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 삼성 염기훈(위) 선수와 부모 염영애, 정정숙 씨와 두 살 배기 조카.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논산의 아들 염기훈
‘왼발의 달인’ 염기훈이 어린 시절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웠던 곳. 논산시 은진면 성덕리에 들어서자 드넓은 논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잠깐 기다려요. 내 나갈게.” 길목까지 자전거로 마중 나온 염기훈의 아버지 염영애 씨. 기자가 멀리서 한눈에 알아보고 인사를 하자 “진짜 닮았죠? 사람들이 기훈이 20년 후 모습을 보는 것 같데요”라며 얼굴 가득 미소를 보였다.
염기훈이 축구공을 차기 시작한 건 돌이 지났을 무렵부터라고 한다. 말랑말랑한 축구공 외의 다른 장난감엔 눈도 돌리지 않았단다. 지금은 ‘왼발의 달인’으로 불리지만 어릴 적 그는 오른발잡이였다. 6세 때 달리는 자전거 바퀴에 오른발이 감겨 수술대에 오른 적이 있었다. 엄지발가락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심한 상처였다. 오른발을 다쳐 절룩거리는 상황에서도 왼발로 공을 차기 시작했다. 지금도 염기훈의 오른발 엄지발가락 발톱은 거의 자라지 않는다고. 대한민국 ‘왼발 스페셜리스트’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건 앞집 형 김기선 씨 영향이 컸다. 김 씨는 2007년 출범한 U-16 여자청소년대표팀 코치를 역임하고 불모지였던 강원 화천 정보산업고를 여자축구의 메카로 끌어올린 실력자. 어린 시절 염기훈의 눈에 비친 15년 터울의 김 씨는 그의 우상이었다. 그 영향일까.
축구를 향한 염기훈의 열정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근대2종(1000m달리기, 100m 수영) 특기생으로 논산중학교에 입학한 염기훈은 ‘축구 시켜주지 않으면 공부 안하겠다’고 시위하며 한동안 빈 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의 소질을 발견한 축구부 감독도 근대2종 감독과의 사투 끝에 염기훈을 축구부로 데려올 수 있었다. 염 씨는 “논산중학교에 축구부 인원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처음엔 머릿수 채우기 위해 기훈이를 데려가는 것 아닐까 걱정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나중에 크게 될 아이다’고 호언장담해 맡기기로 했다”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논산중-강경상고에서 어린 나이에 눈에 띄는 실력으로 주전 자리를 꿰차자 주위의 시샘이 말도 못했다. 한번은 합숙 후 주말에 집에 돌아온 염기훈이 하루 종일 방에 엎드려 지낸 적이 있었다. 가족들에게 자기 몸을 건드리지 말라고 선전포고까지 했다. 알고 보니 다리 전체가 시퍼렇게 멍들어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고. 어머니 정정숙 씨는 “축구 못하게 할까봐 축구부에서 힘들었던 얘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못살게 굴었단 사실을 알고 마음이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누나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염기훈의 ‘제2의 어머니 역할’을 해왔다. 가정 형편상 남매 둘 중 한 명이 대학교를 중도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누나는 학교 내 온갖 궂은일을 떠맡으며 학비를 충당했고 호남대학교에 다니던 동생이 프로에 들어가기 전까지 필요한 용돈을 지원했다. 정 씨는 “기훈이가 프로팀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기훈이의 축구 인생의 숨은 공신은 바로 누나”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험한 시련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까. 2006년 전북 현대 모터스에 입단하던 날 염기훈은 처음으로 가족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다른 선수들이 구장에 나오기 30분 전에 미리 연습을 시작하는 성실함, 축구를 사랑하는 그의 열정은 허정무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염 씨는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기훈이가 새벽에 운동이 잘된다더라. 기훈이가 새벽에 구장에 나가서 연습할 때마다 허 감독을 만나게 된다고 했다”면서 염기훈이 최종 엔트리에 들게 된 비결을 ‘성실함’으로 꼽았다. 한창 인터뷰를 하던 중 염 씨가 전화를 받았다. 염기훈이었다. 부끄러운 듯 밖으로 나가 아들과 한참 통화를 하고 들어온 그는 “아픈 데 없이 컨디션도 좋단다”면서 안부를 전했다. “다치지 말고 최선을 다하고 오길 바란다”는 부모의 바람처럼 남아공 월드컵에서 세계를 놀래 킬 염기훈의 멋진 왼발이 자못 기대된다.
