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고 정몽헌 회장의 빈소를 지키고 있는 정몽구 현대차 회 장. 사진공동취재단 | ||
하지만 정 명예회장의 사망 이후 그룹이 분리되면서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이 떨어져 나가면서 덩치가 줄어들었다. 현대건설, 현대전자, 현대증권 등 현대그룹의 본류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에게 넘겨졌지만 대북사업으로 재정난에 처한 현대그룹은 현대건설과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 등 그룹의 주력 사업체가 은행관리로 넘어가면서 현재는 현대아산,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택배 등 7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소규모 그룹으로 주저앉았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서 정몽헌 회장이 작고함에 따라 그룹 형태를 유지하기도 버겁게 됐다는 점이다. 그가 떠난 지금 남아있는 7개의 계열사를 이끌 만한 구심점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경영권이 어디로 갈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단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잡을 수 있는 대안으로는 정 회장의 부인 현정은씨 등 유족들을 먼저 꼽을 수 있다. 또 정 회장이 대북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해달라고 부탁한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도 경영권에 바짝 다가서 있는 인물이다.
먼저 현정은씨 등 정 회장 유족이 경영 일선에 직접 나서는 방안. 정 회장의 유족으로는 부인인 현정은씨와 1남2녀가 있다. 큰딸인 지이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모 광고회사에서 인턴사원을 지내며 유학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들인 영선군은 아직 고3.
때문에 유족이 경영에 참여할 경우 부인 현정은씨가 나서는 방법이 가장 유력하다. 현씨가 회장이나 고문 직함으로 상징적인 현대그룹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각 계열사 운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하지만 이는 현씨가 경영에 참여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
재계에선 이보다는 김윤규 사장이 현대그룹의 상징적인 구심점이 되는 것이 더 현실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자신의 유고 뒤에도 “정몽헌 회장이 나를 대신한다”고 부탁해 “그렇게 하겠다”는 북한쪽의 약속을 얻어냈다고 한다.
시스템보다는 ‘정치 지도자의 한마디’가 더 우선인 북한 체제의 특성 때문에라도 이런 약속은 중요했다. 이런 약속이 있었기에 현대는 정주영-정몽헌 2대 회장 재임시절 북한에 1조5천억원의 ‘투자’를 감행했던 것.
하지만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었던 정 회장의 갑작스런 유고로 대북경협사업 라인에 공백이 생긴 것. 하지만 정 회장은 자신의 사업 유지를 ‘김윤규 사장에게 넘겨준다’는 점을 유서에 분명히 썼다.
김 사장이 현대그룹의 간판인 현대아산과 현대그룹의 경영을 책임지고 유족들 중에 한 명이 현대그룹의 직함을 달고 협업하는 시스템을 상정할 수 있는 것. 그러나 이 방법의 가장 큰 문제는 현대그룹이 자체 생존할 수 있는 자금이 그룹 계열사에 남아 있느냐하는 점이다.
현대그룹이 처한 가장 큰 딜레마는 대북사업의 지속 여부. 이미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에 말려 돈흐름이 거의 끊긴 상태다. 아직도 현대아산의 사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선 막대한 돈이 필요하지만 현대그룹 계열사 중 큰돈을 남겨 재원을 마련해 줄 회사는 없는 형편이다. 현대상선이나 현대엘리베이터, 현대택배 등이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큰돈을 남기고 있지는 못하다.
현대건설은 현재 정몽헌 회장의 지분이나 계열사 지분이 완전 소각된 채 채권단 관리로 넘어가 있다. 감자 뒤 은행단 관리로 넘어간 뒤 현대건설은 수익도 내고 정상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
그러나 외환은행이나 산업은행 등 채권단들은 현대건설이 정상궤도에 들어가면 매각을 통해 투입된 자금을 회수하려고 할 것이다. 때문에 벌써부터 증권가에선 잠재적인 인수합병주로 현대건설을 꼽고 있다.
현대건설은 정주영 현대 창업자가 세운 현대그룹의 시발점이자 국내 건설업계의 간판. 이런 회사를 정몽구 회장 등 현대 2세들이 다른 세력에 넘겨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현대자동차그룹은 그룹 분리 뒤 수많은 계열사를 늘렸지만 건설업에만은 진입하지 않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계열사인 기아차 시흥 공장을 이전해 그 부지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세운다는 얘기가 설득력있게 나돌고 있다. 또 정몽구 회장 역시 현대산업개발 등을 통해 건설산업에 경험이 많다.
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현대건설이 갖고 있는 현대상선의 지분 8.69%도 딸려 온다. 현대상선은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이다. 현대상선이 현대아산의 지분 40%를 갖고 있는 등 나머지 현대증권이나 현대택배 등 대부분의 현대 계열사를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
물론 현대상선의 대주주는 현대엘리베이터(15.16%)이고. 현대엘리베이터의 대주주는 정몽헌 회장의 장모인 김문희씨(18.57%)다. 정몽헌 회장도 생전에 현대아산과 나머지 현대그룹 계열사들에 대해 나름의 방화벽을 쳐놓은 것. 현대상선의 현대아산 지분 40%를 제3자에게 매각하는 경우 대북사업과 현대그룹을 분리할 수 있는 것.
대북경협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게 된 김윤규 사장과 현대상선의 현대아산 지분 40%를 넘겨받는 제3자가 현대의 대북사업 기득권을 넘겨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는 현대의 대북사업을 개척한 정주영 회장 일가와 정몽헌 회장의 유족 등의 전폭적인 지지나 합의를 이끌어내야 가능하다.
이런 점 때문에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대북경협 참여 여부나 현대건설 인수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증권가 일각에선 현대차가 수출 등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만큼 정몽구 회장이 대북사업에 직접 나서는 데 부담을 느낄 경우 정세영 현대산업 명예회장 등 다른 유족들이 참여하는 방법도 검토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물론 정부가 주도해 반관반민의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대북경협의 남쪽 파트너로 등장시킬 경우 현대그룹의 경영권 문제는 단순하게 정리될 수도 있다.
현대아산이 현대그룹과 분리되고, 대북경협이라는 리스크가 큰 사업이 없어질 경우 현대그룹은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 현대택배 등으로 정비돼,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는 안정적인 소규모 그룹으로 남게 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미 북에 투자한 1조5천억원의 자금과 대북경협의 기득권도 현대아산의 자산이 분명한 이상 대북사업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현대그룹이나 정 회장 유족들, 특히 정주영 회장의 2세들이 포진한 범현대가에서 어떤 대안을 내놓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