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호, 콩지 |
10번기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지난해 봄이었다.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동안 또 상황은 변했고, 얘기의 내용도 조금은 바뀌었다. 10번기는 두 사람이 바둑 열 판을 둔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고유명사이고, 원형은 그냥 10번기가 아니라 ‘치수고치기 10번기’인 것.
이세돌-구리의 10번기에도 처음부터 치수고치기라는 말이 붙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그냥 10번기라고 했어도 바둑팬들은 치수고치기 10번기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치수고치기라는 전제가 없이 10번기라는 말이 사용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발표를 보면 치수고치기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지 않다. 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같지만 희미하다. 이해가 된다. 10번기는, 도중에라도 한 사람이 4승, 5승1패, 6승2패 하는 식으로 네 판을 먼저 이기면 치수를 고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실제로 두 사람 전적이 4승 차이가 났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이냐 이거다. 치수를 고쳐서 한 사람이 정선으로 두게 할 것이냐 말이다.
또 설령 치수를 고친다 한들 그게 요즘 세상에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 이거다. 바둑대회가 그것밖에 없다면 모르지만, 세계대회가 하나둘이 아닌데, 10번기에서 치수가 고쳐진 후에도 다른 대회에서 만나면 어쩔 것인가. 거기서도 고쳐진 치수를 적용할 것인지. 다른 대회에서 만나 호선으로 두어 얼마든지 이길 수도 있는 것이니 ‘고쳐진 치수’는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는 것 아닌가. 일회성 이벤트가 무슨 큰 의미가 있을지. 순간의 흥미는 있겠지만.
옛날에는 치수고치기는 기사의 모든 게 걸린, 살 떨리는 승부였다. 요즘은 아니다. 그런 승부가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파괴력이 없고, 흥행성도 떨어진다. 위험부담이 따르지 않는 것이라면 3번기나 5번기나 10번기나 크게 다를 게 없다. 5번기나 3번기의 단순 확장일 뿐이며 5번기나 3번기는 지금도 많이 있다.
구리가 지금 중국 일인자냐 하는 것도 그렇다. 요즘은 콩지에 9단이 더 잘 나가고 있으니까. 6억 원의 상금을 둘이 나누어 갖는 것을 가리켜 ‘세기의 대결’ 운운 하는 것도 실감이 덜하다. ‘세기의 대결’이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적어도 한 사람당 10억 이상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바둑팬들의 지적이 날카롭다. “치수고치기는 약발이 떨어진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한데, 그런 걸 새삼 들고 나올 것이 아니라, 예컨대 ‘세계최강자’ 같은 타이틀로 상금을 한 20억 걸고, 이창호 이세돌 구리 콩지에, 이렇게 네 사람을 초청해 더블리그 같은 걸 벌이는 것이 훨씬 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을 것”이라는 의견에 공감한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중국 편향에서 좀 벗어날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력은 우리가 낫다고 하면서도 ‘바둑계 일’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중국에 끌려 다니는 느낌이다. 세계대회를 주최할 때도 중국을 의식하는 모습이고, 기회만 있으면 바둑을 두는 것도 중국에서 두려고 한다. 중국에 쏟는 관심, 중국에 대한 투자의 절반 정도는 방향을 바꿀 때가 되었다. 바둑의 세계화, 세계 바둑계의 주도권 다툼에서 중국은 우리의 경쟁자다. 우리가 중국에 바둑을 보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중국에 대한 관심과 투자의 일정 부분을 서구로 돌려야 한다. 동남아나 중동이나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미개척지도 얼마든지 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경기에 루이나이웨이 9단이 중국 대표로 뽑혔다고 한다. 중국이 대표 선발전에 루이의 참가를 허락한 것이다. 루이 부부는 중국에서 활동할 수가 없어 미국 일본 등지를 유랑하다가 한국에서 자리를 잡았던 것인데,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중국 대표의 옷을 입고 한국 공격의 선봉이 되는 거다. 루이가 우리 여류 프로의 실력 향상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걸 부인하지 않고, 그와 동시에 우리 젊은 여성 기사들이 아직도 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에 동감하면서도 이런 일들도 결국은 무개념적 중국 편향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개운치는 않다. 조치훈을 예로 들면서, 혹은 박지성 같은 스포츠 선수를 예로 들면서 루이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리도 있지만, 조치훈이나 박지성과 루이는 경우가 다르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