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KBS 한국인의 밥상
사람만 늙는 게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생명도 나이가 들고 늙는다. 늙은 호박, 노각, 노계처럼 아예 이름에 나이가 표현되기도 하고 한해 농사의 마침표를 찍는 끝물 채소도 있다.
처음의 생생함은 아니지만 오래 익어 더 진하고 단단해진 맛의 주인공들. 살아온 시간만큼 깊어지는 세월의 맛을 만난다
당진의 한 마을. 텃밭에는 여름에 따지 않고 밭에서 그대로 익혀 누렇게 익은 늙은 호박이 가을을 맞는다. 어디를 가든 늘 서로의 팔짱을 꼭 끼고 다니신다는 이병직, 노일남 어르신 부부는 올해로 결혼한 지 60년째다.
젊은 시절 논과 밭을 누비며 바쁘게 살아온 아내가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남편은 아내의 든든한 지팡이가 되어주었고 늙은 호박처럼 둥글둥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래 익은 늙은 호박은 어린 애호박과 달리 겉은 단단해지고 속은 더 진한 단맛을 품는다.
뚝뚝 썰어 게젓국을 넣어 담가 익힌 호박지, 겨우내 찬바람을 맞아 더 달고 부드러워진 호박고지로 떡을 찌고 따뜻하게 호박죽 한솥 끓이면 60년을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의 시간도 달달해진다. 늙은호박처럼 한 생애를 뜨겁게 살아내고 단단하고 묵직해진 그리고 서로의 곁을 지키며 달콤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노부부의 밥상을 만난다.
가을이 깊어지면 들녘에도 단풍이 든다. 이맘때면 마음이 늘 콩밭에 가 있다는 경주의 솜씨 좋은 토속음식 삼총사 이영욱, 김은규, 서원지 씨. 바로 노랗게 색이 변한 단풍콩잎들 때문이다. 콩잎이 단풍 들 때면 고추들은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가지째 뽑아내고 마지막 끝물고추를 거두어들인다.
같은 가지에서 열리는 열매라도 처음 수확하는 첫물과 달리 끝물은 크기는 작지만 조직은 더 단단해지고 맛은 더 진해진다. 말리고 절이고 삭혀서 먹는 저장 음식에는 끝물채소가 제격. 단풍콩잎과 끝물고추는 소금물에 삭혔다가 장아찌와 부각, 고추지를 만들어 겨우내 밥반찬으로 올리고 끝물고구마줄기는 말려두었다가 생선조림을 만들어 별미로 먹는다.
끝물채소들이 총동원되는 종합 선물 세트는 경북지역의 토속장인 시금장. 보리등겨가루로 구멍떡을 만들어 찌고 왕겨 불에 은은하게 굽고 띄워 메주를 빚는다. 이 메주를 곱게 빻은 다음 끝물고추와 단풍콩잎장아찌, 무말랭이 등을 골고루 넣고 시금장을 만드는데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터라 요즘은 보기 힘든 귀한 음식이 됐다.
어려서 어머니가 해주던 그 맛을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세 사람. 기다린 만큼 더 깊어지는 맛의 지혜를 잊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는 이들에게 끝물채소는 가을 들녁이 내어준 마지막 선물이다.
한편 이날 방송에는 부여 송정그림책마을도 찾는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