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랍 31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인수위원회 접견실에 서 경제단체장들과 회동을 가졌다. 주간공동사진취재단 | ||
재벌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노무현 당선자가 재벌 구조조정본부에 대해 메스를 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대통령직 인수위 관계자는 최근 “대다수 재벌그룹에 있는 구조조정본부의 존재성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단 인수위 관계자의 발언 수위로 보면 “자발적인 해체 검토 요구” 수준이지만, 내용면에서는 사실상 “해체요구”가 아니냐는 것이 정•재계의 분석이다. 인수위의 한 관계자도 “외환위기 이후 상당수 재벌그룹이 기업구조 차원에서 설치한 구조조정본부는 제 기능을 다했다고 본다”고 밝혀 해체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특히 그는 “구조본은 명칭은 구조조정을 위한 기구이지만, 실제 역할은 과거의 회장비서실 또는 기획조정실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비판했다. 그러나 인수위의 또다른 고위 관계자는 “아직 공식 논의된 적은 없으며, 구조본의 해체 여부에 대해 강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발언 수위와는 상관없이 인수위측의 입장은 ‘구조본의 존립성에 대한 재검토’인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구조본의 폐지를 유도하는 유•무형의 압력이 가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에 따라 삼성, LG, SK, 현대자동차 등 재벌그룹들은 구조조정본부의 현실적 필요성과 노무현 당선자의 요구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일부 재벌들은 “구조본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인수위의 생각은 기업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또다른 재벌의 경우 “아직 구조본에 대해 인수위측의 구체적인 방향제시가 나오지 않은 만큼 두고볼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공식적인 해체요구가 있을 경우 적극적인 대응을 할 것임을 내비쳤다. 때문에 인수위측이 공식적으로 재벌들에게 구조본의 해체를 요구하고 나설 경우 이 문제를 두고 재벌과 노무현 당선자 간에 정면 대결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재벌들이 이처럼 구조본의 폐지문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구조본의 존재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너의 지분을 통한 계열사 지배가 어려운 상황에서 구조본마저 없어진다면 그룹 전체를 통합할 기구가 전혀 없고, 오너의 지배권도 약화되기 때문이다. 재벌그룹의 구조본에 대한 인수위의 입장을 정리하면 ‘기능 상실’로 요약된다.
외환위기 직후 기업의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를 전담하기 위해 구조본이 설치됐지만, 지금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특히 일부 인수위 내 강경파는 “당초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출범한 구조본의 역할이 지금은 재벌체제 유지를 위한 기구로 변질됐다”고 인식하고 있다.
구조본이 계열사간 순환출자, 계열사의 경영지배, 오너의 소유권강화 등 재벌체제의 유지를 위한 조직이 되어 있다는 시각인 것이다. 재계는 구조본의 해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할 움직임이다. 재벌들은 현실적으로 구조본의 존재가 불가피하고, 아직 기업의 구조조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재계는 인수위의 구조본 해체 요구가 장차 “재벌해체”를 요구하는 상황으로 번지지 않을까 하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재벌들이 이같은 우려를 하는 것도 일리가 없지 않다. 현재 구조본의 역할이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기능도 하지만, 그룹 전체를 통할하는 옛 비서실이나 종합기획실의 기능을 이어받은 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구조본이 없어진다면 재벌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조정기구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룹 전체를 통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재벌들은 DJ 정부 기간동안 치열하게 싸워 구조본의 기능에 대해 묵인을 받아냈던 것이다. 때문에 재벌들은 노무현 당선자측이 구조본의 해체를 요구한다면, 이를 대신할 또다른 형태의 그룹통합 기능을 담당할 조직을 만들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인수위는 아직 공식적으로 구조본의 해체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구조본의 폐해 등을 적극 홍보하면서 조금씩 재벌들을 압박해 나갈 공산이 커보인다. 노무현 당선자는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완곡하게 재벌에 대한 개혁정책을 제시하고는 있다.
하지만 구조본부터 건드리기 시작하면 이는 곧 재벌구조 전반을 뒤흔들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재계의 분석이다. 이에 따라 결국 구조본의 해체는 시간문제일 뿐, 장기적으로 해체수순을 밟아나가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 정계나 재계의 대체적인 전망인 듯하다.
그렇다고 한국 기업의 현실성을 감안할 경우 재벌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구조본과 같은 기능을 가진 조직이 완전히 사라지긴 어려울 것이라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왜냐하면 강력한 재벌개혁 정책을 추진했던 DJ 정부도 재벌의 현실을 이해하고, 재벌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사실상 기존 종합기획실이나 비서실 기능을 맡은 구조본을 묵인했다.
때문에 노무현 정부 역시 현재의 구조본 기능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새로운 조직을 허용하는 수준에서 이 문제를 마무리 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전망이 많다. 전문가들의 예상은 명칭 자체를 구조본에서 ‘전략기획본부’이나 ‘경영지원본부’ 등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직 구성도 현재보다 크게 줄어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부 기능을 계열사로 분산하는 방안이 유력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구조본이 도마위에 오른다는 것은 황제식 재벌경영이 다시 한번 논란의 대상에 오를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특히 노무현 당선자측이 주장하는 재벌개혁의 초점이 소유와 경영구조의 개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구조본에 대한 개편과 함께 재벌총수 및 오너 일가족의 비균형적 지배구조도 손질할 가능성이 많다. 삼성, SK, 현대차 등 상당수 재벌그룹들이 2세 경영체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구조본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구조본을 건드린다는 것은 기존 재벌체제 전반에 대해 또한번 정권 차원에서 메스를 가한다는 의미라는 점에서 구조본이 어떤 운명을 맞을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