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그룹 계열의 종합상사인 (주)쌍용은 한때 국내 6대 종합상사로 각광받았으나, 지난 98년 그룹 전체가 경영위기에 몰리면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가 조흥은행 등 채권단이 부채를 출자전환키로 하면서 회생의 발판을 마련해왔다.
그러나 10년이 넘도록 은행을 상대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불법 유용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도덕성에 치명타를 받게 돼 기업회생에 큰 차질이 예상된다. 특히 금융감독원이 자체 감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를 늦추는 등 금감원이 감독 당국으로서의 책임을 ‘면피’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일고 있는 등 파장이 커질 조짐이다.
금감원 내부관계자는 지난 9일 “최근 금감원이 (주)쌍용의 2천억원에 이르는 불법적인 대출사건과 관련한 내부감사를 실시해, 이 같은 사실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시중은행 관계자 역시 “은행 내 감사업무를 맡고 있는 검사부서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현재 금감원과 접촉중이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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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 ||
그러나 이번 금융사고에는 쌍용그룹 고위층뿐 아니라 (주)쌍용 관계자들과 전•현직 시중은행장, 정부 기관장들이 상당수 관련돼 있어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금융계는 보고 있다. 실제 이번 사건과 관련해 금감원 등 금융 감독 당국은 물론 해당 시중은행 감사담당자들이 대거 동원되는 한편 검찰까지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져 사안의 중대성을 짐작케 하고 있다.
15년간 장막속에 감춰져 있었던 이번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지난달 20일쯤. 8월 정기인사에서 조흥은행 부산지점으로 발령받은 A지점장이 업무 인수인계 과정에서 주거래 관계인 (주)쌍용 부산지점에 대한 수출대금 지급에 문제가 있었음을 발견, 조흥은행 검사부에 보고를 한 것이 시작이었다.
은행 내 감사역할을 하고 있는 ‘검사부’는 (주)쌍용 본사 임직원들과 함께 부산지점의 거래내역에 대한 정밀 조사를 벌인 결과 가짜 신용장을 통한 불법 대출이 무려 15년동안 벌어졌음을 확인했다. 초기 조사에서 파악된 불법 대출금액은 2백억원대였으며, 이는 은행과 (주)쌍용 부산지점에 보관된 거래장부가 3년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금감원, 조흥은행 검사부 등이 정밀 검사에 들어가면서 과거 거래내역까지 모두 파악한 결과 15년동안 2천억원대의 불법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돼 관계자들마저 경악했다는 것. 이에 따라 금감원은 급히 특별조사반을 만들어 비밀리에 쌍용그룹의 특감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감원이 내부 태스크포스팀을 극비리에 가동시켜 특감을 하는 경우는 지극히 이례적인 일. 과거 진로그룹과 거평그룹 등이 각종 비리에 연루됐을 때 가동시킨 것을 제외하고는 전례가 드물 정도다. (주)쌍용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이 사건이 시작된 것은 지난 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주)쌍용 부산 지점에는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주)쌍용 부산지점은 신발, 화학, 섬유 등의 제품을 수출하고 있으며, 지점장 이하 18명 정도의 직원이 근무하면서 연간 2천억원대의 매출을 올렸다.
그런데 당시 거래처였던 부산 소재 신발생산업체인 B사가 4백만달러의 부도를 내 이 회사를 담당하고 있던 영업담당 S씨와 관리담당 L씨가 부도금액을 메우기 위해 ‘가짜 신용장’을 만들어 조흥은행 부산지점에서 불법 대출을 받았다는 것. 이들은 중국, 동남아시아 바이어들과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는 내용의 가짜 신용장을 은행에 제시해 돈을 받아 일단 부족분을 채워넣은 뒤, 다시 만기가 돼 돌아오는 가짜 신용장 대출금을 돌려막기 위해 또다른 가짜 신용장을 만드는 일을 반복했다.
이 관계자는 “가짜 신용장을 통한 돌려막기 과정에서 연체기간이 발생해 연리 30%에 가까운 복리이자가 계속 붙어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됐고, 시간이 지나면서 천문학적인 단위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금감원과 관련 은행들에 따르면 이런 ‘돌려막기’는 금액이 얼마 안되던 초기에는 2~3개월에 서너번씩 이뤄지다가 나중에는 금액이 크게 불어나자 매월 3~4차례의 가짜 신용장 거래를 했고, 이 금액 누계가 2천억원대에 이르게 됐다는 것.
현재 (주)쌍용 부산지점 사고와 관련해 가장 많은 돈이 물려 있는 곳은 주거래 은행인 조흥은행으로 약 8백억원 가량이며, 우리은행 3백억원, 산업은행 2백50억원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만이 이번 사건의 전부는 아닌 듯하다. 문제는 쌍용그룹측 고위인사들이 이 사건을 이미 오래전에 파악하고 자체적으로 쉬쉬해오지 않았느냐는 추측이 일고 있다. 또 조흥은행 등 금융기관 관계자들이 (주)쌍용 관계자들과 결탁하지 않았느냐는 점과 금융기관 감독을 맡고 있는 금융감독 기관이 15년의 기간동안 이 사실을 어떻게 발견하지 못했느냐는 점 등이다.
특히 금융기관에서는 김석원 전 회장을 비롯, 쌍용그룹의 고위 관계자들의 지시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이 같은 의혹에 대해 (주)쌍용 관계자는 “회사 직원 관리 소홀 등 관리책임이 있지만, 회사와는 상관이 없다”며 김석원 전 회장 등 고위층의 연루 의혹을 완강히 부인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달 초 검찰에 ‘사문서 위조’ 혐의로 두 명의 직원을 고발한 상태”라며 “회사 내부의 일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는 것 같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주)쌍용 임직원과 결탁하지 않았느냐는 의혹을 받고 있는 조흥은행 역시 “전혀 사실무근이며 여신관리부에서 해명 자료를 준비중이다”고 연루사실을 반박했다.
그러나 사내 임직원의 단순한 ‘사문서 조작’ 혐의로 보기에는 이번 사건의 규모와 기간, 사회에 미치는 파장 등이 지나치게 커 책임론이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정혜연 기자 chy@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