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서재응(33). 어느새 서른하고도 세 살이 더 붙었다. 늘어난 나이만큼 여유도 생기고 한국야구를 대하는 자세도 많이 편해 보였다. 여전히 그한테는 ‘응원단장’이란 수식어가 붙지만 야구를 못할 때는 그 ‘응원단장’이 비난을 대신하는 표현이라면, 야구 잘할 때는 그 수식어가 그의 가치를 드높이는 표현도 된다.
지난 5월 말, 비로 인해 게임이 취소된 어느 날, 생각지 못한 ‘휴식’을 얻은 서재응과 함께 광주에서 떡갈비로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아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식당을 찾은 많은 손님들이 서재응을 알아봤지만 그는 씩씩하게 갈비를 뜯고 있었고, 인사를 건네는 손님들에게 정중히 답례를 하는 등 ‘나이스 가이’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줬다. 식사 후 광주 시내의 한 카페에서 서재응과 모처럼 여유 있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재응은 지난 5월 20일 군산에서 벌어진 롯데전에 선발 등판했다가 4회에 2사2루서 강민호와 조성환을 거르고 박종윤과의 승부를 택했다가 박종윤에게 2타점 2루타를 맞아 역전을 허용한 바 있었다. 그 당시 각종 야구 게시판에는 ‘왜 서재응이 조성환을 상대하지 않고 박종윤에게 승부를 걸었느냐’며 비난이 들끓었다. 그 게임 이후 서재응을 만났던 탓에 그 얘기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 상황에서 만루를 만들었는지 나도 궁금하다. 그만큼 박종윤 선수한테 자신이 있었다는 소린가.
▲(조)성환이 형이 나한테 워낙 강했고, 그날따라 왼손 타자들한테 잘 먹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름대로 4회가 승부처였다고 봤는데 결과적으로는 제가 판단을 잘못한 셈이 됐죠. 이강철 코치님 말씀대로 성환이 형을 거를 때 어렵게 승부해서 포볼로 내보냈다면 다음 타자의 마음가짐이 달랐을 텐데 제 작전을 너무 노출했던 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평소 서재응은 롯데만 만나면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얘기가 나오는 건가.
▲롯데라기보단 성환이 형한테 약한 편이죠. 롯데와 지금까지 아마 여섯 번 정도 상대해봤을 거예요. 1승은 있었지만 처음으로 롯데와 맞붙었을 때를 잊지 못해요. 한국 복귀 후 얼마 안 돼서 였어요. 부산으로 내려가 롯데를 만났는데 주심이 유독 스트라이크를 안 잡아주더라고요. 5이닝 동안 4점 주고 내려왔어요. 그날따라 유난히 심판 판정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주심한테 강하게 어필했던 것 같아요.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셈이죠. 그때부터 롯데에 계속 말리기 시작하더라고요.
―그 게임 이후 계속 롯데와의 경기에 대해 부담을 갖게 되었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게요, 첫 인상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2006년 WBC 때 일본에서 대표팀과 롯데와 연습 게임이 있었어요. 그런데 롯데가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때가 2월 말이었는데도 투수가 145km가 넘는 공을 던지더라고요. 오히려 대표팀 타자들이 겁을 낼 정도였어요. 그때 롯데가 정말 강팀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고 그 인상이 제가 한국 복귀 후 롯데와 첫 게임을 치르는 데 크게 작용을 했던 거죠. 반면에 SK는 유난히 상대하기가 편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왼손 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요즘은 라인업에 왼손 타자들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2008년만 해도 4~5명 정도가 왼손 타자들이었거든요.
―그렇다면 지금도 가장 상대하기 힘든 팀은 여전히 롯데인가?
▲그렇죠. 그 이미지 때문에…. 그런데 피하고 싶진 않아요. 빨리 좋은 승부를 벌여서 그 첫 이미지를 바꿔 놓고 싶거든요. 롯데와 상대해서 딱 1승을 올린 적은 있었어요. 하지만 광주 홈게임에서 4실점을 했는데도 타선의 도움으로 승을 챙겼어요. 그래서 제대로 된, 제가 정말 잘 던져서 승리를 거두는 경기를 꼭 해보고 싶어요.
▲그 당시 어깨가 너무 아파서 안 아픈 쪽으로 던지려다 보니까 팔꿈치까지 통증이 내려왔어요. 괌으로 전지훈련을 떠났지만 팔꿈치가 너무 아파서 캐치볼조차 못할 정도였거든요. 일본으로 다시 떠나기 전 한국에서 주사를 맞고 일본 캠프에 합류했는데 몸이 괌에서와는 180도 달라지더라고요. 어깨도 안 아프고 팔꿈치 통증도 사라졌고요. 지금도 저를 괴롭히던 통증들이 어떻게 말끔히 사라졌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때 이강철 코치님과 폼에 대해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그러다 팔을 약간 내려서 공을 던지는데 제 몸에 맞는 폼 같더라고요. 결국 팔 스윙의 각도를 낮추는 대신 하체를 이용하는 투구 폼으로 변신을 했고, 그 전에 상체에 쏠렸던 힘을 하체에 실으니까 어깨나 팔꿈치에 무리가 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한국으로 복귀 후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무엇이었나.
