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가 1·2세대들이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 이터 주식을 함께 사들이면서 경영권 방어에 행보를 같이 해 눈길을 모으고 있다. 고 정몽헌 회장의 빈소에서 조문 객을 맞는 정몽준 정몽구 정몽근 등 형제들의 모습. | ||
이는 ‘현대’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자신들의 회사에만 주력했던 형제들이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한 자리에 뭉쳤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집안의 어른이자 고 정주영 회장의 막내동생인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명예회장이 “당분간 현대그룹을 맡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귀추가 주목된다.
더욱이 이번에 현대가 형제들이 뭉치게 된 내막에는 정상영 회장의 ‘몽헌이의 계열사를 절대 남에게 넘길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와 설득이 있었다는 점에서 향후 정상영 회장의 거취가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고 정몽헌 회장의 죽음 앞에 ‘현대’의 형제들이 다시 뭉칠까.
고 정몽헌 회장이 이끌었던 현대그룹의 지주회사는 현대엘리베이터였다. 현대엘리베이터가 금감원에 공시한 자료를 보면, 지난 6월30일을 기준으로 현대엘리베이터는 정몽헌 회장의 장모인 김문희씨가 전체 지분의 18.57%를 보유해 최대 주주였다. 이어 현대엘리베이터(주)가 9.42%, 현대종합상사 7.4%, 현대증권 4.88%, 현대중공업 2.14% 등으로 현대가 일가의 우호지분이 총 42.41%였다. 당시 현대엘리베이터의 외국인 지분은 0.5%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몽헌 회장의 타계소식이 전해진 직후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식은 순간 떨어졌다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외국계 펀드가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이지만, 이 외국계 펀드는 GMO 이머징 마켓펀드라는 이름의 펀드였다. 이 회사는 단숨에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식 28만9천3백50주(5.16%)를 사들였다.
국내 증권거래법상 한 펀드의 주식 비율이 5%를 넘으면 자연히 공시를 하게 돼있다. 정체불명의 펀드였던 GMO는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보유 목적에 대해 ‘투자’라고만 짧게 밝혔다.
제로 이 펀드가 투자를 목적으로 주식을 매집했을 수도 있겠으나, 현대그룹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이는 SK그룹의 대주주로 단숨에 떠오른 소버린의 출현과 흡사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나타난 부분이나, 단순 투자 목적이라고 밝힌 부분, 정체불명의 국적도 알 수 없는 펀드라는 점이 불안에 떨게 한 것이다.
일순간 현대그룹 안팎에서는 정몽헌 회장의 타계 이후 현대그룹마저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고 정몽헌 회장 소유의 계열사인 현대상선 관계자는 “단순히 주식 매집을 갖고 그렇게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었다”는 말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 지난 98년 방북길에 함께 나섰던 당시의 정상영 회장 (맨 왼쪽)과 정순영 회장(왼쪽서 세번째). | ||
현대엘리베이터측은 자신의 지분 9.42% 중 7.66%에 해당하는 지분인 43만주를 장외시장에 내다팔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현대엘리베이터측은 그 이유에 대해 우선 가격안정 등 취득목적 달성이 끝났을 뿐 아니라, 우호주주들에게 지분을 양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공시한 내용을 보면 회사 지분 43만주를 장외시장을 통해 주당 2만5천원에 판다는 내용이다. 이 날 장외시장에서 이 회사의 주식 거래 금액만 해도 무려 1백7억5천여만원어치. 같은 날 현대가의 형제들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가 연장자인 고 정주영 회장의 형제들이 나선 것이다. 특히 고 정 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인 정순영 성우그룹 회장과 막내동생 정상영 금강고려화학 명예회장이 적극 발벗고 나섰다.
이날 정순영 성우그룹가에서는 매제인 김영주 명예회장이 이끄는 한국프랜지공업이 12만주, 성우그룹 계열사인 울산화학이 4만주, 정순영 회장의 장남 몽선씨가 대주주인 현대시멘트(주)가 3만주를 사들였다. 또 정상영 금강고려화학가에서는 계열사인 금강종합건설이 8만주를 장외시장에서 매입했다.
다른 현대가 2세들도 나섰다. 고 정몽헌 회장의 바로 손윗형인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이 대주주인 (주)현대백화점H&S와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의 장남인 기선씨가 대주주인 (주)현대지네트가 각각 8만주씩을 사들였다. 다음날도 현대 일가의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사재기는 계속됐다.
하루 뒤인 지난 14일 정상영 회장가의 금강고려화학이 6만4천주, 정순영 회장가 계열사인 울산화학이 2만2천7백70주, 정몽근 회장가의 (주)현대백화점이 3천8백10주씩을 장내에서 사들였다. 그 다음주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18일 울산화학이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4만5천5백50주를, 한국프랜지공업이 3만2천8백10주, 금강종합건설이 3만주를 각각 사들여 현대가 형제들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이로써 지난 22일 현재 최대주주 김문희씨 지분 18.6%를 포함해, 현대 일가는 44%대의 우호지분을 확보하며 외국계 펀드의 위협으로부터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지킬 수 있게 됐다. 더욱이 이같은 주식 매집이 이뤄진 직후 정상영 KCC명예회장이 현대그룹에 대한 ‘섭정’의 의지를 밝혀 주목받고 있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정상영 회장이 이끄는 KCC계열사가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해 갖고 있는 주식이 미미한 수준이어서 경영권을 행사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최대주주와 우호지분들이 경영권 이양을 허락할 경우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현대가의 형제들이 뭉치는 것과 관련해 곱지 않은 시선도 많다. 소액주주 우 아무개씨는 “현대가 계열사들이 마구잡이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매입하는 것은 소액주주들을 무시하는 처사와 다름없다”며 “현대이름의 제품 불매운동을 벌여서라도 이를 막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