▲ 제주 유나이티드 조용형 선수(위)와 부모 조태식 씨와 곽미경 씨. |
한국 축구 대표팀 ‘수비의 핵’ 조용형의 집을 찾았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조용형이 대상포진으로 대표팀 훈련에 불참했단 소식이 들려온 때였다. ‘걱정하고 있을 그의 부모 얼굴을 어떻게 보나’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두 분은 “증상이 심하지 않다고 연락이 왔다. 조금 쉬면 나아진다더라”며 오히려 기자를 안심시켰다.
초등학교 때 달리기 대회에 나갔다가 축구부 감독의 눈에 띄어 축구를 시작하게 됐다. 어머니 곽미경 씨는 아들이 운동선수로 고생하는 게 싫어 보습학원에 등록시켰다. “소용없었다. 학원 수업에 빠지고 축구하러 운동장에 나가있곤 했다. 축구부에서 받은 유니폼에 양말까지 착용한 채 잠에 들 정도였으니 말릴 수가 없었다.” 곽 씨는 아들의 축구 사랑에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할 무렵 첫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당시 정부는 학교 간 격차를 줄이고 과열된 입시준비교육을 시정하기 위해 학군제를 강력하게 시행했다. 인천 역시 북구와 남구로 나뉘어 학군이 다른 중학교 진학이 불가능했다. 조용형의 소질을 발견한 신호철 감독이 그를 부평동중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던 것. 결국 조용형은 한 달 하고 꼭 17일 동안 부흥중학교를 다니는 동시에 부평동중 축구부 연습에 참가해야 했다. 곽 씨는 약 50일 동안 부평동중 유니폼을 들고 아들이 공부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 곽 씨는 “추운 겨울에 길거리에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가는 뒷모습을 보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부평동중에 소속되지도 않은 채로 타 학교 아이들과 연습을 했던 것이니 본인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결국 50여 일 만에 조용형은 부평동중으로 전학 가게 됐다.
부평동중-부평고에서 김정우 이천수 최태욱 박용호 등 유명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며 축구 선수로서의 기량을 키워나가던 그에게 두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2002년 고려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던 그에게 티오(TO;정원)가 없단 통보가 날아들었다. 다른 대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조용형은 소속 없이 고대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다. 연습은 함께하면서 경기에 나갈 수 없단 사실이 분하기도 했지만 그때의 인내는 그를 한 단계 성장시켰다.
아버지 조태식 씨는 “누구든 시련이 있기 마련이다. 용형이는 힘든 시기를 이를 악물고 버티며 더욱 노력했다. 그 1년이 얼마나 값진 시간이었는지 모른다”며 미소를 보였다. 그때의 노력 덕분일까. 조용형은 1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지만 동료보다 빨리 대학 2학년을 마치자마자 바로 프로에 입단했다.
부천 SK에 입단하자마자 베스트 11에 뽑히며 환상적인 데뷔를 한 그에게 세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갑작스런 경남 이적 통보였다. 게다가 경남으로 둥지를 옮기자마자 떠난 브라질 전지훈련에서 그는 짐도 풀기 전에 다시 성남으로 이적됐단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강제 트레이드였다.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담담히 받아들였다. 아버지 조태식 씨는 ‘프로의 세계는 냉엄하다. 어느 구단에 가든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으면 된다’며 아들을 격려했다. 친정팀 제주에서 다시 비상한 그는 이제 대표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수비의 핵’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잉글랜드 사우디아라비아 등 해외 유명 구단에서 러브콜을 보내고 있단 소식에 조 씨는 “해외 진출도 좋지만 지금은 월드컵에 집중할 때”라며 “한 번의 실수가 골로 연결될 수 있다. 마지막 일분까지 후회 없는 경기를 하고 오길 바란다”며 아들에게 응원메시지를 보냈다.
