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남아공월드컵 해단식 및 기자회견에서 허정무 감독(오른쪽)과 정해성 코치. 월드컵 원정 16강 성과를 이뤄낸 축구대표팀의 차기 사령탑 자리에 누가 오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허정무 떠난 진짜 이유
허정무 감독은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듯, 가장 영예스러운 상황과 위치에서 물러나는 게 더욱 빛나는 차기를 도모할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이번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허정무)축구교실이 옮겨진 목포 국제축구센터장에 내정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남아공 입성에 앞서 오스트리아 노이슈티프트에서 가진 전지훈련 당시만 해도 허 감독이 월드컵이 끝나면 성적 여부를 떠나 대표팀 지휘봉을 놓고 풀뿌리 축구를 육성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허 감독에게는 더욱 큰 목표가 있다. 지인들에 따르면 허 감독은 자신이 유일하게 경험하지 못한 K리그 우승에 대한 갈망도 큰 것으로 알려진다. 전남과 포항 등 한때 지휘봉을 잡은 클럽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다.
이렇듯 일련의 사실들을 놓고 볼 때 시기가 문제일 뿐, 허 감독이 언제든 현장(벤치)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부담스러운 ‘아시안컵’
허 감독이 떠난 이상, 최대의 포커스는 ‘포스트 허정무’를 찾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인물로 떠올랐던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은 한사코 대표팀 지휘봉을 잡는 것을 고사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불행한 현실이지만 요 근래 흐름을 지켜볼 때 국내 축구계에서 대표팀 사령탑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월드컵 직후였다. 직위에 걸맞은 메리트와 적절한 보상이 딱히 없었다. 실제로 임기를 제대로 마친 감독이 드물었다.
2002한일월드컵 이후 잠시 지휘봉을 잡았던 박항서 감독(현 전남), 움베르토 코엘류, 조 본프레레는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한 명에 불과했다. 명예는커녕, 그간 공들여 쌓았던 노력마저 인정받지 못한 채 산산조각이 났었다. 2006독일월드컵 이후 지휘봉을 잡았던 핌 베어벡 감독(전 호주)도 마찬가지의 아픔을 겪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월드컵 이듬해에 아시안컵이 개최된다. 한국은 월드컵 못지않게 아시안 컵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홍콩에서 개최된 1956년 제1회 대회와 4년 뒤 국내에서 열린 제2회 대회에서 연속 우승한 뒤 아직까지 타이틀을 따지 못했다. 우승 횟수로 보면 나란히 3차례씩 우승한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보다 떨어진다.
결국 아시안컵은 대단히 매혹적인 한편, 부담스러운 존재가 돼 버렸다. 당장 내년 1월, 카타르에서 제15회 아시안컵이 열린다. 통상 월드컵 이후 최소 1년가량 준비 기간이 주어졌던 데에 반해 이번에는 불과 6개월 남짓밖에 시간이 없다. 협회 기술위 사령탑 리스트에 올랐다던 후보군이 죄다 꺼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축구 원로 A 씨는 “아시안컵은 빛 좋은 개살구다. 우승해야 본전치기라 할 수 있는데 내년 대회는 월드컵 16강국이란 수식까지 붙어 더욱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후보 물망에 오른 K리그의 B 감독은 “이번 사령탑은 ‘대타’ 성향이 짙다. 명예를 준다기보단 2년짜리 단기 직장일 뿐이다. ‘이번 사령탑 이후를 책임질 주인공이 누구냐’까지 얘기가 파다한 마당에 ‘땜빵 사령탑’을 택할 바보는 없다”고 부정적인 뜻을 분명히 했다.
▲ 홍명보 감독. |
허 감독을 도와 원정 월드컵의 새 역사를 썼던 정해성 수석코치도 비슷한 이유로 대표팀 지휘봉을 부담스러워했다. 홍명보 감독이 고사한 뒤 기술위가 가장 적극적으로 검토한 이 또한 정 수석코치였다. ‘연속성’이란 측면이 컸다. 현 대표팀을 가장 잘 알고, 멤버들을 가장 잘 조직할 수 있다고 여겨진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 수석코치 역시 고민 끝에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다.
기술위는 앞서 “최대한의 임기를 보장한다”고 했지만 작금의 사례들을 볼 때 대타(혹은 희생양)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 축구계와 국민 정서상 아시안컵에서 또 다시 기대한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목이 달아날’ 가능성이 더욱 컸다.
정 수석코치로선 월드컵에서 성과를 인정받은 시점에서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보면 그동안 미뤄왔던 유럽 지도자 연수를 하는 편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축구협회에서 강력한 권유와 설득을 병행할 경우 정 코치가 마지 못해 그 제의를 받아들일 여지도 남아 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기술위의 후보 선별 과정이다. 당사자의 의견 및 입장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협회 기술위원으로 재직했던 축구인 C 씨는 “그간 외국인 감독 선임이 많아서인지, 리스트정리를 할 때 해당 감독에게 의향을 먼저 묻는 경우가 없었다”고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후보에 올랐다던 인사들 모두가 “신문을 통해 ‘내가 (대표팀 감독 후보에) 포함됐구나’란 사실을 알게 됐을 뿐, 연락 한 통 받은 적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협회가 아낌없는 지원 등 월드컵 16강에 지대한 공을 세웠음에도 여전히 투명하지 못한 밀실 행정이란 비난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그뿐 아니다. 무조건 국내 감독을 선임해야 한다는 일각의 목소리였다. 이유가 썩 타당하지 못했다. ‘월드컵에서 국내 지도자도 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한 때문’이란다. 사실 허 감독이 잘했다고 해서 국내 사령탑 모두가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도 방법은 물론, 축구 철학까지 같은 한국인이라고 모두 한데 묶일 수 없다. 오히려 명쾌하게 공과를 구분해 가장 좋은 방향으로 가야 했다는 지적이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