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포수 최초로 300홈런을 달성한 박경완. SK의 16연승이 깨지자 징크스인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마침내 16연승이 깨졌다. 연승이라는 게 선수한테는 자극도 되고 부담도 될 것 같다.
▲선수라면 계속 이기고 싶죠. 연승에 대한 부담보다는 오히려 연승할 때 더 많이 집중하는 것 같아요. 어제 경기는 여러 가지로 아쉬워요. 한 게임 졌다고 해서 처져 있을 건 아니지만 팀 에이스 김광현이 나가서 진 거라 후유증이 좀 남네요.
―SK는 유독 연승과 인연이 깊다. 지난 시즌 19연승으로 정규리그를 마감하고 다시 올 시즌 그 기록을 그대로 이어받아 시즌 초 22연승까지 갔었다.
▲지난해 우리 팀이 19연승을 기록할 때는 제가 야구장에 없었지만 22연승 때는 포수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었어요. 솔직히 그때 굉장히 부담스러웠습니다. ‘개막전부터 연승이 깨지면 어쩌나, 내가 다시 들어와서 연승이 이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였죠. 선수 생활하면서 이런 연승을 맛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연승 행진을 벌일 때면 가급적 그 숫자를 늘리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소속팀 선수 입장에서 SK가 ‘지지 않는 해’로 변모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 팀은 누구 한 선수만을 위해 돌아가는 팀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특별나게 잘하는 뭔가가 있지도 않아요. 감독님, 코치님들을 비롯해서 선수들 모두 똘똘 뭉쳐있는 조직력이 연승으로 가는 원동력이라고 봐요. 이젠 그 연승이 깨졌지만 얼마 안 있다 또 다시 그 기록 레이스를 펼칠 수 있을 겁니다.
―무려 313일 만에 300홈런을 쏘아 돌렸다. 지난 시즌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수술과 재활 끝에 9개월 만에 야구장에 선 사람이 한국 포수 최초로 300홈런을 터트렸다. 정말 다친 사람 맞나?
▲(웃으면서) 지금도 몸이 성한 데가 없어요. 크고 작은 부상들이 이어진 탓에 꽤 힘든 생활을 하고 있지만 팀이 이기면 아픈 데가 씻은 듯이 나아요. 전 지난해 300홈런을 칠 줄 알았어요. 작년에 페이스가 워낙 좋았고 컨디션도 최상이었기 때문에 작년에 기록이 나올 거라 믿었죠. 예상치 못한 부상으로 시즌을 넘기고 말았는데 다른 선수들이 스프링캠프를 50~60일 갔다면 전 100일을 일본에 머물렀습니다. 재활 훈련을 위해 다른 선수들보다 일찍 캠프를 시작했는데 운동량은 턱없이 부족했어요. 수술한 부위가 아팠다 안 아팠다를 반복하니까 기술훈련하는 걸 욕심낼 수도 없더라고요. 막상 귀국 후 팀 훈련에 합류해 보니까 100일간 훈련했던 게 아무 쓸모없게 된 듯했어요. 타격 폼부터 수비까지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었죠. 굉장히 허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막전부터 선발 출장했다. 김성근 감독은 시범경기 동안 개막전은 박경완보단 정상호가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는데….
―300개 홈런들마다 다양한 사연들이 있겠지만 300번째 친 홈런만큼 그 의미가 깊진 않을 것 같다.
▲끝내기 홈런도 쳐봤고 4게임 연속 홈런도 때렸지만 이번 홈런처럼 가슴 뭉클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공을 때리면서도 홈런이 될 거란 생각을 못했거든요. 공이 넘어가는 걸 보면서 1루 베이스를 밟는데 순간 머리가 띵 해지는 게 뭐가 막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와, 내가 왜 이러지?’ 싶더라고요.
―베이스를 도는 박경완 선수의 얼굴 표정이 너무 무덤덤해서 보는 사람은 재미없었다(웃음).
▲속으론 정말 좋았어요. 울컥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무리 300홈런을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사람이다보니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빨리 쳤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고요. 막상 해내니까 지난 시즌 수술받고 힘들었던 순간도 떠오르고 오키나와 캠프에서 절치부심하며 재활과 전쟁을 벌였던 생활도 기억나고, ‘박경완, 참 잘 버텨왔다’는 생각도 들고…(웃음).
―아킬레스건 수술까지 받고 9개월 재활 기간 동안 온갖 잡념들이 끊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냥 선수생활을 멈추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텐데.
