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1군 데뷔 2년차에 갑작스런 감독 교체를 경험하게 된 이강인. 사진=발렌시아 CF 페이스북
[일요신문] 바람 잘 날 없는 집안에 폭풍이 몰아쳤다. 이강인(18)이 소속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발렌시아CF의 이야기다. 지난 1년 사이 이강인은 ‘한국 축구의 미래’에서 현재가 됐다. 지난 2018-2019 시즌 소속팀 발렌시아의 A팀 일원으로 올라섰다. 연령별 대표 월반을 거친 U-20 월드컵에서는 눈부신 활약으로 골든볼(MVP)를 거머쥐었다. 관심 있게 지켜보던 파울루 벤투 A대표팀 감독도 그를 불러 데뷔전을 치르게 했다.
순조롭게 단계를 밟아 나가고 있는 이강인과 달리 소속팀 발렌시아는 혼란 속에 휘말리고 있다. 리그 개막 3라운드 만에 마르셀리노 가르시아 토랄 감독이 경질되면서부터다. 프로 스포츠에서 시즌 중 감독 교체는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38라운드로 진행되는 리그 일정 중 3라운드가 끝난 시점에 감독이 잘려나가는 일은 이례적이다. 그 배경에는 구단주와 감독의 충돌이 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여름부터 이어진 ‘구단주 vs 감독·단장’ 갈등
발렌시아 구단주 피터 림과 마르셀리노 감독의 결별은 지난여름부터 그 전조를 보여 왔다. 선수 영입과 방출, 각 대회에 임하는 방식 등을 놓고 ‘구단주 라인’과 감독이 포함된 마테우 알레마니 ‘단장 라인’이 대립 각을 세워왔다.
이들의 갈등에는 이강인의 존재도 한몫했다. 축구단의 본질적 운영을 위해 노력하는 알레마니 단장과 마르셀리노 감독 측은 이강인의 점진적인 성장을 원했다. 부담을 갖지 않는 선에서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 나가도록 도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강인 개인이 출전 시간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이에 이강인이 좀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팀으로 임대 가능성이 대두되기도 했다.
갑작스레 발렌시아를 떠나게 된 마르셀리노 가르시아 토랄 감독. 사진=연합뉴스
구단 가치 창출에 관심을 두는 듯한 ‘비즈니스맨’ 피터 림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적극적인 아시아 마케팅 등을 위해 이강인을 좀 더 팀의 전면에 내세우길 원했다. 일부 현지 언론에서는 피터 림이 이강인을 중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가치가 오른 현 시점에 판매를 바랄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양측의 충돌은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흘러갔다. 여름 이적시장에서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알레마니 단장, 파블로 롱고리아 기술이사 등의 퇴진까지 거론됐다. 알레마니 단장은 마르셀리노 감독을 자리에 앉히고 두터운 지지를 보낸 인물이다. 그의 퇴진은 감독의 동반 사퇴를 의미했다.
하지만 갈등은 극적으로 봉합됐다. 지난 8월 2일 싱가포르에서 구단주와 운영진이 긴급 회동을 가졌고 ‘자진 사퇴 으름장’은 없던 일이 됐다. 이때까지는 피터 림 구단주가 한 발 물러서는 듯했다. 그가 단장과 감독의 프로젝트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하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싱가포르 회동 이후에도 구단주는 운영진의 영입작업에 협조적이지 않았다. 남아있는 앙금 때문이었을까. 지난 11일, 결국 피터 림은 감독 경질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마르셀리노 감독은 자신의 해임에 대해 구단 측 통보가 아닌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밝혔다. 결별의 원인은 갈등이었음이 명백해지는 증언이었다. 알레마니 단장 역시 사퇴 절차를 밟고 있다.
#반감 보이는 선수들
발렌시아 선수단은 혼란에 휩싸였다. 스페인 매체 ‘수페르데포르테’는 마르셀리노 감독이 작별인사를 건네자 일부 선수들이 울먹이거나 흥분하며 동요를 보였다고 전했다. 피터 림 구단주가 감독 해임 시점을 리그 개막 이후로 잡은 이유도 선수들이 임대나 이적 등의 선택을 취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르셀리노 감독은 발렌시아 지휘봉을 잡은 지난 2년간 위기도 있었지만 좋은 결과를 만들어왔다. 특히 지난 시즌에는 리그 4위, 코파 델 레이(국왕컵) 우승, 유로파컵 4강 진출 등으로 실현 가능한 최상의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선수들은 성과를 내는 감독을 따르기 마련이다. 갑작스런 이별에 선수단의 동요는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선수들은 집단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감독 교체 직후인 바르셀로나와의 리그 경기에선 별다른 자세를 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진 첼시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 전날 열린 공식 기자회견을 보이콧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감독의 경질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신임 알베르트 셀라데스 감독은 홀로 회견장에 앉아 “이상적인 상황은 아니다”라면서도 “중요한 것은 선수들이 뛰기를 원하고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셀라데스 감독의 말대로 구단주에 대한 선수들의 불만이 경기장 위로는 번지지 않는 모양새다. 감독 교체 이후 첫 경기는 상대가 ‘슈퍼클럽’ 바르셀로나였기에 2-5 참패를 겪었다. 다음 경기 첼시전에서는 1-0 신승으로 분위기를 뒤집었다.
