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결과적으로 처벌 받은 사건 관계자는 소속사 대표와 전 매니저 둘뿐이었다. 성접대와는 관련 없었던 폭행 등 혐의만 적용됐다. 접대 대상으로 거론된 인물들은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장 씨 사건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 건 지난해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와 조사기구인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의 조사대상에 오르면서부터다. 조사단은 당시 장 씨 사망과 관련한 수사기관의 수사가 부실했던 정황을 상당수 파악했고, 복수의 사건 관계자로부터 새로운 진술들을 확보했다. 그리고 검찰은 지난 2018년 6월, 조사단 조사 결과를 종합해 공소시효가 남아 있던 전직 조선일보 기자를 장자연 씨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게 바로 장자연 씨 동료 윤지오 씨다. 그는 당시 성추행 상황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윤 씨는 조사단 진술을 통해 그동안 겹겹이 쌓여있던 숱한 의혹을 한 꺼풀 벗기면서, 10년 동안 세상을 떠돌며 꺼져가던 ‘장자연 리스트 진실 규명’의 불씨를 살려냈다.
고 장자연 씨 동료 윤지오 씨. 사진=박정훈 기자
이후 윤지오 씨는 지난 3월 5일 TBS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쇼’에 출연해 처음으로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고 대중 앞에 섰다. 그는 “자연 언니의 진정한 안식을 바라며 마지막 증언을 한다”며 방송과 언론 인터뷰, 책 ‘13번째 증언’ 출간 등을 통해 장 씨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 언론과 대중들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윤지오 씨는 ‘장자연 문건’을 직접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의 말에 ‘사회적 파급력’이 생긴 건 이 때부터다. 현재 문건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건 윤지오 씨 단 한 명이다. 그동안의 장 씨 관련 수사나 재판 기록 등을 종합하면 장 씨가 숨지기 전 남긴 문건 전체를 확인한 사람은 손에 꼽는다. 유가족과 처음으로 장 씨 문건을 보도한 기자, 당시 장자연 씨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그 문건을 봉은사에서 태우던 날 함께 있었다는 윤지오 씨다. 유가족을 비롯한 앞서의 관계자들은 문건 내용과 분량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사실상 ‘진상 규명’의 열쇠를 윤 씨 홀로 쥐고 있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 “윤지오 씨 증언 신빙성 의문” 주장 나와
그런데 최근 윤지오 씨 증언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윤 씨와 약 10개월간 연락을 주고받으며 책 출간을 도왔다는 김수민 작가, 그의 법률 대리인 박훈 변호사, 장자연 문건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김대오 기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지난 23일 윤지오 씨를 명예훼손(허위사실) 및 모욕 혐의로 고소했다.
이 고소 사건만 보면 최근 김 작가와 윤 씨의 온라인 설전 과정에서 윤 씨가 김 작가를 모욕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실제 김 작가 측 문제제기의 핵심은 윤 씨의 ‘장자연 리스트’ 증언에 있다. 과거 사건이나 재판 기록,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윤지오 씨가 직접 확인했다는 장자연 문건 속에 포함된 ‘장자연 리스트’가 실제로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실제 김 작가의 고소장을 접수하며 박훈 변호사와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대오 기자는 윤 씨가 출간한 책을 인용하며 “윤지오 씨가 주장하는 일목요연한 ‘장자연 리스트’는 절대 원본 문건에 없었다는 걸 밝힌다. 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린다. 50여 명의 리스트는 원본 속에 없다. 오히려 윤지오 씨는 나중에 리스트 명단 수를 50명에서 30명으로 바꿨다”고 주장했다.
앞서 윤 씨는 책에서 “(장자연 문건의) 마지막 두 장에는 이름이 쭉 나열돼 있었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였다. A4 용지 한 장은 빼곡히, 또 한 장은 3분의 1 정도의 분량으로 사람들 명단이 적혀 있었고 족히 40~50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김수민 작가의 법률 대리인 박훈 변호사는 ‘장자연 리스트’ 관련 윤지오 씨 증언에 신빙성과 진정성에 의문이 있다고 밝혔다. 사진=문상현 기자
윤지오 씨가 장자연 문건 속에 ‘편지 형식의 글’이 있었다고 주장한 부분도 문제 삼았다. 김 기자는 “장자연 관련해 편지 형식의 글이 어디서 왔나. 장자연 씨가 작성한 게 아니라 전준주가 만들어 낸 문건이다. 이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사건 1년 후쯤부터다. 문건 등장 시점이 전혀 다른데 봤다고 하는 건 상당히 논리적인 오류가 있다”고 덧붙였다.
유족 이전에 문건을 봤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윤지오 씨는 소속사 대표 유장호 씨 차 안에서 사본을 봤다, 원본을 봤다 말이 계속 바뀐다”며 “당시 원본은 유장호 씨가 사전에 봉은사 특정 장소에 묻어 놨었다. 사본이든 원본이든 윤지오 씨가 봤다고 하는 거, 차 안에서 봤다는 건 설명이 안된다”고 지적했다.