▲운동을 그만둔다는 생각보단 내가 과연 다시 잘할 수 있을까 싶었죠. 그동안 별의별 부상도 다 당해봤잖아요. 무릎이 퉁퉁 부은 상태로 경기에 나간 적도 있었고, 상대 투수의 공에 하도 얻어맞아 온몸이 멍투성이인 적도 많았어요. 그렇게 악착같이 버티고 훈련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또다시 부상으로 그만둔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더라고요. 제가 1군에서 뛰는 포수들 중에는 가장 나이가 많아요. 욕심 같지만 전 후배들에게 나이 많은 포수도 선수 생활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부상에 굴복해서 바람처럼 사라지는 선수가 아닌 극복해서 이겨내는 선수가 되고픈 거죠. 그런데 몸이 정말 안 좋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워요. 그럴 땐 또 저만의 방법으로 끌고 갑니다. 제 몸과 마음을.
―SK는 김재현, 박재홍 등 베테랑 선수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후배들과 견주어 절대 밀리지 않는 포스도 있고 결정적일 때 한 방씩 터트려 주고, 그런 부분들이 큰 힘이 되지 않나.
▲어렸을 때 선배들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었어요. ‘너희들도 나이 들어봐라’하는 말이요. 그땐 무슨 말인 줄 몰랐는데 제가 정말 나이 들어보니까 그 선배들의 심정을 알겠더라고요. 나이가 많다는 건 뒤따르는 책임감이 커진다는 걸 의미해요. 우리 팀에 절 포함해서 재현이 재홍이, 그리고 (가)득염이 형, 4명 정도가 고참급에 속해요. 시즌 전 4명이 모여서 주장인 재현이한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솔선수범해서 더 열심히 해 보자고 약속했었어요.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야구까지 못해 봐요. 후배들도, 선배들도 골고루 잘해야 좋은 팀이 되는 것 같아요.
▲ 연합뉴스 |
▲다른 팀에서 SK로 트레이드된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SK가 왜 성적을 낼 수밖에 없는지 알겠다”라고요. 말 그대로 선수들 대부분이 밥만 먹고 운동만 해요. 훈련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예요. 훈련량이 많다 보니 경기에 나가는 선수들한테 자신감이 느껴져요. 더욱이 고참들은 팀을 끌어가는 방법을 알고 후배들은 선배를 따라가는 방법을 알아요. 제가 가끔 노파심에 김광현이나 정근우한테 이렇게 말해요. ‘야구 좀 한다고 거만해지면 절대 안 된다. 부상당해서 뛰지 못하면 제 아무리 김광현이라고 해도 사람들한테 잊힌 존재로 전락한다. 정말 냉정한 곳이 야구의 세계다’라고요. 어제 16연승 행진이 멈춰 섰잖아요. 사람들은 겨우 한 번 진 것 같고 뭐 신경 쓰냐고 말하지만 감독님은 이긴 건 이미 과거의 일이고 현재 진 게 더 마음 아프신 분이에요. 한마디로 성에 안 차신다는 거죠. 저도 감독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지고 나니까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지난 시즌 SK가 KIA에 우승컵을 내주는 걸 경기장 밖에서 지켜봐야 했다. 어떤 심경이었나.
▲억울해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집에서 경기를 지켜보다가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어요. 어디 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어요. 작년에 못 이룬 우승을 올해 꼭 이루고 싶어요.
―만약 SK가 한국시리즈에 올라간다면 어느 팀과 맞붙고 싶나.
▲당연히 KIA죠. KIA랑 다시 한 번 제대로 붙고 싶어요.
박경완은 야구에 대한 사랑과 의지, 도전 정신이 활활 불타오르는 선수였다. 김성근 감독이야말로 자신의 롤모델이자 닮고 싶은 지도자라는 표현도 아끼지 않았다. ‘지독함’이란 단어로 두 사람이 연결돼 있는 듯했다.
고졸 출신 포수로 대졸 출신 투수들과 기싸움을 벌인 일화를 소개하며 정민태, 김수경, 위재영, 정명원 등은 처음엔 서걱거리는 사이였지만 1년 만에 포수의 리드를 따르는 조화로움을 나타냈다고 회상했다. 박경완 이전, 최고의 포수를 꼽아달라는 주문에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래도 (김)동수 형이 아닐까 싶어요. 게임수도 엄청나고 상대한 투수들도 많고요. 2000게임 이상 뛴 포수가 동수 형밖에 없잖아요. 정말 대단한 선배이셨어요.”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