▲‘밥값’을 못한다는 자책감이었죠. 그런데 사람은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봐요. 만약 제가 미국에서 십 몇 년 동안 몸에 배었던 폼을 버리지 않고 고집을 피웠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제 자신을 버리고 현실을 인정했던 게 올 시즌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후배들 중에서 가장 부러운 상대가 있다면 누구인가?
▲(윤)석민이랑 (양)현종이죠. 석민이가 지금 스물다섯 살인데, 제가 스물다섯 살일 때를 떠올려봐요. 제가 그 나이 때는 막 수술하고 다시 컴백할 당시라 스피드를 잃어버릴 때였거든요. 석민이처럼 던질 수가 없었죠. 현종이도 마찬가지고요. 두 선수들 정말 공 잘 던져요. 나이도 부럽고, 공도 부럽고, 어휴 부러운 것만 많네. 하하
―‘응원단장’ 등 팀에서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자처하는데 자제할 생각은 안 해봤나.
▲제 성격이에요. 팀 경기를 가만히 앉아서 못 보는 편이에요. 그런 모습이 건방지거나 팀 분위기를 해치거나 그렇진 않잖아요. 종종 마운드에서 보여지는 제 모습에 대해 이런 저런 평가를 하거나 선입견을 갖는 분들이 있어요. 그 분들은 절 잘 모르시잖아요. 직접 만나서 얘기해본 적도 없을 것이고요. 그래서 별로 개의치 않으려고 해요. 절 맘에 안 들어하는 부분까지 뭐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올해도 KIA가 지난 시즌처럼 우승까지 갈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런데 김상현 선수의 공백 등 예상치 못한 일들로 불안한 마음도 있을 것 같은데….
▲다른 팀 선수들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KIA는 굴곡이 좀 있어도 결국엔 4강까지 갈 거라고. 그런 시각을 갖는 건 우리 팀에 뭔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요? 5월 초까지 유독 방망이가 안 맞았어요. 그러다 조금씩 살아나고 있어요. 우리 팀은 원래 여름에 강한 팀이었잖아요. 날씨가 더워지면 땀 흘리면서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선수들의 승부욕이 굉장히 강해요. 아마도 6월 후반부터는 치고 나가지 않겠어요?
―KIA 타이거즈만의 응집력의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선후배 간의 체계가 확실하죠. 선배는 이끌어주고 챙겨주고 밀어주고, 후배는 그런 선배를 따르고요. 선배님들이 팀 성적이 꼬일 때는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하세요. 회식을 통해 술 한 잔 하면서 단합대회도 하고요. 선수들 간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선배님들이 잘 알고 계세요. 그런 점에서 이종범, 이대진 선배님들과 주장인 (김)상훈이의 역할이 굉장히 크죠. 미국에는 이런 팀 문화가 없었거든요. 게임이 시작하면 패밀리가 되지만 게임이 끝나면 개인이 돼 버려요.
▲최근에 뉴욕 메츠 경기를 봤어요. 야구장을 새로 지었더라고요. 야, 나도 저기에 서보고 싶다. 계속 있었더라면 저 마운드에 서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죠.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도전하고 싶어요. 미국에…. 이전에 미국에서 이루지 못했던 것을 꼭 다시 이루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가능하진 않죠. 지금 제 나이가 서른세 살이니까. 가능하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 지금 제 구질로 미국에 가면 통할 거란 생각은 들어요.
―이상하게 미국에서 야구를 하다 들어온 투수들이 공통적으로 ‘지금처럼 공을 던진다면 다시 미국에 가서 도전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한다.
▲미국 야구는 빠른 볼로 무조건 질러 대거든요. 유인구가 없어요. 전 포볼이 없는 투수였어요. 그런데 한국은 그렇지 않잖아요. 일본 투수들이 미국에 가서 성공하는 이유가 유인구를 던질 줄 알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야구를 해보니까 ‘왜 난 그동안 유인구 던지는 법을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정작 한국에서 적응하기가 힘들었던 점도 있었고요.
―마지막으로 정말 상대하고 싶지 않은 타자가 있다면 누구인가.
▲두산의 (김)현수는 컨택 능력이 너무 좋아서 무서워요. 어느 폼에서 어떤 타격이 나올지 알 수가 없으니까. 삼성 (채)태인이는 노림수가 좋아요. 그리고 (조)성환이 형은 제 볼을 정말 쉽게 쳐요. 타이밍이 그냥 딱 맞나봐요. 히어로즈 장기영이 나오면 이상하게 볼이 한가운데로 가요(웃음). 그냥 자석처럼 가운데로 쏠리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서재응은 지난 3일 오른 어깨 피로와 팔꿈치 통증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지난해에 비해 많은 이닝수를 소화해 피로가 쌓인 것으로 보고 서재응에게 휴식을 주려는 코칭스태프의 배려 차원이다. 그래도 서재응의 목소리는 씩씩했다. 기사를 보고 걱정이 된 기자의 전화에 “암시롱도 안 해요. 조금 쉬었다 올라가면 좋아질 거예요. 이참에 응원이나 열심히 하죠 뭐”하며 호탕하게 웃어 제친다. 겉으론 그의 말대로 ‘암시롱’도 안 한 척하지만 속은 또 다를 것이다. 그 누구보다 KIA 타이거즈의 2연패를 원하고 있고, 이번에는 지난해처럼 이방인이 아닌 팀의 중심 선수로 팀 승리를 이끌어가고 싶어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영미 기자 광주=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