▲ FC 서울 이승렬(위) 선수와 부모 이상군 씨와 박옥희 씨. |
가슴에 태극마크를 새기고 오른 월드컵 첫 무대. 그의 얼굴엔 설렘이 가득했다. 경기 흐름을 바꿔야 하는 ‘조커’로서의 막중한 임무에도 그는 경직되지 않는다.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로 대표팀에 활력을 불어넣는 젊은 피, 이승렬. 그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조기 축구회에서 오랜 기간 활약한 아버지를 따라 운동장에서 처음 공을 차기 시작했다. 신정초등학교 축구부 감독 눈에 띄어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할 무렵, 그는 일본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에서 열린 초등부 축구대회에 이승렬이 스트라이커로 출전하게 된 것. 대회에 참가한 안산 소재의 한 초등학교 축구부 감독은 타 학교 학생인 이승렬을 스카우트해 일본으로 데려갔다.
아버지 이상군 씨는 “감독이 당시 팀 전력에 승렬이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설득을 해왔다. 다른 학교 학생인데도 말이다. 승렬이가 일본을 상대로 여러 골을 넣었다”면서 이승렬의 얼굴이 크게 실린 당시 일본 신문을 꺼내 보여줬다. 이때의 좋은 추억 때문일까. 이승렬은 U-20대표팀에서, 또 동아시아축구연맹 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상대로 유난히 강한 면모를 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축구 전문기관 용인축구센터에 들어간 이승렬은 ‘즐겁게 축구하는 법’을 배웠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훈련을 시키는 일반 학교와는 달랐다. 연습시간은 하루에 2시간 반을 넘지 않았다. 1학년 때는 철저하게 기본기만 가르쳤다. 축구 연습도 자율적으로 본인이 하고 싶은 만큼만 했다. 이 씨는 “승렬이가 축구를 정말 즐겁게 하더라. 당시 센터엔 김보경(오이타) 이범영(부산) 등 쟁쟁한 선수들이 가득했다. 축구를 즐기며 배우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2000년 9월 다이너스티 인터내셔날배 추계대회에 참가한 이승렬은 근육 파열로 경기 중 앰뷸런스에 실려 나갔다. 이 씨는 깁스한 아들이 안타까워 목발을 찾아 밤늦게 속초 시내를 헤맸다. 다음날 오전, 경기를 보러 간 이 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숙소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아들이 경기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감독에게 달려가 “근육 파열로 걷지도 못할 아들이 왜 경기장에 있냐”고 따져 감독으로부터 출전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그러나 원상중이 상대팀에 밀려 패할 위기에 몰리자 감독이 ‘승렬이를 출전시키면 안되겠냐’며 부모의 동의를 구했다. 결국 이승렬은 진통제를 맞고 경기에 투입됐고 역전승의 주역이 됐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FC서울에 입단한 이승렬은 남들보다 일찍 프로무대를 밟아 일취월장했다. 2008년 신인왕을 차지했고, 올해 2월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에 오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또한 에콰도르와의 평가전에서 후반 교체된 지 7분 만에 선제골을 터뜨리며 ‘한 번의 찬스를 확실히 살리는 선수’로 각인됐다. 이 씨는 “최종 엔트리 23명 안에 든 것만 해도 감사하다. 선발 출전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섣부른 기대를 하게 될까 걱정이 앞선다”며 자세를 낮췄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타고난 실력을 더욱 갈고 닦아 온 ‘허정무호 황태자 3인방’.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무대에서 이들의 비상을 기대해본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