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 ||
‘철의 왕국’ 포스코의 최고 수장이던 박태준 명예회장과 유상부 전 회장이 올 들어 여러 차례 공식 석상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만남이 불발로 끝나 해석이 분분하다. 이들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이 미묘한 시선을 던지는 것은 그동안 두 사람을 둘러싼 이런저런 ‘소문’ 때문이다.
박 명예회장은 지난 68년부터 92년까지 24년간 포항제철의 경영을 맡았고, 유 전 회장은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민영화 포스코’를 이끌었다. 이들 두 사람은 ‘철의 왕국’ 포스코의 수장이자, 포스코 창립 당시부터 함께 해온 막역한 사이였다.
YS 시절 김만제 전 회장이 5년간 포스코 경영을 맡은 이후, 유 전 회장이 포스코의 최고 경영자에 오른 데는 박 명예회장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유 전 회장의 재임 시절 항간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물론 그때마다 포스코측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그랬던 두 사람이 모두 포스코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있어 뒷말이 오가는 것이다.
지난 24일 광양제철소에서 열린 ‘중우회’ 모임에 박태준 명예회장은 참석한 반면, 유상부 전 회장은 불참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고 있다. 이날의 모임에 유 전 회장이 불참한 부분을 두고 말이 많은 것은, 이날 행사가 여느때보다 의미가 있는 행사였기 때문이다.
▲ 유상부 전 포스코 회장. | ||
그러나 포스코 관계자에 따르면 ‘중우회’는 단순 친목모임 이상의 기능을 해왔다는 것. 이는 포스코의 퇴직임원뿐 아니라, 현직임원들도 참석하는 모임이어서 포스코의 경영정책 수립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때문에 이 모임은 ‘철의 잔치’로 불린다.
포스코가 민영화되기 전이던 지난 98년, 감사원이 포스코를 특별감사했을 때 계열사인 포스콘이 ‘중우회’에 2억원을 기부한 것이 드러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런 모임이다 보니 포스코의 현직회장을 비롯한 핵심인사들은 빠짐없이 이 모임에 참석하는 게 관례였다.
이날 광양제철소에서 열린 ‘중우회’ 모임은 또다른 행사가 겹쳐 있었다. 박태준 전 회장의 생일파티가 열리기로 돼 있었던 것. 이날의 ‘중우회’ 모임 일정과 박 명예회장의 생일이 우연히 겹쳤는지 사전에 계획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이날 행사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이날 모임의 비중을 말해주듯 김만제 전 회장, 이구택 현 회장 등은 모두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모임장소인 광양제철소의 백운대로 향했다. 백운대는 주요 행사가 열리는 영빈관.
그러나 무슨 이유일까. 포스코 민영화 1기의 회장이었고, 박 명예회장과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던 유상부 전 회장은 이날 광양으로 가지 않았다. 현재 포항공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유 전 회장은 이날 포스코 인근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유 전 회장의 재임 당시 자신의 부하직원이나 선배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에 혼자만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포스코는 이에 대해 “유 전 회장은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이번 모임에는 불참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지병인 허리디스크를 앓아온 유 회장으로서는 이번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광양까지 먼 거리를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 24일 중우회 회원들이 광양제철소 백운대에서 모임에 참석한 박태준 명예회장을 환영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 ||
그러나 업계에서는 유 전 회장이 단순히 이런 이유만으로 ‘중대한 모임’에 불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같은 시선은 단순히 박태준-유상부의 ‘엇갈린 만남’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다.
박 명예회장은 지난 4월 유 전 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나자마자, 4년여 간 발길을 끊었던 광양제철소를 갑자기 방문해 현장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또 유 전 회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포항공대의 각종 행사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피했다.
무엇보다도 업계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던 사건은 지난 7월 초에 있었던 ‘포스코 역사관 개관식’에서의 엇갈린 행보였다. 지난 7월1일 포스코는 용광로 가동 30주년을 기념해 ‘역사관’을 열었다.
이날 박 명예회장은 용광로에서 철이 분출돼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30여 년 전 기억이 난다”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지만, 정작 포스코를 떠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유 전 회장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유 전 회장이 밝힌 이날의 불참 이유 역시 ‘건강’ 때문이었다.
이처럼 올 들어서만 몇 차례 굵직굵직한 행사에서 박 명예회장과 유 전 회장이 엇갈린 행보를 보이자 업계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불편하다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이 아니냐”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사실 두 사람의 불편함은 지난해 세칭 최규선 게이트가 불거졌을 때 유 전 회장이 타이거풀스의 주식을 고가에 매입토록 계열사에 지시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드러났다. 당시 박 명예회장은 “포스코의 망신”이라며 간접적으로 유 전 회장의 경영태도를 비판했다.
박 명예회장의 이 발언을 계기로 중우회 멤버들이 집단으로 나서 유 전 회장의 경영을 비판하면서 내부갈등을 야기하는 등 큰 파문을 몰고오기도 했다. 유 전 회장의 불참과 함께 박 명예회장이 재임하던 시절 핵심 측근이었다가, 나중에 불편한 관계가 된 것으로 알려진 조말수 전 사장도 모임에 불참했다. 결국 이날 모임에는 박 명예회장과 불편한 유 전 회장과 조 전 사장 등 두 사람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직에서도 아니고 이제 모두 옷을 벗은 상황에서까지 이렇게 마주하지 않는 것을 보면 두 사람 사이의 골이 무척 깊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