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를 내민 사람은 허름한 점퍼 차림의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민 수표의 단위는 ‘0’의 갯수만 해도 무려 10개.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계좌를 하나 터 달라고 말했다.
사실 C지점장도 한때는 이 만한 돈을 가끔 접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증권 등 금융시장이 침체에 빠지면서 수년동안 그런 거금을 보지 못했다. 가장 많은 큰손들의 계좌가 있다고 하는 압구정동 일대 증권사 창구에서도 그런 거액의 계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수표의 주인공은 C지점장에게 “주가가 빠질 만큼 빠졌냐” “종목추천은 누가 잘 하느냐”는 등 몇 마디만 물어보고는 창구를 떠났다. 이튿날 C지점장은 본사 임원으로부터 큰손 고객 유치에 애를 썼다는 격려전화를 한통 받았다.
3월 이후 증권시장이 큰 폭으로 오르면서 숨었던 큰손들이 다시 객장으로 모여들고 있다. 역시 이들의 거주지는 강남이다. 증권가와 사채시장에서는 “강남의 큰손들이 다시 움직인다”며 술렁이고 있다. 막대한 금력으로 강남을 움직이는 숨은 얼굴들은 누구일까.
국내 증권시장에는 ‘큰손’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만큼 베일에 가려져 있고, 본인들의 행동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피하기 때문이다.
대체 ‘큰손’은 누구일까. 현재 기업투자자문회사 임원으로 재직중인 한 인사에 따르면 보통 ‘큰손’을 구분짓는 기준은 1천억원대를 기준으로 한다고 한다. 개인이 운영할 수 있는 금융자산이 1천억원대 이상인 사람들을 일컬어 ‘큰손’이라고 부른다는 것.
이 인사에 따르면 벤처기업이 한창 활황을 누리던 지난 99년, 2000년 이후 강남에선 세칭 ‘큰손 7인’이 있다는 것. 이들을 일컬어 ‘강남을 움직이는 7인방’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들 7인방은 한때 약 10조원대의 자금을 굴리며 강남의 보이지 않는 황태자로 군림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들 7인방은 벤처업계의 몰락과 더불어 그들의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되면서 지금은 활동이 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7인방의 위력이 약해진 이후 지금은 새로운 얼굴들이 세대교체를 했다는 게 이 인사의 얘기. 이들 ‘신진 큰손’은 과거 7인방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부동산, 은행 등을 통해 ‘큰손’들의 자금을 운용했지만, 요즘은 기업의 인수와 합병(M&A), 직접적인 주식·채권 투자 등을 통해 자금을 운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새롭게 떠오른 ‘큰손’들의 연령대가 점차 낮아진 데 그 이유가 있다. 또 다른 벤처업계 관계자는 “보통 ‘큰손’에 대해 일반인들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지만, 놀랍게도 30~40대의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30, 40대의 큰손들은 최근 M&A시장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실제로 최근에 성사된 K제약, G건설 등에도 이들이 적극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덧붙였다.
그가 전하는 ‘신흥 큰손’들의 자금조성 경로를 보면 처음에 시드머니는 아버지나 친인척으로부터 받았다는 것. 대부분 부유한 가정 출신이라는 얘기다.
수천억원대에서 많게는 조 단위의 자금을 운용하는 이들은 부친의 사업(그리 유명한 기업은 아니지만)을 이어 받아 경영 전면에 나서는 인물도 있고, 아예 직장을 다니지 않은 채 돈굴리기에 전념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거의 명문대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그 중 상당수는 미국이나 외국에서 유학을 다녀온 것도 비슷하다. 때문에 이들은 유학 동문회 등으로 자연스럽게 서로 친분을 쌓고 있다.
이들에 대해 잘 아는 인사에 따르면 최근 K제약을 M&A하는 데 참여했던 큰손의 경우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학부를 마친 뒤, 명문대인 S대 대학원을 다닌 엘리트라는 것.
이들 중 상당수는 수천억원대의 자금 운용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굴린다. 실제로 금융지식이 많은 이들은 재테크에 관한 한 자부심이 대단하기 때문.
물론 MBA코스를 밟은 유학파들이 신흥 큰손의 주류지만 국내파 큰손들도 더러 있다. 국내파 큰손들의 경력상 공통점은 대부분 증권사나 금융기관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큰손’에 관한 다양한 얘기를 전한 이 관계자는 “국내파의 경우 소위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유학파 큰손과 국내파 큰손은 많은 돈을 굴린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지만, 소위 노는 물은 다른 것으로 알려진다. 유학파는 유학파끼리, 국내파는 국내파끼리 서로 만나 자금 운용 및 투자가치가 있는 회사 등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들은 주로 어디서 만날까. 이들과 금전거래를 했던 벤처기업인에 따르면 신흥 큰손들은 유흥가의 본산인 강남 소재 룸살롱이나 가라오케 등에는 출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존재가 유흥업소 등을 돌아다니며 알려지는 것에 대해 극도로 기피하기 때문. 대신 이들은 남들이 모르도록 허름한 장소에 가서 끼리끼리 회합을 갖는다고 한다.
지난해 말 자금사정이 어려워 신흥 큰손과 접촉한 적이 있는 대기업 K사 재무담당 임원은 “기존 사채업자나 큰손과는 달리 담보물은 회사 주식이나 유동성이 높은 유가증권을 요구했고, 자신과 이해가 맞으면 바로 자금을 풀어줄 정도로 거래가 깔끔한 게 특징이었다”고 전했다.
이 임원은 IMF 직후 자금이 어려워 명동, 분당 일대 사채시장을 돌 당시 30억원을 빌리기 위해 임원 여섯 명의 아파트 권리증 등 담보물을 맡긴 뒤 돈을 받기까지 3주일이나 걸렸던 적도 있었다. 반면 이 임원이 신흥 큰손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두 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큰손들은 자신의 자금 중 상당 부분을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 금융기관에 맡기고 있는 부분도 특징. 금융 관계자는 “대부분이 해외사정에 밝고 해외 인맥이 넓어 자금 중 상당부분을 해외에 파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