖기도 한다. 신 부회장은 경영참여 초기에는 주변에서 부친 신격호에 대한 여러가지 평가를 들었다. 그 중에는 대개 ‘보수적’이라느니, ‘돌다리 두드리기식 경영’이라느니 하는 따위의 비판적인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친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쉽게 내린 결론이라는 게 신 부회장의 생각이다.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롯데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일등주의를 고집한다. 이런 점에서 다른 재벌과 비교하면 보수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철학은 롯데의 생존방식이고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부친은 무슨 일이든 급진적인 변화를 싫어한다. 신사업을 하는 데도 그렇고, 임원 인사에서도 그러하다. 부친은 항상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잘할 수 있는 사업, 기존 사업과 연관된 분야를 중심으로 새 사업을 구상한다. 그렇지만 글로벌 감각을 접목시키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이 점에 대해서는 신 부회장도 동의한다. 일단 하겠다고 결정하면 반드시 1등을 해야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치열한 기업세계에서 2등도 살아남기 힘들다는 게 부친의 가르침이다.
1994년 코리아세븐을 인수해 편의점 사업에 뛰어든 것이나 1999년 로손을 인수해 대형화를 꾀한 것이 좋은 예다. 신 부회장은 부친의 가르침대로 유통과 식품사업부문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롯데의 파워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신사업이 편의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편의점이라는 세포조직을 통해 유통업을 혁신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특히 해외업체들의 무차별적인 국내 진출을 고려할 때 편의점 네트워크를 대형화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게 로손을 인수한 배경이다.
신 부회장은 디지털 문명시대에도 ‘풍요’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善)이라고 믿고 있다. 부친은 이것을 리버티(Liberty), 라이프(Life), 러브(Love)라는 개념으로 정립했다. 세칭 3L이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롯데의 기업이념이기도 하다.
이 점에 대해 신 부회장은 “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3L 정신은 디지털 시대에도 충분히 통할 수 있고 계속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나름대로의 경영모델도 제시한다. 그는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고객이 만족하지 못하는 기술혁신은 곧 비즈니스로선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라고 단정짓는다.
그는 구체적인 사례로 전자상거래 원조라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들고 있다. “미국의 전자상거래 업체들은 연간 수백억달러의 매출을 올리지만, 이중 20~30%는 배달이 안된다. 얼마나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즈니스의 성패는 역시 어떻게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본다.”
일부에서 그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경영활동을 펴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하지만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글로벌 경영문화가 기업세계에 정착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일본의 닛산자동차는 르노가 경영하고 마쓰다는 포드가 경영하지만 문제가 없다. 저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미국에서 3년을 공부하고 노무라증권에서 10년을 근무한 경험이 있다. 신토불이식 경영을 고집하는 것은 글로벌 경영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편협된 사고이다.”
신 부회장은 오랜 외국생활에서 터득한 글로벌 경영마인드를 장차 한국 롯데 경영에 적극 접목할 생각이다. 물론 롯데가 내수 위주에 치중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어디까지 이루어 낼 것인지는 단정짓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롯데의 과거 모습과 미래의 모습은 큰 차이를 보일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