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6일 에콰도르와 친선전에서 곽태휘가 필사적으로 수비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한국이 16강에 오를 수 있을까. 일단 긍정적인 측면은 많다. 막강한 미드필더진이 힘이다. 축구는 미드필더 싸움에서 승부가 갈린다. 미드필더진이 강하면 공격에서는 더 많은 찬스를 만들어낸다. 박지성(맨유), 이청용(볼턴), 기성용(셀틱), 김정우(광주), 김남일(톰 톰스크) 등 미드필더진은 기량도 수준급인 데다 해외리그 경험, 국가대표 국제대회 출전 경력 등 경험에서도 역대 최고 멤버다.
전체 멤버에서는 유럽파의 존재가 중요하다. 해외에서 외국 선수들과 싸우면서 축적해온 경험이 무기다. 유럽파는 주눅 들지 않고 외국 선수와 싸울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 과거 월드컵에는 모두 떨었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회택 감독은 트레이닝복을 거꾸로 입은 줄도 몰랐다. 황선홍 부산 감독도 “유럽선수라고 하면 무조건 우리보다 나은 것으로 여겨 경기 시작 전부터 우리는 기가 죽었다”고 토로했다. 그 때는 우리가 유럽축구, 유럽선수를 접할 기회가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직접 그곳에서 뛸 수도 있고 TV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할 수도 있다. 무지는 불안을 초래하지만 경험은 안정을 낳는다.
외국 언론은 조 최하위 예상
유럽파 중심은 역시 박지성이다. 에인트호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8년 동안 뛰었다. 이런 박지성이 월드컵에서 상대를 제압한다면 다른 동료들의 자신감을 찾으면서 전력이 동반 상승된다.
허정무 감독이 최근 소집훈련에서 휴식카드를 빼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과거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대표팀은 훈련, 긴장만 강조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과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 때는 휴식을 적절하게 지시했다. 잘 쉬어야만 잘 뛸 수 있다, 쉬는 것도 전략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조치다. 허 감독도 그랬다. 지난 2월 동아시아대회 중국에게 사상 처음으로 패한 뒤 하루 휴식을 줘 일본전 3-1 완승을 이끌었다. 최근 파주 소집훈련에서도 두 차례 외박 또는 휴가, 한 차례 외출을 지시했다.
한국이 처음으로 싸울 그리스가 해볼 만한 상대라는 점도 긍정적이다. 물론 국제축구연맹 랭킹에서는 한국(47위)이 그리스(13위)에 밀리지만 중요한 것은 플레이 스타일이다. 그리스는 선 수비 후 역습을 하는 팀이다. 그리고 선취골을 넣으면 곧바로 문을 잠근다. 두 팀 모두 목표는 16강. 서로 제물로 여기고 있는 1차전은 1골 싸움이다. 그래서 전력우열 여부를 떠나 해볼 만한 상대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를 꺾는다면 16강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 같다.
▲ 박지성, 이청용, 기성용.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만일 유럽파가 부진하다면 문제는 더 커진다. 외신들은 한국의 최대 약점을 두개로 꼽는다. 하나는 수비불안이고 남은 하나는 주전과 비주전간 실력차다. 유럽파가 컨디션 난조, 부상, 퇴장 등으로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할 경우 이들 만큼 활약해줄 국내파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염기훈(울산), 김재성(포항), 이동국(전북)이 박지성, 이청용, 박주영(AS모나코)만큼 해주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다.
조별리그 2차전은 아르헨티나전이다. 아르헨티나는 FIFA 랭킹 7위에 오른 강호다. 리오넬 메시, 카를로스 테베스, 곤살로 이과인 등 세계 정상급 공격수들이 즐비하다. 한국은 비기면 대성공, 한 골차로 져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전이 힘든 이유는 따로 있다. 경기장이 고지라는 점이다. 아르헨티나와 싸울 곳은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스타디움으로 해발 1753m에 있다. 물론 아르헨티나도 고지에서 치르는 남미예선에서는 패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르헨티나는 고지에서 적응훈련을 하다가 1차전 나이지리아전, 2차전 한국전을 모두 요하네스버그에서 치른다.
같은 도시에서 두 경기를 치르기 때문에 이동이 필요 없다. 고지에 적응할 충분한 시간도 있다. 반면 한국은 평지에서 그리스와 싸운 뒤 고지로 올라가야 한다. 한국이 아르헨티나같이 개인기가 좋은 팀과 싸울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강한 압박이다. 그리고 강한 압박은 강철체력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한국이 반 게임 정도는 몰라도 90분 내내 아르헨티나를 강하게 옥죄기는 힘들다.
물론 한국이 그리스를 꺾는다면 아르헨티나전을 ‘지혜롭게’ 치른 뒤 나이지리아전에 올인한다는 전략을 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에게 패한다면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전에 모든 걸 걸고 싸워야한다.
허정무 감독 “유쾌한 도전”
허정무 감독은 이번 월드컵 16강 도전을 “유쾌한 도전”이라고 표현했다. 16강 진출 여부를 떠나 후회 없이 즐겁고 당차게 싸워보겠다는 뜻이다. 반면 이영표(알힐랄)은 최근 인터뷰에서 “한국이 16강에 오를 가능성은 40%”라고 했다. 두 발언 모두 한국은 약체라는 걸 전제로 깔고 있다. 그런데 약체라면 잃을 것도 없다. 과거에는 월드컵을 치르면 실수도 많았고 후회도 남았다. 하지만 2002년, 2006년 등 최근 월드컵에서는 실수는 줄었고 후회는 없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후회 없이, 부담감 없이, 주눅 들지 않고 상대와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 자체가 16강 진출 여부를 떠나 한국축구가 얻은 가장 귀중한 소득인지 모른다.
김세훈 경향신문 체육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