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리셉션 때 클린턴 대통령과 필자 부부가 인사를 나누는 모습. |
▲ 1964년 필자, 트루먼 전 대통령,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부터)이 인디펜던스에서 만났다. |
해리 S. 트루먼
트루먼 대통령과는 두 번 만났다. 아이젠하워보다 한 번이 모자라지만 워낙에 한국과 관련이 깊고, 또 깊은 대화를 나눴던 까닭에 더 기억에 남는다. 첫 만남은 그가 대통령에서 물러나서 미주리(Missouri)주의 인디펜던스(Independence)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인디펜던스는 캔자스시 동쪽으로 50분 거리에 위치했고, 거기에는 트루먼 도서관이 세워져 있었다. 트루먼은 당시 매일 이곳으로 출퇴근했다. 개인적으로 꼭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어 특별히 요청을 해서 만나게 됐다.
트루먼은 세계 대전 때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부통령의 신분으로 대통령에 취임했고, 원자폭탄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6·25전쟁 발발 직후 미군파병을 결정한 강력한 리더십을 선보였고, 또 전쟁영웅 맥아더 장군을 과감히 파면시킨 대통령이었다. 그를 직접 만나기 전에 필자도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가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은 전후 세계질서를 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트루먼의 첫 인상은 시골 할아버지같이 부드럽기만 했다. 미국사람 치고는 키도 크지 않았고 말이다. 물론 대화를 하다보니 이 부드러움 이면에 강한 결단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 가운데 자신의 임기 중 제일 어려웠던 결정이 6·25전쟁 때 미국군대를 파병하는 문제였다고 강조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트루먼은 나중에 만났을 때에도 똑같이 이를 되풀이해 강조했다. 개인적으로 원자탄 투하가 더 어려웠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처음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대화를 나누다보니 ‘세계 3차대전을 크게 우려했음’을 알 수 있었다.
트루먼은 참 경우에 밝은 사람이었다. 당신의 서명이나 사진을 요청했더니 나중에 정중한 서신과 함께 보내왔다. 이때 함께 찍은 사진은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청년장교로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킨 필자로서는 지금도 이 사진을 보면 그의 어려운 한국전 파병 결정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진다.
▲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태권도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사마란치(왼쪽), 키신저(가운데)와 필자. |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를 처음 만난 것은 1964년 하버드대학교 하계대학에 있을 때였다. 이때 이미 그는 국제정치학 교수로서 아주 유명했다. 그가 저술한 외교사는 근대외교의 정통 교과서로 통한다. 뛰어난 학자로서 실용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필자는 캠브리지 교외 중국식당에서 함께 오찬을 한 기억이 있다.
그후 그는 닉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되기 전 안보보좌관으로 일을 했는데 그때 백악관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그런데 키신저는 “그때(1964년) ‘가라테맨’ 아니냐”며 필자를 기억했다. 미국에 있으면서 태권도를 수련했고, 첫 만남 때 잠깐 이것이 언급됐는데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도 이를 기억해낸 것이다. 정말 놀랄 만한 기억력이었다. 그후 그는 미국과 중국의 수교를 위해 비밀외교를 펼치는 등 큰 업적을 세웠다. 키신저는 독일 출신으로 닉슨, 포드 두 대통령 밑에서 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중·미수교와 월남 전쟁 종식 등으로 73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미국 외교정책을 8년간 주름잡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반면, 칠레 정권 정복,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 정권 정복, 캄보디아 폭격, 동티모르 문제 관여, 유고슬라비아 문제 관여 등으로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77년에 자리를 떠났을 때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좌교수직을 제의했는데 학생들의 반대로 취소된 적도 있다.
세 번째로 그를 만난 것은 그가 월드컵 축구(1994년) 유치위원장으로 서울에 왔을 때였다. 김용식 전 외무장관과 함께 롯데호텔에서 저녁을 대접했다. 이후 1999년 봄, IOC가 솔트레이크 사건으로 미의회와 법무성과 문제를 안고 있을 때 사마란치는 키신저를 IOC명예위원으로 끌어들였다. 키신저는 IOC의 개혁에 대해 조언을 하는 한편 IOC에 대한 미국 정가의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자연히 이 과정에서 필자는 그와 자주 만나게 됐다.
기억에 남는 대화가 하나 있다. 남북 정상회담(2000년)에 갔다 왔을 때, 즉 햇볕정책이 한창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으며 국제적으로도 크게 화제가 됐을 때 키신저는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설명을 듣더니 키신저는 “그렇게 개방하면 북한이 무너질 텐데 김정일이 그렇게 하겠느냐?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이다. 이후 북한핵문제에 대한 6자회담 등 아직도 잘 풀리지 않는 북한문제에 대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필자는 이 말이 생각난다. 이만큼 키신저는 무서운 통찰력으로 남북관계 등 국제정치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매번 IOC 총회 때마다 IOC 명예위원으로서 꼭 참석했고 개방된 IOC의 버팀목이 되었다.
