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시를 탔다가 연쇄살인마에게 참변을 당한 딸. 송 씨는 딸을 죽인 범인이 자신 앞에서도 죄책감이 없어 보여 더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25년 동안 금지옥엽처럼 키워온 딸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송석표 씨는 ‘강력한 법집행’을 요구하면서 <일요신문> 인터뷰에 응했다. 지난 3월 발생한 ‘청주택시기사 연쇄살인사건’ 희생자의 아버지인 송 씨는 6월 15일 기자와 만나 “내 딸을 마지막 피해자이길 바라는 간곡한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고 말했다.
“은혜를 잃은 뒤 우리 가족의 삶은 백팔십도 바뀌었다. 어느 하나 잘못한 사람도 없는데 가정이 풍비박산 나버렸다. 넉넉하진 않아도 서로 아끼는 마음만큼은 여느 가정 못잖았다. 남은 우리 세 식구는 아예 웃음을 잃어버렸다. 대화도 사라졌다. 집사람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눈물만 흘리고 외출조차 못하고 있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잃은 아들 녀석의 얼굴에서는 깊은 절망만 가득하다. 나 역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넋이 나가 있을 때가 많다. 남은 가족들이 얼마나 큰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절대로 그런 범행을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사건 이후 달라진 가족의 생활을 얘기하며 송 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단란하던 한 가정이 파괴됐음에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고통은 고스란히 남은 가족의 몫으로 남았다.
“저 집 딸이 글쎄….” “이번에 잡힌 택시연쇄살인범한테 당했잖아.” 가족들에게는 주변의 말 한마디조차 상처가 되어 가슴에 박혔고 죄지은 사람인 양 사람들을 피해다녀야 했다.
사건이 발생한 날은 3월 26일 천안함 사건으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날이었다. 친구 생일파티에 참석한 딸은 밤이 늦도록 연락이 닿지 않았고 끝내 귀가하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딸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한 송 씨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워낙 험한 세상인 데다가 걸핏하면 뉴스에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소식이 들려오곤 하니까 불안하긴 했지만 설마설마했다. 우리 집에 그런 일이 생길까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오후 5시경 송 씨는 경찰로부터 “딸의 시신이 발견돼 보훈병원에 안치되어 있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딸의 시신을 본 순간 송 씨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얼굴과 온 몸에 꽃보다 아름다웠던 딸을 처참하게 유린한 악마의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경연에서 입상해 냉장고를 타오는 등 집안의 귀염둥이이자 분위기 메이커였던 딸은 그렇게 비참하게 떠났다.
안 아무개 씨(41). 사건 이틀 후 새벽 대전산업단지 골목에 시신을 유기하는 장면이 찍힌 CCTV를 토대로 경찰이 검거한 범인의 이름이었다. 안 씨의 직업은 택시기사였다. 안 씨는 3월 26일 밤 11시 30분경 청주시 남문로의 번화가에서 귀갓길에 오른 은혜 씨를 태웠다.
“학생이세요, 직장인이세요?” 안 씨의 첫 질문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얘기지만 학생은 돈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범행대상에서 제외시킬 요량이었다. 하지만 은혜 씨는 안 씨의 의도를 알리 없었다. 은혜 씨는 ‘인턴사원’이라 말했고, 안 씨는 그길로 후미진 곳으로 차를 몰고 간 뒤 미리 준비한 노끈과 청테이프로 양 손발과 얼굴을 결박하고 유린·살해했다. 하지만 취직한 지 얼마 안 된 그녀에게 목돈이 있을 리 없었고, 특히 당일 수중에 그녀가 갖고 있던 돈은 친구 생일파티를 하고 남은 단돈 7000원이 전부였다.
송 씨는 딸의 마지막 행적을 살펴보기 위해 현장검증에 참가했고 그곳에서 안 씨와 대면했다. “체격이 크고 단단했다. 제압하면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겠더라. ‘왜 죽였냐’고 물어봤는데 대답이 없었다. 옆에 있던 형사님이 ‘은혜 아버님이셔. 잘못했다고 사죄드려’라고 시키니까 그제서야 마지못해 ‘죄송하다’고 하더라. 뉘우치는 빛이 전혀 없었다. 변호사를 세 번이나 바꾸는 등 자기 살 궁리만 한 인간이다. 권한만 주어진다면 내 손으로 직접 그 놈을 죽이고 싶었다. 강력범죄에 가족을 희생당한 다른 가족들도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조사결과 안 씨는 은혜 씨를 살해한 후 시신을 트렁크에 싣고 다니며 버젓이 택시영업을 하는 등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던져줬다. 이에 대해 송 씨는 “오죽하면 제가 그놈더러 짐승도 아닌, 벌레만도 못한 놈이라고 했겠나. 사람을 죽였으면 죄책감과 공포로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이 떨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정상인데 여느때와 다름없이 먹고 자고 택시운전까지 했다니…. 더구나 시신을 트렁크에 실은 채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손님을 태웠다는 게…”라며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따로 있었다. DNA 대조결과 안 씨가 지난해 9월 청주 무심천에서 숨진 채 발견된 김 아무개 씨(41)와 2004년 10월 조치원에서 발견된 전 아무개 씨(23)도 성폭행 후 살해한 연쇄살인마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 씨는 지난 2000년 특수강간 혐의로 실형까지 살았던 인물이었다. 당시 3년을 선고받은 안 씨는 반성문을 제출해 2년 6개월 만에 출소한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안 씨는 올 1월 20일에도 자신의 택시에 탄 여성(33)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르려다 “임신 중인데 하혈을 한다”며 애원하는 바람에 미수에 그친 사실도 드러났다.
송 씨는 김길태, 김수철 사건 같은 성적 목적이 개입된 범행 중 상당수가 유사범죄 전과자에 의해 발생된다는 점을 언급하며 좀 더 강력한 제재수단으로서의 법집행을 요구했다. 특히 성범죄 전력이 있는 인물들은 재범률이 높은 만큼 지속적인 관리를 해야 함을 강조했다. 송 씨는 딸 장례식 조의금을 털어 안 씨가 소속됐던 택시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전과자를 취직시키면 안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문제의 택시회사는 성범죄 전과자이자 자격정지 상태였던 안 씨를 채용해 결국 화를 불렀다. 택시기사처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직은 과거 범죄전력을 확인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성실하게 택시운행을 하는 기사들이 대다수지만 사실 택시기사에 의해 발생하는 범죄가 얼마나 많았나. 특수강간 전과자가 먹잇감을 찾아 버젓이 ‘살인택시’를 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