김 기자는 또 윤 씨 책 가운데 “(소속사 대표가 장씨의) 어머니 기일에도 술접대를 강요했다고 적혀 있었다”는 대목에 대해서도 “제가 본 문건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윤 씨의 초기 수사기관 진술에도 등장하지 않는 발언이다. 이는 당시 장 씨를 술집에 태워다줬던 로드매니저가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과거 사건기록을 보면, 장 씨의 로드매니저 김 아무개 씨는 2009년 경찰 수사에서 “장자연이 차 안에서 누군가와 통화했고 어머니 기일이라고 하면서 울다가 다시 주점으로 내려갔던 것을 기억한다”라고 증언했다. 이를 통해 김 기자는 윤 씨의 증언에 10년 동안 쌓여온 의혹들과 각종 루머들이 섞여 ‘오염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박 변호사 역시 “윤 씨가 유일한 목격자라고 하는데, 도대체 뭘 유일하게 목격했다는 것이냐. 윤 씨는 (장자연 사건과 관련해) 성추행 건 이외에 본 것이 없다”며 “그럼에도 ‘장자연 리스트를 봤다’ ‘목숨 걸고 증언한다’면서 시민들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윤 씨가 봤다는 ‘장자연 리스트’는 수사 과정에서 작성된 수사 서류를 본 것일 뿐”이라며 “후원계좌를 닫고 출국하면 문제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윤 씨에게 얘기했는데, 오히려 윤 씨가 김 씨를 비난하고, 저를 비롯해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자 편에 서서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비난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윤 씨는 후원계좌를 열어 해외 사이트에서 펀딩도 하고 있다. 고인의 죽음을 매우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박 변호사는 기자회견 직후 “윤 씨를 사기혐의로 추가 고발한다”고 밝혔다.
이번 고소를 앞두고 “장자연 사건의 진상 규명을 방해하려는 세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의혹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김 작가 측은 기자회견을 통해 제대로된 재수사를 촉구했다. 박훈 변호사는 “장자연 사건이 철저하게 재수사돼서 고인의 죽음 원인에 대해서 낱낱이 밝혀졌으면 한다”며 “그 일환으로 가짜를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대오 기자 역시 “과거 장자연 문건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사람으로서 가짜들을 몰아내는 것이 진실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윤지오 씨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강력 반발했다. 여러 장의 사진과 장문의 글을 올린 그는 박 변호사가 기자회견 등에서 “윤 씨가 피고소인이 된 만큼 출국금지를 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제가 범죄자에요? 증인입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저는) 엄마의 건강이 최우선”이라며 “제가 어디에 있든 중요한 것은 안전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안전이 보장되어 보이시나요?”라고 덧붙였다. 윤 씨는 이어 “제가 죽어야 속이 편하신가 봅니다. 죄송한데 악착같이 살아남아 행복하게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 겁니다”라며 “스피커를 향한 공격은 치졸하고 비겁한 마지막 발악으로 보이는군요”라고 반박했다. 그는 김 작가와 나눴던 카카오톡 내용을 직접 공개하기도 했다.
윤지오 씨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최근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사진=윤지오 씨 인스타그램
고소사건과 별개로 대검 진상조사단 단원인 박준영 변호사도 페이스북을 통해 윤 씨 증언에 대해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 차분히 살펴봐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는 “윤 씨의 증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검증은 도대체 누가하고 있나. 이런 분위기에서는 할 수 있는 검증, 그리고 검증의 결과 발표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검증되지 않은 진술로 결과가 나올 경우, 자칫 그 진술이 흔들리면 결과가 뿌리 채 흔들릴 수 있다는 게 박 변호사 주장의 핵심 취지로 보인다.
실제 박 변호사의 우려는 일부 현실로 드러났다. 장자연 씨 사건을 조사 중인 대검 과거사 진상조사단이 언론에 수사 권고를 공개한 지 1시간 만에 조사팀 내부에서 이를 반박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앞서 진상조사단은 지난 22일 상위기구인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 중간보고 과정에서 ‘장자연 리스트’ 의혹 사건과 관련해 제기된 특수강간 의혹에 대해 검찰에 수사개시 여부 검토를 권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실상 검찰에 정식 수사를 요청한 셈이다. 이 권고 요청 배경에서도 윤지오 씨의 진술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조사단 측은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요구도 고려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곧바로 같은 조사팀 내부에서 수사 권고 취지로 보고한 게 아니라는 반박성 주장이 나왔다. 스스로 장 씨 사건 조사팀 소속이라 밝힌 이 팀원은 기자들에게 “동료배우였던 윤지오 씨가 의혹을 제기해 기록을 좀 봐달라는 일부 의견이 나와 보고한 것이다. 혐의가 특정되고 인정되는 것처럼 보고된 것이 절대 아니다”라고 했다. 이 팀원은 “현재까지 성폭력 혐의점에 대해 수사 권고에 이를 정도의 증거가 확보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조사단은 내부적으로 이 사건에 특수강간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를 두고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다 다수결을 거쳐 앞서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4팀 소속 6명 중 4명이 수사개시 여부 검토 권고에 동의했고, 나머지 2명은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중간보고를 받은 과거사위는 조사단의 최종 보고가 있을 때까지 해당 사건의 결론을 미루기로 했다.
윤지오 씨와 김 작가 측의 주장이 엇갈리는데다, 특히 윤 씨가 장자연 문건을 소각되기 전에 봤다고 주장해 왔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정 진술서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진실공방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결국 양 측 모두 강력 대응을 예고하고 있는 만큼 앞서의 고소‧고발 등을 통해 사실 여부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법조계에선 ‘장자연 사건’과 윤지오 씨 진술 논란을 따로 떼어 확인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진상 규명과 최근의 논란을 엄격히 구분해야만 장 씨 사건의 온전한 실체가 드러날 수 있다는 얘기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