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SBS |
―2010남아공월드컵을 마친 소감이 궁금해요.
▲생애 첫 월드컵이라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정말 소중한 경험을 했어요. 골도 두 골이나 넣고. 그런데 제가 골을 성공시킬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사실 그 두 골도 운이 좋아서 들어간 거지 제가 잘해서 성공시킨 건 아니라고 봐요.
―이청용 선수는 겸손하게 말하지만 만약 그 골이 안 들어갔더라면 한국의 16강 진출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우루과이전에서 패한 뒤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을 것 같은데….
▲그날 밤 잠이 안 오더라고요(웃음). 이길 수 있는 경기였고, 이길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결국 지니까 너무 아쉽고 허무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가진 걸 그라운드에서 다 보여줬다고 믿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우리의 월드컵이 계속 올라가지 못하고 16강에서 끝난 부분은 두고두고 아쉬울 거예요.
―영국에서 생활하다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 선수들과 긴 합숙 시간을 보냈는데요, 막상 이렇게 헤어지려니 섭섭한 면도 있죠?
▲그렇죠. 한국 들어가서 해단식하고 나면 한동안 보기 힘든 선배님들이 많잖아요. 정말 긴 시간 동안 합숙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선배님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더욱 뜻깊고 즐거웠어요. 이건 결코 립서비스가 아닙니다(웃음). 허정무 감독님을 비롯해서 코칭스태프들과도 편한 분위기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어요.
―월드컵 동안 종종 인터넷으로 기사는 확인했나요?
▲시간 될 때마다 인터넷을 들어가긴 했는데 속도가 너무 느리더라고요. 기자님들도 기사 전송하시기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은 기사들을 보진 못했어요. 하지만 아르헨티나전에서 1-4로 패한 후 인터넷에 특정 선수 이름이 거론되면서 인신공격성 비난이 들끓는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경기에서 이기는 건 한 선수만이 아닌 모든 선수들이 잘해서 이기는 겁니다. 경기에서 질 때도 한두 선수가 잘못해서가 아닌 모든 선수들이 실수해서 지는 거고요. 기자님이나 팬들은 너무 골 넣는 선수한테만 관심을 집중시키시는 것 같아요. 그러나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만약 그랬다면 다소 어색한 팀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린 단 한 명도 그렇게(한 선수가 잘못해서 패했다고)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런 실수들이 팀 분위기에 어떤 영향도 미치진 않았어요.
▲ 귀국 후 대화를 나누는 이청용(왼쪽)과 박지성. |
▲어느 누구도 주영이 형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위로할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건 주영 형이 잘못해서 이뤄진 골이 아니잖아요. 흔히 경기를 하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주영 형이 넣고 싶어서 넣은 골도 아니었기 때문에 위로를 하거나 탓할 필요가 없었어요. 주영 형은 원래 자신의 실수가 있으면 금세 잊고 다음 경기에 집중하는 스타일이에요. 아마도 그 때의 실수 아닌 실수가 있었기 때문에 나이지리아전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기억나는 게 아르헨티나전 이후 믹스트존에서 인터뷰했을 때의 내용이에요. 이청용 선수는 다른 선수와 달리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나가지 못했던 게 아쉽다’라고 말했어요.
▲아르헨티나전을 앞두고 선수들과 미팅을 하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주고받았어요. 우리가 일대일로 승부를 펼치다보면 크게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초반엔 공을 잘 관리하면서 기회가 났을 때 공격을 해보자고요. 그런데 먼저 골을 먹고 나니까 오히려 경기가 안 풀리더라고요. 수비적으로 나가서 전반에 무실점으로 끝냈더라면 우리 계획이 성공했을 것이고 후반부턴 완전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어요. 막상 뭘 해보지도 못하고 경기가 마무리되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밀어 붙일 걸 하는 아쉬움이 컸던 거죠.
―허정무 감독도 그렇고 박지성 선수도 우루과이전 이후 앞으로 젊은 선수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외국, 특히 유럽에서 뛰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공감하는 부분이죠?
