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고교, 대학을 졸업하는 유망주들이 10억 원을 넘나드는 계약금에 혹해 해외 에이전시를 따라 일찌감치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다. 특히 전면드래프트제가 시행된 지난해부터는 미국행을 선택하는 선수가 부쩍 늘었다. 올해만 해도 벌써 상위권에 있던 다섯 명의 고교유망주가 마이너리그, 메이저리그로 떠났다.”
신월 야구장에서 만난 허정욱 스카우트(SK)가 털어 놓은 답답한 심정이다. 이런 답답한 속내는 다른 구단 스카우트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진철 스카우트(LG)는 “요즘 스카우트의 주요 역할은 유망주를 발견해 영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외국 구단에 빼앗기지 않고 국내리그에 남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
스카우트들이 유망주들의 외국진출을 말리는 이유는 비단 좋은 재목을 해외시장에 빼앗겨서만은 아니다. 그렇게 조기 진출한 유망주들 가운데 상당수가 현지 적응에 실패해 일찌감치 선수 생명을 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 스카우트에 따르면 이제 막 고교나 대학을 졸업한 선수가 현지에서 적응에 성공할 가능성은 고작 5% 남짓에 불과하다고 한다. 야구뿐만 아니라 계약을 맺었던 에이전시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경우도 생긴다. 최근에는 선수들 연봉에서 내는 세금을 에이전시가 중간에서 포탈하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스카우트들의 전언이다.
물론 학부모들도 조기 해외진출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비싼 계약금이 욕심나서도 물론 아니다. 졸업을 코앞에 둔 12월까지도 국내 프로리그 진출이 불투명한 데서 오는 불안감이 진로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한 해 고교를 졸업하고 프로리그 진출을 희망하는 선수는 약 800명. 이 가운데 80명 정도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해외진출 성공가능성 5%나 국내리그 진출 가능성 10%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
전면드래프트가 시행되고 나서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드래프트가 열리는 12월 말 한시적인 기간을 제외하고는 프로구단이 선수나 학부모를 접촉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꽉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구단에서는 그해 시즌 성적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수나 학부모에게 영입 여부를 구체화할 수가 없다. 성적이 좋을 경우 시즌 성적의 역순으로 지명권을 갖기 때문에 영입을 약속한 선수를 잡을 차례가 자신들에게까지 오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전면드래프트가 시행되기 전에는 사정이 달랐다. 일찌감치 점 찍어놓은 유망주나 학부모와 2~3년 꾸준히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신뢰를 쌓는 일이 가능했다. 억대의 연봉을 손해 보더라도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구단과 의리를 지키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실제 SK의 김광현 역시 고교 졸업 당시 해외구단에서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냈지만 끝내 4년 동안 인연을 맺어 온 SK과 계약을 했다. 당시 영입을 성사시켰던 허 스카우트는 “어린 시절 광현이의 가능성을 알아본 때부터 야구 장비를 지원하고 경기 때마다 부모님 안부와 건강까지 챙기는 등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쏟았고, 결국 영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일찌감치 프로구단의 지명을 받을 가능성이 있거나 구단의 확실한 영입의사 표현이 가능했던 때는 선수나 학부모 입장에서 진로에 대한 걱정이 훨씬 덜했다. 하지만 이제는 12월 말 드래프트에서 선택받지 못하면 자칫 졸업과 동시에 ‘야구밖에 할 줄 모르지만 정작 야구를 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해외구단 스카우트들이 국내리그에선 제시할 수도 없는 거액의 계약금을 제안하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 목동 야구장에서 만난 한 선수의 학부모는 “자식 하나 제대로 운동시키려면 어지간한 집은 빚까지 져야 하는 게 사실이다. 어떤 구단이 우리 아들을 데려갈지 모르는 답답한 상황에서 큰돈을 주겠다는데 어떻게 해외진출을 마다할 수 있겠느냐”고 털어놨다. 전면드래프트 실행 이후 한국 고교야구계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KBO “또 선수보쌈 하려고?”
현재 스카우트들이 호소하고 있는 전면드래프트제의 폐단에 대해 이전으로 돌아가도 명쾌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 KBO의 입장이다. 1차 지명권을 부활시켜 달라는 것이 스카우트들의 요구이지만 오히려 당시에는 더 큰 폐단이 있었다는 것.
우선 전입신고까지 불사하는 무리한 영입 경쟁의 문제가 있다. 1차 지명의 경우 한 구단이 지역 연고의 선수 중 한 명을 우선 선발할 수 있었다. 스카우트들이 가장 공을 들인 것도 바로 이 1차 지명. 그러나 해마다 지역에 괜찮은 유망주가 있다는 보장은 없다. 만일 당해에 연고 선수 중 지명할 만한 선수가 없을 경우 타 지역 선수를 물색해 부모와 선수에게 돈을 주고 전입신고까지 시키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납치를 감행키도 하고 유급을 시키기도 했다. 박진만의 경우 고려대 진학을 앞두고 한 프로구단의 스카우트가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나오는 박진만을 차에 태워 2박 3일 동안 붙잡아 놓고 회유를 한 사례도 있다. 영화화되기도 한 선동열 납치사건은 야구관계자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반대로 지역 연고팀에 영입할 만한 선수가 두 명일 경우는 한 선수를 유급시켜 다음해에 영입하는 일도 있었다. 프로리그에 진출할 기량이 안 되는 선수의 학부모가 뒷돈을 써서 아들을 프로구단에 입단시킨다는 뒷소문도 무성했다. 또한 프로구단 관계자들이 온갖 편법을 동원해 고등부 유망주들을 싹쓸이 한 것에 분개해 대학팀 스카우트들이 단체로 구단을 찾아가 사무실을 점거하는 소동도 있었다.
아마 지금 프로구단 스카우트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은 어제의 잘못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은 아닌가 싶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