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구 현대차회장 | ||
1990년대 후반까지 재계 서열은 영원한 라이벌 삼성과 현대의 선두다툼에 대우, LG가 추격하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IMF 사태 이후 현대, 대우 등 대마가 쓰러지면서 현대차와 SK가 새 별로 부상, 재계 3위를 두고 자웅 가리기에 나섰다. 재계 3위가 누가 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선두권인 삼성과 LG는 연간 매출 1백조원대를 돌파하면서 후발 주자들과는 상당한 격차를 두고 앞선 상황이기 때문.
또 3위권에 도전하고 있는 현대차 그룹과 SK그룹이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어 이들 두 재벌의 싸움이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000년 초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기아차를 묶어 현대그룹에서 분가, 정몽구 회장이 독자경영에 나선 이후 급팽창하고 있다.
또 SK그룹은 지난 1994년 품에 안은 SK텔레콤을 바탕으로 기존의 (주)SK 등을 묶어 신흥 강호로 재계 선두권을 향해 도약하고 있다. 일단 3위권에 먼저 도전장을 내민 곳은 자동차 전문그룹인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차 그룹은 지난 2일 ‘현대차 그룹, 재계 3위로 도약’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 자료의 내용을 보면, 현대차 그룹이 지난해 매출 총 56조4천억원을 올려 삼성, LG에 이어 매출액을 기준으로 재계 서열 3위에 올랐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이날 현대차그룹이 내놓은 보도자료는 다소 이례적인 것이었다. 자사의 매출 실적을 보도하는 것 외에 타 그룹(삼성, LG)과 순위를 비교하며 보도자료를 내놓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 실제로 현대차 그룹 내부에서는 지난해 매출 실적에 대해 무척 흡족해하는 모습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매출 실적도 실적이지만, 우리가 재계 3위라는 점을 눈여겨보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대차는 한술 더 떠 “2003년에도 매출 65조2천억원을 달성해 재계 3위를 계속 유지할 것으로 판단된다”며 장밋빛 전망에 젖어있는 모습이다. 현재 재계 서열을 매길 때 기준이 되는 것은 자산규모, 매출액 규모, 상장기업의 주식 시가총액 등이다.
이중 한국의 경우 통상 자산이나 매출액이 기준으로 활용된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발표하는 재벌 순위 기준은 자산규모.현재 자산규모로 보면 SK그룹이 총 47조3천7백90억원으로 현대차그룹(41조2천6백60억원)보다 6조원 정도 규모가 크다. 자산 기준으로는 SK가 재계 3위인 셈이다.
▲ 최태원 SK회장 | ||
공정위가 집계한 2001년 4월말 현재 자산 기준 재계 서열은 삼성이 69조8천7백억원으로 1위이며, 현대그룹이 53조6천3백20억원으로 2위, LG는 51조9천6백50억원으로 3위, SK가 47조3천7백90억원, 현대차가 36조1천3백60억원으로 5위에 랭크돼 있다.
계열사수에서는 1위 삼성(64개), 2위 SK(54개), 3위 LG(43개)에 이어 현대차(16개)의 순이다. 어쨌든 현대차가 갑자기 재계 3위라고 주장하고 나서자 적이 당황한 곳은 SK그룹. 현대차그룹은 보도자료에서 “삼성, LG에 이어 재계 서열 3위”라고 스스로 규정짓고 나서 SK를 당황케 한 것이다.
현대차가 재계 3위라고 ‘자가발전’한 기준은 매출액. 현대차는 2002년도에 총 56조4천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수치는 아직 최종 집계가 끝난 상황은 아니지만, SK그룹 전체가 예상하고 있는 53조원대의 매출보다 3조원 이상 많은 규모인 것만은 분명하다.
현대차의 이같은 발표에 대해 SK그룹은 의아한 표정. SK관계자는 “최근 30대 기업집단을 정하는 것에 대해 폐지론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대차 그룹이 굳이 재계 3위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또 이 관계자는 “매출액을 기준으로 평가를 한다면 우리 그룹은 사업구조상 얼마든지 규모를 늘릴 수 있다”며 현대차가 발표한 매출액 수치에 대해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이 관계자는 “사업구조나 기업의 발전적 측면에서 SK그룹과 현대차그룹이 추구하는 방향이 워낙 달라 신경쓰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매출액은 별 의미가 없다”며 현대차의 자존심을 긁고 나섰다. SK측에 따르면 지난 98년 외환위기 이후 그룹전체의 경영계획을 수립하는 방향과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
과거에는 매출액을 늘리는 외형성장에 치중했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순익구조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내실경영 쪽으로 그룹의 경영구도를 바꿨기 때문에 현대차의 매출액 기준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SK 관계자는 “우리는 외적 팽창 대신 기업가치와 시장가치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중”이라며 “재계순위보다 그룹 내실을 다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SK가 주장하고 있는 순익과 시장가치를 기준으로 두 재벌을 비교하면, SK가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일단 2001년에는 현대차가 순익을 기준으로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차그룹 16개 계열사의 순익을 모두 합칠 경우 지난 2001년 2조8천6백억원(세후 기준)의 순익을 올렸다. 반면 SK그룹은 1조3천억원 정도의 세후 순익을 거둬 현대차그룹의 절반 정도에 그쳤다. 지난 2002년에는 SK그룹의 경우 3조6천억원(세전 기준)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현대차그룹은 아직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지 못한 상태.
그러나 금융계의 추정은 현대차그룹 역시 지난해보다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시장가치를 나타내는 시가총액 면에서는 SK그룹이 24조원대(2002년 1월2일 기준), 현대차그룹은 13조원대로 SK그룹이 훨씬 앞서고 있다. 물론 시가총액은 현대차의 경우 상장기업이 6개사에 불과한 반면, SK는 9개사로 3개나 많아 단순 비교는 어려운 상황.
어쨌든 재계에서는 현대차와 SK간의 재계 3위 자리를 둔 미묘한 신경전이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국내기업간 선의의 경쟁의식을 부추겨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