▲그럼요. 제가 만약 볼턴이 아닌 K리그에 있다가 월드컵에 나갔더라면 지금 이 정도의 실력도 못 보여줬을 거예요. 유럽에서 많은 선수들과 경기하면서 느끼고 배웠던 부분들이 월드컵 무대에 섰을 때 여유와 자신감을 갖게 해준 것 같아요. 월드컵을 앞두고 해외 진출을 했던 부분이 저한테는 행운이었던 셈이죠.
―그리스와의 첫 경기가 벌어질 때 그라운드로 걸어나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실수하지 말고 잘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내 생애 첫 월드컵 무대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긴장은 되지 않더라고요.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무대를 비로소 밟게 됐다는 부분이 감격스러웠습니다. 저한테는 굉장히 뜻 깊었던 그리스전이었어요. 그리스전에서의 승리가 16강 진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이었고 첫 경기를 잘 풀어가서 그런지 선수들이 그 다음 경기부터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거든요.
―박지성 선수가 주장을 맡은 이후 느꼈던 부담감과 책임감에 대해 고충을 토로한 적이 있었어요. 가까이서 지켜본 박지성 선수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후배로선 일단 지성 형이 팀을 이끌어 가는 데 많은 도움을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했어요. 월드컵 동안 지성 형의 역할은 밖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존재감이 있었습니다. 지성 형이 이번 월드컵이 마지막 월드컵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전 지성 형이 없는 대표팀은 상상이 되질 않아요.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여러 선배님들이 은퇴한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에요. 형들이 경기장에 있고 없고의 차이는 무척 크거든요.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도 형들은 어린 선수들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어요. 이번 월드컵을 통해 그 점을 절감하게 되었죠.
―다음 월드컵은 이청용 선수를 비롯해서 박주영, 기성용 선수 등이 이끌어가야 한다는 얘기도 있어요.
▲지금은 솔직히 그럴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책임감을 느끼게 되겠죠. 그러나 우리가 형들처럼 잘해낼 수 있을까요? 앞으로 보고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은데 형들이 없으면 힘들어 질 것 같아요.
―박지성 선수도 2002년 때는 막내였어요. 대표팀이 한동안 은퇴 선수들로 과도기를 거칠 수밖에 없지만 모든 선배들이 다 그만두는 건 아니니까 좀 지켜보자고요. 그나저나 요즘 이적설이 다시 불거지고 있는데요, 스토크시티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면서요?
▲제가 직접 들은 얘기는 아니에요. 많은 분들이 제 진로 문제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시는데, 전 지금 볼턴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요. 동료 선수들이나 구단 관계자들 모두 가족같이 따뜻하게 잘 대해주고 있고 저 또한 그들과 함께 지내는 부분에 대해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계속 볼턴에서 뛸 겁니다. 제 상황이 변화를 추구할 때가 아니잖아요. 앞으로 기회는 많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면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 같은데요, 이전에도 유명했지만 이번 월드컵을 통해 더욱 더 부각된 면이 있잖아요.
▲(이 질문에서 이청용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아직까진 제가 유명한 스타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더욱이 이번 월드컵에서 잘했다는 마음도 안 들고요. 선수들도 고생했지만 뒤에서 우리를 돌봐준 스태프들이 더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그분들을 생각하면서 좀 더 책임감 있게 경기장에 나선 것 같아요. 매번 느끼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제 부족한 점을 더 크게 느꼈어요. 체력적인 면에서도 분명 문제가 있었고요. 두 골을 넣었지만 더 많은 골을 넣을 수 있는 찬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건 아주 뼈아픈 일이죠.
―남아공월드컵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우루과이전이죠. 제가 지난 일에 대해선 거의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편인데 우루과이전은 자꾸 곱씹게 되더라고요. 8강에 올라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다시 그런 기회가 올 수 있을까요?
인터뷰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음 월드컵에선 이청용이 주장을 맡는 게 아닐까?’ 그라운드 안팎에서 변함없이 성실하고 반듯한 모습을 보이는 이청용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 이상의 성숙함과 차분함, 그리고 깊이 있는 사고 등을 내보이기 때문에 박지성 이후 이청용이 그 자리를 물려받는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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