빌 클린턴
빌 클린턴과의 인연은 솔트레이크시티동계올림픽(2002년) 유치, 그리고 애틀랜타올림픽(1996년) 유치와 개최로 두 번 서신을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는 힐러리 클린턴(지금의 국무장관)이 딸과 함께 참관을 하러와 여러 경기장에서 만난 바 있다.
애틀랜타올림픽 때는 필자가 IOC의 제1부위원장이었던 까닭에 직접 대면할 기회가 수차례 있었다. 클린턴은 한국에 대해 친밀감과 함께 큰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한국경제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봤다. 애틀랜타는 대도시로는 작은 편이어서 각국 원수의 참석을 권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온다고 하면 각종 예우문제로 ‘큰 일 나겠다’ 싶었는데 그런 일이 없어 내가 편했다. 세계의 이목이 쏠린 개회식 때 클린턴은 본부석 가운데에 IOC 지도부와 앞뒤로 앉았다. 클린턴을 자주 비추다 보니 필자도 생중계에 모습이 나왔던 모양이다. 동양 사람이 TV에 클린턴 바로 뒤에 나오니 “누구냐”고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클린턴은 역시 정치가라 휴식시간에도 계속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권위주의에 젖은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로 대통령이 된 사람은 이렇게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야 하나보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클린턴은 명랑하고 소탈해 금방 호인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클린턴 부부는 올림픽 기간 중에 IOC 위원들에게 특별리셉션도 열어주었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애틀랜타의 올림픽광장에서 폭발물이 터져 당시 대소동이 난 바 있다. 테러위험이나 추가 폭발물이 없는지 수색하면서 클린턴과 IOC 회장단은 새벽 2시에 비상전화로 숙의를 거듭했다. 일단 선수촌은 봉쇄하고 경기도 중단시켰다. 나름 아주 긴박한 분위기였다. 비상전화로 국민 방위군 동원문제를 클린턴과 사마란치와 내가 깊이 논의를 했다. 당시 클린턴의 판단은 국민방위군을 테러에 대비해 동원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1972년 뭔헨올림픽 때 ‘검은 9월단’의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 공격으로 올림픽이 72시간 중단되었던 비극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후속 폭발이 없고 다른 테러정보도 없어 방위군은 동원하지 않고 조용히 수습하기로 했다.
이때 클린턴은 개회식에 참석한 후 백악관으로 돌아가 있었다. 봉쇄상태에서 있는 선수촌은 아침 7시에 제1부위원장인 필자가 각국 선수단장을 회의실로 소집해 상황을 설명하고, 동요하지 않게 한 후 봉쇄를 풀었다. 경기를 재개하려면 경기장 운용, 수송인원과 차량동원 등 할 일이 많았지만 일은 잘 풀렸고, 경기는 예정대로 재개됐다. 힐러리 클린턴 영부인은 백악관에 돌아간 후 6개월 전부터 계획했던 대로 특별기를 보내 IOC 위원 부인 전원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오찬회를 가졌다. 힐러리는 애틀랜타 개회식장, 휴게실 등에서 필자 내외를 만나 편하게 담소를 나누곤 했다. 이 오찬은 6개월 전에 참석 여부 등 세부사항 결정돼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기간 중 새로 선출된 이건희 위원의 부인(홍라희)은 초청자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사마란치와 내가 상의해 특별히 부탁해 홍라희 씨도 추가 초청을 받게 했다. 이 과정에서 해프닝도 있었다.
당시 특별기의 앞 칸 1등석에는 사마란치 부인, 제1부위원장인 필자 아내, 조지아 주지사·애틀랜타 시장·페인 조직위원장의 부인이 앉고, 2등석에는 나머지 IOC 위원 부인이 앉게 돼 있었다. 내 아내가 낯선 홍라희 씨를 1등석에 앉혔더니 빨간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와서 뒤칸으로 가라고 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이에 사마란치 부인과 필자의 아내가 설명을 해서 그냥 1등석에 앉도록 한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한 후 오바마 정권의 국무장관이 되어 세계정치외교에 앞장서고 있다. 힐러리는 “외교는 상상이나 이념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확증과 현실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는 철학을 밝힌 바 있다.
‘지퍼게이트’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클린턴은 인기가 많은 대통령이었다. 애틀랜타올림픽 기간 중 ‘(인기가 높은) 클린턴이 애틀랜타에 오면 도시가 마비되고, (역시 인기가 만만치 않은) 고어 부통령이 오면 반이 마비된다’고들 했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