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KBS ‘한국인의 밥상’
醋(식초), 醢(젓갈), 醬(장), 漬(지). 한국인의 밥상에서 빠질 수 없는 발효음식은 이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 중 하나가 되었다.
불을 사용하지 않고도 음식을 익히는 지혜, 시간이 빚은 곰삭고 깊은 맛을 찾아간다.
날이 더워지는 초여름이면 어머니들은 부뚜막 위에 막걸리를 발효시켰다. 뚜껑으로 솔잎을 꽂아두고 푹푹 찌는 여름이 지나고 나면 완성되던 식초. 초파리가 해충이 아닌 초가 잘 익어간다는 반가운 신호였던 시절이었다.
술을 빚기 가장 좋은 계절인 지금 경남 함양의 원산마을을 찾았다. 산을 굽이굽이 오르다 보면 만나는 오지마을, 이곳에 임채홍(42), 김태연(38) 부부가 산다.
서울에서 한식 요리사던 채홍 씨는 5년 전 어머니의 무릎 수술 이후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왔다. 두 초보 농사꾼은 귀향 후 쌀농사를 지으며 술과 식초를 빚고 있다.
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맘때면 먼저 막걸리를 빚어야 한다는데. 먼저 봄에 딴 진달래와 고두밥, 쌀 누룩을 섞어 발효시켜 ‘진달래주’를 빚는다.
이 술을 걸러 한 달 이상 발효하면 맑은 ‘진달래초’가 되는데 식초는 5년 정도 숙성해야 제맛을 낸다고 한다. 술을 거르고 남은 술지게미는 특별한 재료가 된다.
돼지고기를 재울 때 사용하면 누린내를 잡고 식감도 부드럽게 한다. 또 식초가 발효되면서 생기는 초막도 별미이다. 오래 숙성된 초막은 두꺼워져 묵처럼 되는데 채홍 씨의 어머니는 여름이면 초막을 걷어 간식을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식초 묵을 얇게 채 썰어 진달래초를 탄 물에 말아 먹는 시원한 여름 별미! 새콤달콤 입맛 살리는 한 상을 맛본다.
짭조름하게 절인 젓 하나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고서에 따르면 신라 시대 신문왕이 왕비의 납폐품목 중 젓을 뜻하는 해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니 무려 그 역사가 천 년이 넘는다.
그럼 오늘날에는 어떤 방식으로 젓을 요리하고 저장할까. 하동군에서 유일한 섬마을 ‘대도’ 주민들에게 물었다.
1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어촌마을인 이곳은 농지가 적고 주민 대부분이 어업을 하는 섬마을이라 생선을 다양하게 먹는 방법이 발달했다.
오늘은 섬마을 아낙들이 예부터 시어머니로부터 시할머니로부터 이어 내려온 음식들이 차릴 예정이다.
제철을 맞은 볼락과 멍게는 먼저 소금에 절인다. 뼈까지 삭은 볼락젓은 통째로 썰고 멍게젓은 다져서 고춧가루와 갖은양념에 버무린다. 밥 한 공기도 거뜬하다는 초여름 밥도둑인 셈이다.
젓으로 담그기에 큰 생선은 말려서 먹는다. 생선을 말리면 숙성되면서 식감이 쫀득쫀득해지고 감칠맛이 살아난다. 그뿐이랴 날생선보다 더 다양한 요리에 활용할 수 있어 반찬 걱정도 덜어준다.
아이를 낳았을 때나 제사상에 꼭 올린다는 미역국에도 말린 생선은 필수. 돌미역에 말린 숭어와 말린 바지락을 더해 감칠맛과 깊은 맛을 올린다. 앞바다에서 내어주는 풍성한 먹거리에 선조들의 지혜까지 더한 바다마을 발효음식을 맛본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선조들은 우리 밥상의 기본인 ‘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산청군 차황면에는 된장 담그는 남자, 이른바 ‘된장남’인 문명섭(58) 씨가 산다.
전국을 다니며 장을 배우며 실력을 키웠고 5년 전 귀촌하면서 직접 장을 담그기 시작했다. 아내 김태숙 씨(59)도 발효액을 만들며 남편의 장을 활용한 발효음식을 만든다.
부부가 이렇게 발효음식에 빠지게 된 건 약 30년 전 아내 태숙 씨에게 찾아온 우울증 때문이었다. 당시 약초공부로 시작한 것이 발효액과 장까지 뻗어가게 된 것! 덕분에 지금은 건강을 되찾아 많은 이들에게 전통 장을 알리고 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장독대는 식재료를 저장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쪄서 말린 굴비를 고추장에 박아두면 굴비의 감칠맛은 장으로 나오고 장맛은 굴비에 스며들어 더욱 맛있는 장아찌가 완성된다.
이에 삼겹살을 된장에 숙성했다 쪄 먹으면 특별한 간을 하지 않아도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제철을 맞은 죽순을 오징어와 함께 데쳐 채소와 함께 고추장에 무친 ‘죽순오징어무침’까지 곁들인다.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된장은 우리 민족이 계속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며 계속 장 담그는 일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명섭 씨. 산청 발효 부부의 건강밥상을 만나본다.
푹 삭은 묵은지만큼 추억을 부르는 맛이 있을까. 우리 밥상에서 늘 빠지지 않고 오르는 김치와 장아찌는 한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발효의 선두주자이다. 역사 속에서는 이를 漬(지), 菹(저)라 불렀다.
사계절이 뚜렷해 제철 채소를 오래 먹기 위한 저장 및 발효가 발전했던 한반도. 그 지혜를 찾아 순천으로 떠났다. 순천만이 내려다보이는 별량면의 한 마을 골이 깊은 개울가에 있다 하여 ‘개랭이마을’이라 불린다.
옛날 순천의 진상품이었던 고들빼기의 주산지이기도 한 이곳에서 어머니 삼총사를 만났다. 시집와서 지금껏 함께 이웃해 살며 희로애락을 견뎌왔단다. 오늘은 고들빼기로 푸짐한 한 상을 차릴 참이다.
먼저 간장에 절인 고들빼기 장아찌는 그냥 먹어도 좋지만 물기를 꼭 짜서 다진 후 밀가루 반죽에 섞어 전을 부치면 더 맛있다. 이 ‘장아찌전’은 마을 대표 간식이면서 삼총사가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이라는데.
여기 고들빼기김치도 빠질 수 없다. 주로 생김치로 먹지만, 이 마을에서는 푹 삭혀 묵은지로 먹는다.
쓴맛이 빠지고 부드러워져 다양한 음식에 곁들여 먹기 좋다는데 그중 궁합이 가장 좋은 건 고등어란다. 매콤한 고등어 조림에 고들빼기 묵은지를 넣어 끓이면 비린내도 잡고 감칠맛도 좋다.
처음에는 조금 써도 푹 익히고 삭히다 보면 달달해지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는 어머니 삼총사의 고들빼기 밥상을 만나러 간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