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소재’란 이름의 계열사를 통해 슬래그 파우더를 생산하는 E사는 국내 최대의 레미콘 생산업체. E사는 올 들어 시멘트 업체들이 시멘트 공급량을 인위적으로 줄여 영업상 큰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월부터 4월까지 매출손실만 3백67억원을 입었다는 것. 그러자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지난 5월29일부터 시멘트업체의 불공정 담합행위 의혹조사를 개시했다.
또 E사쪽에서도 지난 6월11일 쌍용양회, 동양시멘트, 라파즈한라시멘트 등 외국계 메이저 3사를 공정위에 같은 혐의로 정식 제소했다. 슬래그 시멘트 생산을 놓고 정식으로 싸움이 벌어진 것.
이 싸움은 지난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 8월 라파즈한라시멘트의 실뱅 가르노 사장은 스페인 시멘트 시장을 예로 들며 “대체재 시장을 초기에 어떠한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막지 않는다면 이는 시멘트 수입으로 연결되어 국내 시멘트 시장의 가격하락이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가르노 사장의 발언이 주목받는 이유는 국내 시멘트 업계의 지형도 변화와 관련이 깊다. IMF때 국내 주요 시멘트 생산업체들은 경영권이 모두 외국 자본으로 넘어갔다.
쌍용양회는 일본의 태평양시멘트로, 한라시멘트는 프랑스의 라파즈사로, 동양시멘트는 라파즈사가 지분의 25%를 가져갔다. 이들 세 회사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53%. 사실상 국내 시멘트 업계도 시멘트 국제 카르텔에 편입된 셈.
이후 국내 시멘트가격은 5만2천원에서 2002년 9월 6만9천원으로 34%나 올랐다. 이 기간 국내소비자 물가지수가 18.5% 오른 것에 비하면 인상률이 거의 두배인 셈이다. 이렇게 국내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외국계 자본의 대표인 가르노 사장의 슬래그 분말 사용 확산에 대한 경고는 곧바로 슬래그 생산업체와의 분쟁으로 이어졌다.
지난 1월 슬래그 분말의 KS 규격산입을 위한 공청회에서 회사들은 슬래그의 KS규격 산입을 반대했다. 또 비시멘트 회사로서 슬래그 분말을 생산하는 E레미콘에 대해 시멘트 제한 공급을 통보했다.
▲ 시멘트 업계와 한판 ‘슬래그 분쟁’을 벌이고 있는 E사의 계열사인 K소재 공장. | ||
E사와 가장 치열하게 맞붙은 곳은 동양시멘트. E사는 동양으로부터 해마다 필요량의 35% 정도의 시멘트를 공급받아 왔다. 동양이 물량을 줄이는 것은 곧바로 E사의 숨통을 끊는 것이나 마찬가지.
때문에 올해 들어 동양쪽 경영진과 E사쪽 경영진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잦은 만남을 가졌다. 시멘트업계에선 E사에 슬래그 분말을 생산하는 K소재를 폐쇄할 것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5월29일 공정위의 담합 조사가 시작되자 슬래그 분쟁은 E사와 동양의 차원을 넘어서 메이저 시멘트 회사 대 E사간의 분쟁으로 확산됐다.물론 E사도 북항 개발 사업권을 포기 못하겠다는 강경론으로 이어졌고, 시멘트 회사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경방침을 밝혔다. 문제의 핵심은 왜 시멘트 회사들이 E사에 슬래그 분말 생산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느냐는 점.
슬래그분말 사용은 막을 수 없는 현상이다. 이미 쌍용이나 동양 등 메이저 시멘트 회사들도 슬래그 분말을 생산하고 슬래그 시멘트를 팔고 있다. 하지만 비시멘트 제조사인 E사가 슬래그를 생산하고, 다른 레미콘 회사들도 슬래그 생산에 뛰어들 기미를 보이자 이를 서둘러 막아 선 것.
실제로 아주레미콘은 슬래그 생산설비를 도입하려고 발주까지 했다가 시멘트 회사들의 시멘트 공급중단 압력에 발주를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업계 일각에선 시멘트 대체재인 슬래그 시멘트의 사용확산이 시멘트 회사 입장에선 순익 감소 요인이라는 점에서 슬래그 시멘트의 생산 주도권도 확실하게 챙기겠다는 시멘트 회사의 방침이 이번 사태를 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동양쪽에선 “E사에 대한 공급량을 줄이지 않았다. 계절적 요인으로 인한 공급물량 감소와 영동지방이나 김해 등 수해지역에 우선해서 시멘트 공급을 한 것을 놓고 E사가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시멘트 메이저와 레미콘 업체의 갈등 양상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이번 분쟁이 어떤 타결점을 찾을지 궁금하다.
철광석을 녹여 쇠를 만드는 고로철강생산 과정에서 슬래그란 물질이 나온다. 이 물질은 시멘트 대체효과가 있어 몇년 전부터 자원 재활용 차원에서 적극 활용되고 있다. 당연히 국내에선 고로를 갖고 있는 포스코에서만 슬래그 원료가 나오고 있고, 그 외에는 수입해서 쓰고 있다.
슬래그는 시멘트에 비해 값도 싸고 자원 재활용이란 면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통상 1평방제곱미터의 레미콘을 만들기 위해서는 3백30㎏의 시멘트가 필요하지만 슬래그 분말을 쓰면 약 80㎏의 시멘트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
선진국의 경우 슬래그의 시멘트 대체율이 20%를 넘는 등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국내의 경우 슬래그 대체율이 5% 정도로 아직 성장 잠재력이 크다. 시멘트 업계 입장에선 시멘트의 독점적 지위를 흔들고, 그만큼 수입을 갉아먹을 수 있는 부담스런 존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