#이강인 입지 영향은?
구단 내홍의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된 이강인은 입지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목소리가 큰 피터 림이 이강인의 중용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임 마르셀리노 감독은 국내 팬들로부터 이강인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지 않고 있다는 질타를 받았다. 그는 지난 시즌 발렌시아에서 4-4-2 포메이션 가동을 고집했다.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가 익숙한 이강인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이에 마르셀리노는 측면에 이강인을 활용했다. 그마저 중요성이 떨어지는 경기나 짧은 시간만을 활용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마르셀리노가 이강인을 ‘매우 조심스럽게 키웠다’고 반박한다. 이강인을 1군에 올리는 등 점차 단계를 밟아 나갈 수 있게 도운 인물이 마르셀리노라는 것이다. 알레마니 단장과 마르셀리노 감독은 이강인이 더 많은 경험을 쌓아 성장할 수 있도록 타팀 임대를 바라기도 했다.
반면 신임 알베르트 셀라데스 감독은 마르셀리노와 비교해 길지 않은 커리어에서 공격적인 4-3-3 포메이션을 즐겨 사용한 인물이다. 바르셀로나전에서는 전임 감독의 운영을 그대로 가져다 썼지만 첼시전에선 변화를 줬다. 중원에 3명의 중앙 미드필더를 배치했다. 향후 4-3-3으로 변모하거나 4-4-2가 지속된다 하더라도 중앙 포지션 선수층이 두텁지 않기에 이강인이 더 중용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이강인의 출전 시간도 늘어났다. 마르셀리노 체제에서 3경기 6분 출전에 그친 이강인은 셀라데스 체제에서 2경기 24분을 소화했다. 챔피언스리그라는 큰 무대에 데뷔했다는 점 또한 고무적이다. 지난 시즌엔 벤치만 달구다 출전은 무산됐던 경험이 있다.
다만 새 감독 체제에서 이강인이 전면에 나서는 것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셀라데스는 프로무대 감독 경험이 전무한 인물이다. 지도자 커리어 대부분을 스페인 연령별 대표팀에서 보냈고 이마저도 성공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결과를 냈다. 이에 성공적인 감독 아래에서 차근차근 성장하던 이강인이 험지로 나서게 됐다는 평가도 뒤따르고 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나쁜 버릇 또 나왔다’ 피터 림의 기행 일지 피터 림(가운데)은 발렌시아 구단 운영 이외에도 축구계 각종 사업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번 발렌시아의 급작스런 감독 교체 사태를 두고 일각에서는 구단을 쥐락펴락하는 구단주 피터 림의 버릇이 또 나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싱가포르 출신 재벌 피터 림은 구단 재정이 어렵던 2014년 발렌시아를 인수했다. 이후 구단을 살린 구세주와 마구잡이식 운영으로 구단을 망치는 인물, 두 얼굴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구단 인수 이후 안정적 운영을 선보이던 피터 림의 기행은 2015-2016 시즌 중반 시작됐다. 전임 감독이 사퇴하자 빈자리에 위대한 선수였지만 지도자 경험은 일천한 개리 네빌을 앉힌 것이다. 코치 자리엔 그의 동생 필립 네빌이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사업으로 피터 림과 친분이 있었다. 시즌이 진행되던 중 발렌시아라는 빅클럽 지휘봉을 잡은 게리 네빌은 경험 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는 리그 16경기에서 단 3승만을 올리며 시즌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아웃됐다. 또한 피터 림은 구단주 활동기간 내내 ‘슈퍼 에이전트’ 조르제 멘데스의 입김에 휘둘리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피터 림의 구단 인수 과정에서도 멘데스의 추천이 있었고 이후 감독 선임, 선수 영입 등 멘데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난여름에도 피터 림은 단장 라인에 멘데스 소속 공격수 라다멜 팔카오의 영입을 권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발렌시아 팬들도 구단이 멘데스 사단의 ‘쇼케이스장’이 되고 있다는 비판을 했다. 피터 림은 지난 3월 국내 언론 사회면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버닝썬 사태’가 번지는 과정에서 그와 그룹 빅뱅 전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와의 친분이 재조명된 까닭에서다. 승리는 클럽 버닝썬 운영 관련 의혹을 해명하며 피터 림의 딸 킴 림을 언급했다. 승리는 지난 2015년 1월 발렌시아 홈구장에 초대돼 이들 부녀와 만난 바 있다. 승리가 그룹 활동 당시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하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국내 라이선스’ 또한 이 시기에 피터 림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괴짜 구단주’ 피터 림이 구단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2015년 여름부터 2017년 여름까지 발렌시아는 일명 ‘암흑기’를 걸었다. 2시즌 연속 12위에 그치다 알레마니 단장-마르셀리노 감독 체제에서야 최고의 무대로 불리는 챔피언스리그로 복귀했다. 피터 림이 다시 목소리를 키우는 현재 팀이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 축구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상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