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조선인민군 제586군부대 지휘부를 시찰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5일 이 사진을 보도하며 정확한 날짜와 장소를 밝히지 않았다. 연합뉴스 |
당초 북한은 천안함 사건에 대해 침묵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천안함 사태에 적극 맞서려는 징후가 엿보인다는 게 정보 관계자들의 말이다. 천안함 침몰이 외부 폭발로 결론나면서 사실상 북한 소행 쪽으로 무게 중심이 쏠린 데 따른 반격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군부는 우리 군의 격앙된 분위기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한다. 특히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의 보복 가능성 언급 등에 긴장하는 분위기도 포착된다는 것이다. 김 총장은 지난달 29일 희생 장병 영결식 추도사에서 “국민들에게 큰 고통을 준 세력들이 그 누구든지 우리는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며 “끝까지 찾아내어 더 큰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튿날 김태영 국방장관은 “필요시 무력시위를 할 공군전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등 군 핵심 관계자들이 사실상 북한을 겨냥한 고강도의 발언을 잇달아 내놓아 팽팽한 긴장감을 더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 당국자는 1993년 1차 핵 위기 발생 당시 북한의 대응사례를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북핵 문제와 관련한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압박에 군부 강경파는 “가만히 앉아있다 당하나 한 번 맞받아치고 죽나 마찬가지”라며 같은 해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준전시상태 선포 등 ‘벼랑 끝 대응조치’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 당국자는 “북한 군부는 지금 ‘어차피 미제와 남조선 당국에 의해 천안함 사태가 우리 소행이란 쪽으로 결론 내려질 것’이란 논리로 선제적인 강경대응 주장을 펼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와 군 당국은 지난해 11월 대청해전 때 우리 해군이 북한 고속정을 격퇴시킨 후 보복공격 가능성 때문에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해왔다. 99년 6월 첫 연평해전에서 패한 북한은 절치부심했다. 꼭 1년째 되던 날이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정상회담 날로 잡히자 노골적인 불만의 소리를 낸 것으로 파악되기도 했다. 하지만 3년 만인 2002년 남한 해군의 참수리 357정을 기습공격으로 격침시켜 6명 사망, 18명 부상이란 피해를 입힘으로써 보복에 성공한 셈이 됐다. 온 국민이 월드컵 열기에 빠져 있던 틈을 노린 것이다. 군 안팎에서는 이번 천안함 공격이 지난해 11월 10일 대청해전에서 패퇴하고 물러난 데 대해 앙갚음을 한 것이란 시각이 적지 않다.
보복성 소행임을 시사하는 전언들도 내부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북한 전문 인터넷매체인 데일리NK는 지난달 27일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함북 온성의 한 당원 사상 교육 강연회에서는 “인민군이 원수들(남한 지칭)에게 통쾌한 보복을 안겼다”는 언급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또 “남조선이 우리의 자위적 군사력에 대해 국가적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 당시 북한군의 구체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증언도 있다. 침몰 사고 하루 전인 3월 25일 서해함대사령부와 4군단에 병력을 증강하고,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라는 비밀지시가 있었다는 게 열린북한방송의 지난달 29일자 보도내용이다.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이 매체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 매체를 통해 발표된 이후에 일반 장병들 사이에서는 천안함 격침으로 인해 파장이 커질 경우를 대비해 전투준비태세 지시가 있었던 것 같다는 말이 돌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나서 분위기를 잡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정황도 있다. 대청해전 발생 보름을 넘긴 지난해 11월 27일 북한 언론은 김정일의 해군 587연합부대 방문 사실을 보도했다. 그가 방문한 부대는 바로 해전에서 패한 북한군 서해함대사령부였다. 2002년 2차 연평해전 때도 8개월 만에 이 부대를 찾아 격려하는 등 보복을 부추기는 행보를 한 것이다. 김정일은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는 국방위를 통해 1월 15일 “청와대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보복 성전을 하겠다”는 대남위협 성명을 내도록 했다.
그는 특히 96년 9월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을 총지휘한 김대식 정찰국장의 사촌형으로 알려져 있다. 대남 공작의 피가 흐르는 그를 통해 김 위원장이 새로운 공격전략을 짜는 등 보복의 칼날을 갈아온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천안함 침몰과 황장엽 암살 기도가 모두 정찰총국의 소행이란 관측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오던 특수임무 수행부대의 방문 사실을 공개한 의도에도 당국은 주목하고 있다.
