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규 회장 | ||
현대산업개발은 겉으론 “주식을 매집하고 있는 외국계 펀드가 정체불명이 아닌 투자전문 펀드회사라는 점에서 큰 위협을 느끼지는 않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현대산업개발이 ‘정체불명의 펀드’라는 표현까지 쓰는 이유는 단숨에 SK그룹의 최대주주로 떠올라 국내 재계를 경악시켰던 소버린자산운용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소버린은 지난 2월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이 터진 직후 그룹이 흔들리자 단기간에 핵심회사인 SK주식회사의 주식을 대거 매입하면서 대주주로 떠올라 경영권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 같은 점 때문인지 현대산업개발 내부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여러 차례 경영회의가 열리는 등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현대산업개발 관계자는 “외국계 펀드와 정몽규 회장과의 지분 차이가 1%도 채 되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회사 관계자들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여러 차례 회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현대산업개발이 때아닌 ‘주식 소동’에 휘말린 것은 지난 10월 말. 지난 10월27일 미국계 투자전문회사인 템플턴펀드는 현대산업개발의 주식을 추가로 사들여 지분율이 16%를 넘어섰다고 금감원에 공시하면서 이 문제가 표면화됐다.
공시에서 템플턴은 지난 9월9일부터 10월17일까지 현대산업개발의 주식 92만2천6백40주를 매입, 16.2%의 지분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는 대주주인 정몽규 현대산업개발과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합친 것(17.03%)에 0.83%가 못미치는 수준이다.
현대산업개발이 긴장하는 것은 템플턴이 다른 외국계 펀드와 결탁할 경우 경영권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현재 현대산업개발의 외국계 주주는 템플턴 외에 미국 캐피털그룹(11.04%), 헤르메스연금운용(7.01%) 등. 전체 지분의 3분의 1이 넘는 34.25%가 외국계 펀드에 넘어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템플턴 펀드는 왜 현대산업개발의 주식을 끊임없이 사들이고 있을까.
이에 대해 현대산업개발과 증권가 일각에서는 ‘장기적 투자목적’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템플턴의 경우 장기 투자를 하는 펀드로, 일단 투자를 결정하면 최소 1년 이상씩 주식을 보유한다”고 말했다.
현대산업개발도 “템플턴이 갑자기 우리 회사의 주식을 사들인 것이 아니며 그동안 지속적으로 주식을 사들였기 때문에 적대적 M&A를 위한 것은 아니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다른 시각도 있다. 단순한 투자로만 보기에는 템플턴이 확보한 지분율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 때문이다.
증권가에서는 템플턴의 지분 규모로 볼 때 현대산업개발의 희망처럼 ‘경영권 위협’을 하지 않더라도 ‘경영권 간섭’을 하기에는 충분한 수준이라는 해석이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외국계 펀드의 특성상 경영권을 요구하는 상황까지 벌이는 경우는 드물지만, 배당액 결정, 특정 임직원의 교체, 전문경영인 영입 등 경영활동에 간섭하는 경우는 많다”고 전했다.
템플턴이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상했지만, 현대산업개발은 아직까지 지분확보 경쟁 등 구체적인 맞대응은 하지 않고 있다. 자칫 지분경쟁에 잘못 나섰다간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분확보 경쟁에 나선 사실이 알려질 경우 시장에서 투기세력이 개입하게 되면 천문학적인 주가방어비용이 소요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현대산업개발로선 특별한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당초 정몽규 회장측은 BW(신주인수권부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할 경우 오너 일가의 지분이 30%대를 넘어 경영권을 위험지역에서 벗어날 기대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발행된 이 사채의 매입가격이 지나치게 할인됐다는 시민단체의 문제제기로 사실상 오너 일가는 BW 자체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때문에 정 회장 일가로서는 템플턴이 어떤 공세를 취하더라도 현재로선 대응책이 없는 상황이다. 현대산업개발은 템플턴이 단순 투자이길 희망하면서 눈치만 보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