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돌 9단. |
제1국은 이 9단이 흑. 이 9단은 초반부터 전투를 주도하며 절묘한 수순으로 천지대패를 만들어 일대 바꿔치기를 성공시키며 단숨에 승기를 거머쥐었다. 이후 백은 대세력으로 맞섰고 이 9단은 다시 백의 세력권에 단기돌입, 강렬하고도 통렬한 수순으로 장대했던 백세를 휘저어 버리는 것으로 창하오 9단의 항서를 받아냈다.
제2국도 초반부터 전투 모드. 이 9단이 먼저 움직이며 불씨를 던졌고 창하오의 파상공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결정적인 장면에서 창하오가 주춤하자 이세돌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전광석화 같은 이세돌의 업어치기 한판이 작렬했다. 승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창하오는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몇 합을 더 버텼지만, 자멸의 과정이었다.
제3국은 불꽃놀이 한 판이었다. 초반 20여 수까지는 신수 퍼레이드였다.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수들로 한번 붙어보자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수, 기상천외한 수, 의표를 찌르는 수들이 줄지어 폭죽처럼 터졌다. 바둑판은 휘황했고, 관전자는 눈이 부셨다.
신수 퍼레이드가 끝날 무렵 창하오가 이세돌의 귀에서 수를 냈다. 전황을 좌우할 패싸움이 벌어졌다. 검토실은 조심스럽게 “이세돌이 부담스러운 패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 이세돌의 진가가 발휘되었다. 패를 양보하는 것, 귀를 버리고 대신 변과 중앙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 발상의 전환에 검토실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제3국도 후반부는 창하오가 자멸하는 과정이었다.
“창하오 9단이 1국에서 내상을 너무 깊이 입었다. 지더라도 1국에서처럼 지는 것은 이른바 ‘기분 나쁜 패배’다. 유린당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2, 3국에서 창하오 9단이 페이스를 잃고 강약과 완급 조절에 실패하면서 후반에 자멸한 것은 그 후유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한·중 고수들의 관전 총평이었는다. 그렇다면 결국 1국이 분수령이었던 셈이다.
▲ 창하오 9단. |
“어쩌면 창하오 9단은 앞으로 당분간 슬럼프를 겪게 될지도 모르겠다. 구리나 콩지에처럼 한국을 한번 멋지게 이겨 보고 싶었겠지만, 이세돌한테 힘과 수읽기, 배짱에서 모두 밀렸다. 아픔과 자괴감이 클 것”이라는 것이 한·중 고수들의 진단이다.
3국을 두던 날, 이세돌은 대국 시작 10여 분 전에 대국장에 들어왔다. 몇 분 전에 입장하는 것이 보통인데, 꽤 일찍 들어온 것. 들어와서는 고개를 숙이고 바둑판만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 9단의 모습을 보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바둑판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자들의 질문에는 누가 이길지 그걸 누가 알겠느냐고 대답했지만, 저런 자세라면 내심 오늘도 이 9단이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날의 입회인 유건재 8단의 말이다.
“바둑 담당 기자들이 총출동한 것 같았다.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이 9단의 인기가 실감나는 장면이었다. 이 날의 모습만으로는, 지금 이세돌 9단의 인기가 전성기 때의 이창호 9단 인기를 능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세돌 9단의 연승이 과연 어디까지 갈지, 이 9단이 BC카드에 이어 춘란배, 후지쓰배도 차지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이 9단이 과연 무엇을 계속 더 보여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바둑계에선 이번 시리즈에서 이 9단이 보여 준 것을 ‘공격형 타개’로 명명하고 있다.
대마가 쫓길 때에도 일방적으로 달아나거나 수비하는 것이 아니고, 공격하는 상대의 빈틈을 포착해 역공을 하고, 그걸로 단숨에 상대를 제압하는 패턴이라는 것이다. 이번 시리즈를 보면서 전설의 복서 슈거레이 레너드를 떠올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세돌의 펀치가 느닷없이, 어디서 날아올지, 이세돌의 상대는 도저히 예상을 못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이세돌이 쉬는 동안 이세돌의 바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류’를 완성하는 작업에 들어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이세돌 류’가 어떤 모습으로 만개할지, 미증유의 어떤 바둑의 그림을 완성할지 자못 흥분된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