북한 군부 핵심을 대상으로 한 김정일 위원장의 승진인사가 천안함과 관련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정부 당국자와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남북 해군 간 대청해전 이후 대장에서 상장(3성 장군)으로 의문의 강등을 당했던 총참모부 작전국장 김명국은 지난달 25일 대장으로의 복귀가 확인됐다. 또 지난달 14일 군 장성 100명의 승진 인사를 하면서 정명도 해군사령관이 상장에서 대장으로 진급돼 ‘공개 못할 전공을 세운 데 따른 것’이란 관측과 함께 천안함과의 연관성 여부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우리의 합참의장 격인 총참모장에서 일선 군단장으로 ‘좌천’된 김격식의 인사 배경도 뒤늦게 조명을 받고 있다. 그는 김정일 위원장이 “나와 김격식 동무는 격식이 없는 사이”라고 말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그를 황해도와 서해연안을 방어하는 4군단장에 임명하면서 김 위원장이 “강등이 아니라 서해가 중요해 보내는 것이니 잘하고 돌아오라”고 당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의 대남 도발 등 모종의 임무를 준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북한 군부의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당국은 김정일의 군 통제에는 당장 무리가 없다고 진단한다. 노동당 간부와 함께 군부 핵심 인사를 대동하고 공장이나 군부대를 방문하는 등 공개 활동을 활발히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무엇보다 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듬해부터 군부를 모든 것에 우선시한다는 이른바 ‘선군정치’를 주창해 군 핵심부의 지지기반 확보에 상당부분 성공했다. 무더기 진급이나 벤츠 승용차 선물 등을 통해 군의 불만이나 반발을 다독거렸다는 것이다. 당국자는 “최근 일련의 대남 도발은 남북관계나 북한의 대미·대외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라며 “군부나 대남공작 조직의 독단적 결정이라기보다는 김정일의 승인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물론 군부를 비롯한 권력 핵심에 불안요소도 잠재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철저한 통제 장치 속에서도 군부 쿠데타에 버금가는 수준의 반체제 움직임이 벌어진 사례가 있다는 점에서다. 김정일 권력체제가 본격 출범한 95년 4월 함북 청진에 주둔한 6군단에서는 외화벌이 자금을 횡령하고 지휘체계가 문란해지는 문제가 생겨 관련자들이 숙청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군단장인 김영춘은 이 사건을 고발한 공로로 총참모장으로 승진했지만 6군단은 아예 해체되는 큰 파문이 일었다. 앞서 92년 10월에는 소련 프룬제 군사학교 출신 장교들이 체제비판에 나서다 20명이 숙청되고 소련 유학파 300명이 군복을 벗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천안함 사태의 후폭풍이 북한 군부의 동요를 가져올 경우 예상치 못한 사태가 전개될 가능성이 조심스레 제기되는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천안함 국면에서 북한 권력의 향배에는 김정일 건강도 중요한 변수 중 하나일 수 있다. 김 위원장은 2006년 10월 당 간부들을 모아놓고 “동무들, 내가 팔구십까지는 일선에서 활동할 수 있지 않겠소. 난 자신 있어. 자신 있고 말고”라고 말한 것으로 북한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당시 핵 실험 감행으로 한반도에 고조된 위기감 속에서도 김정일은 자신의 통치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인 2008년 8월 중순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해 가을 회복된 후 활발한 활동으로 건재를 과시하려 하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한 구석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건강이상으로 정상적 통치에 문제가 생길 경우 군부의 집단지도체제를 다리 삼아 후계구도를 공고화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초 국방위원회에 매제인 장성택(여동생 김경희의 남편) 당 행정부장을 진입시키고 군과 공안기관 책임자를 포진케 하는 사전작업을 마쳤다.
천안함 사태를 북한 후계자 업적 문제와 연관시켜 보려는 시각도 있다. 북한은 미 정보함 프에블로호가 1968년 1월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된 사건을 미 제국주의를 타격한 대표적 사례로 제시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자리 잡은 후 이 사건을 김정일의 군사적 영도력과 대미항전 의지를 보여준 사례로 찬양했다. 또 이 배를 대동강변에 띄워놓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사상교육의 좋은 소재로 쓰고 있다. 이런 정황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셋째아들 김정은을 선전하는 소재로 천안함을 활용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북한 군부는 김정일 일가에 대한 비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등 충성경쟁 양상도 보이고 있다. 김일성 생일 축하행사의 하나로 지난달 14일 평양 대동강변에서 펼쳐진 불꽃놀이 행사가 대표적 경우다.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 돈 60억 원을 들인 것으로 파악된 이 행사에 대해 “인민들이 먹을 옥수수를 사야 하는 것 아니냐. 북한이 정신 차려야 한다”고 지적한 점에 북한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후계내정자인 김정은이 불꽃놀이를 기획했기 때문에 외부의 비판에 정면반박하고 나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김일성 생일 행사를 기획한 후계자이자 손자인 정은을 공격한 것은 소위 ‘최고 존엄’을 비방한 용납 못할 일이란 인식을 북한 군부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김정일 비판 전단을 뿌려온 탈북단체를 북한 군부가 강력 비난하고 나서는 것도 이를 체제 문제로 보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천안함 사태가 북한 권력 내부에 어떤 충격파를 미칠지는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 북한의 소행이라는 확실한 물증이 제시되지 않을 경우 이를 둘러싼 엄청난 논란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입장이 구체화하고 미국 등 국제사회의 김정일 체제에 대한 압박 파고가 거세지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높다. 증거가 드러날 경우 북한은 국제사회에 탕아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권력 내부의 분란이 생길 공산이 적지 않다. 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당시 김신조가 생포돼 진상이 드러나자 김일성은 “우리 좌경맹동주의자들의 소행이며 미안한 일”이라며 사과했다. 북한 군부가 ‘통쾌한 보복’에 성공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시 ‘맹동주의자’로 전락하는 선택을 한 것인지는 천안함 선체가 어떤 증언을 해줄지에 달려 있다.
김성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