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 ||
현대건설이 1억5천만달러를 북한에 보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송금창구로 지목된 현대건설 싱가포르 지사의 총책임을 맡았던 전직 현대건설 고위 관계자 A씨가 이같이 증언해 파문이 예상된다.
A씨는 현대건설이 돈을 송금했던 시기로 추정되고 있는 지난 2000년 당시 싱가포르 지사에서 근무했다.
A씨는 지난 2월7일 <일요신문>과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현대건설 본사에서 싱가포르 내 은행에 비밀계좌 등을 만들어 북한에 송금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싱가포르 지사 명의로 어떤 계좌도 만들어진 적은 없다”며 “북한 송금설이 사실이라면 송금은 싱가포르 지사 모르게 본사에서 이뤄진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싱가포르가 송금창구로 지목받고 있는 데 대해 “싱가포르는 자금이동이 자유로운 지역이며, 당시 싱가포르에는 현대그룹 계열사의 지사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A씨는 이와 관련해 “2000년 당시 해외지사뿐 아니라 현대건설의 자금 관리는 책임자인 K씨가 맡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모든 사실을 알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현대건설은 2000년 당시 자금이 완전 바닥난 상태였고, 심지어 영업활동비조차 지급하지 못했다”며 “송금이 됐다면 이 자금은 전자, 중공업, 자동차 등 다른 현대그룹 계열사에서 지원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서 현대건설의 송금액이 회사측의 자체 조달자금이 아니라 계열사에서 지원됐을 수 있다는 의혹에 대해 그는 “충분히 근거있는 추측”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2000년 당시 싱가포르 현대건설 지사가 입주하고 있던 빌딩에는 현대중공업, 현대전자, 현대상선 등 3~4개 계열사 지사들이 한 빌딩에 운집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이익치 전 회장이 이끌던 현대증권은 ‘바이코리아’붐을 타고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아 다른 계열사보다 자금이 풍부한 상황이었다는 것.
A씨의 증언에서 미뤄보자면 현대건설 싱가포르 지사를 통해 보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1억5천만달러가 현대증권 계좌를 통해 송금됐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A씨는 당시 본인이 총책임자였던 현대건설 싱가포르 지사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거듭 강조했다. A씨가 지사 모르게 비밀계좌를 운영했을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싱가포르 지사의 경우 수주영업만 했을 뿐 지사의 모든 재정문제는 철저히 본사에서 관리했기 때문.
A씨는 “싱가포르 지사에 재직할 당시 지사의 역할은 싱가포르 내 현지 공사를 수주하는 업무만 담당하고 있었을 뿐, 재정과 관련된 부분은 모두 본사(현대건설 서울 본사)에서 맡았다”고 전했다.
A씨는 “지사의 활동이 제한되는 것은 회사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총책임자도 모르게 본사에서 재정문제를 모두 관리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재정문제를 모두 본사에서 총괄 관리했기 때문에 간혹 지휘권 문제를 두고 K씨(대북 송금 지휘자)와 다툼을 벌인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2000년 당시 싱가포르 지사에는 2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본사에서 파견나올 때 싱가포르 내 공사 수주 영업활동 외에는 다른 권한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A씨는 덧붙였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지사에 소속된 모든 직원들이 영업 외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알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는 것.
총책임자였던 A씨 역시 자금과 관련해서는 영업비 등 지사활동비 부분만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문제의 시점에 총책임자인 나도 모르게 본사에서 정몽헌 당시 회장 등 임원들이 싱가포르 지사를 극비리에 방문하고 돌아갔다는 사실을 추후 보고받은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공개했다.
그는 이 같은 사실을 평소 친분있게 지내던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 직원과 국정원 관계자들에게 들었다고 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정몽헌 회장 등 일행은 지사에 들르지 않고 싱가포르 모처에 머물다가 서둘러 속히 귀국했다는 것.
정 회장이 방문을 했었다는 사실조차 한국으로 돌아간 한참 후에야 대사관 직원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A씨에 따르면 지난 1999년에서 2000년 사이 정몽헌 회장 등 일행이 싱가포르에 지사 모르게 다녀간 적은 대략 15차례 정도나 된다는 것.
당시 고 정주영 명예회장도 1년에 두 차례 이상은 꼬박꼬박 싱가포르 지사를 찾았다고 A씨는 말했다. 실제로 정주영 회장은 지난 1990년 이후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유달리 싱가포르를 자주 방문해 눈길을 끌었었다.
또 A씨는 또 “당시 정몽헌 회장과 북한측 인사가 싱가포르에서 만났다는 등의 루머도 끊이질 않았다”고 말했다. A씨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만약 싱가포르 지사 명의의 비밀계좌를 통해 북한에 1억5천만달러가 송금됐다면 현대건설 최고위층이 깊이 연루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혜연 기자 ch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