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진 마담 이 씨가 일했던 G 룸살롱(위)과 뒤이어 자살한 마담 김 씨가 일했던 D 룸살롱.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경찰이 밝힌 이들의 연쇄자살 동기는 사채로 인한 과다 채무다. 실제로 취재 결과 이들은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사채의 덫에서 허우적거리며 괴로워했던 정황들이 포착됐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이들의 연쇄자살 배경을 둘러싸고 갖가지 추측과 미확인 루머들이 난무하고 있다. 대체 무엇이 그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일요신문>은 현지취재를 통해 겉모습과는 달리 사채에 허우적거린 룸살롱 여종업원들의 참혹한 실상 및 연쇄자살을 둘러싼 갖가지 의혹들을 파헤쳐봤다.
7월13일 기자는 포항 시외버스터미널 뒤편 유흥가를 찾았다. 100여 개의 업소가 밀집해 있는 이곳에는 2500명 이상의 여종업이 근무하고 있었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 일대 유흥업소는 거의 패닉상태였다. 특히 최근 연쇄 자살한 여종업원들을 익히 알고 있었던 업소 관계자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이곳 여성들은 10대 중후반부터 대구 등 타지에서 영입되어 여러 업소를 옮겨 다니면서 가까이 지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살한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마담급이었던 이 씨와 김 씨는 험한 ‘물장사’ 바닥에서 이미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이 때문일까. 2명이 자살한 G 주점은 영업개시 이후 처음으로 아예 셔터문을 내렸고, 연중무휴를 원칙으로 하던 D 주점도 이틀 동안 임시휴업을 했다.
일단 경찰이 밝힌 이들의 자살동기는 사채 때문이다. 포항남부서 관계자는 “사채로 인한 과다채무와 빚 독촉을 견디다 못한 이 씨가 자살하자 그녀의 보증을 섰던 김 씨가 목숨을 끊었고 이 씨와 같은 업소에 근무하며 자매처럼 지내던 문 씨마저 비관자살했다”며 “이들과 거래한 10여 명의 지역 사채업자들을 상대로 원금과 이자관계 및 불법채권추심행위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취재결과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건의 발단은 이 씨가 아니었다. 인근 업소 관계자는 “2년 전 K 업소에서 일하던 아가씨가 사채를 끌어 썼는데 이때 ‘언니 동생’하며 친하게 지내던 마담들(이 씨와 김 씨)이 연대보증을 섰다. 그런데 지난 4월경 K 업소 아가씨가 돌연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애초 200만 원 정도였던 빚은 연 1000%에 달하는 고리사채로 인해 어느덧 2억 원이 넘어버렸다. 마담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고 귀띔했다.
K 주점 관계자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 줬다. “마담들끼리 서로 맞보증을 서왔던 차에 우리집에 있던 아가씨의 연대보증까지 섰다가 아가씨가 도망가자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아가씨들 수입으로는 절대 감당하지 못한다. 그나마 한 달만 쓰고 갚았으면 끝났는데 그게 안되니까 계속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원금은커녕 이자도 못갚는 상황이 됐던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결국 사건은 이미 2년 전부터 시작됐으며 비극은 K 업소 아가씨가 도망간 석 달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기자는 주변인들의 진술을 통해 이를 뒷받침해주는 여러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김 마담을 알고 있었던 상인 A 씨는 상당히 구체적인 얘기를 들려줬다. “김 씨는 출근 전 깔깔거리며 담배나 간식거리 등을 사러 왔는데 이런저런 얘기도 잘하고 굉장히 싹싹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몰라보게 야위고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자주 돈봉투를 맡겨놓고 갔다. 그러면 껄렁껄렁한 청년들이 수시로 와서 ‘돈 맡겨놨냐’며 돈을 가져갔다. 돈은 매번 40만~50만 원 정도였는데 이자에도 못 미치는, 한마디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을 것이다. 실제로 김 씨는 한숨을 푹푹 쉬며 연이자가 500%가 넘는다며 하소연했다. 얼마 전에는 같이 일하던 웨이터들이 와서 ‘너무 시달리다보니 누나(김 씨)가 밥도 거의 못 먹을 정도로 힘들어 한다. 무슨 일이 날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대체 어느 정도의 채무를 졌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일까. 그녀들이 진 빚이 얼마인지 정확한 액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경찰도 “조사 중이긴 하지만 확인이 불가능할 것 같다. 당사자들이 사망한 데다가 이들과 거래한 업자 상당수가 잠적한 상태라 조사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한 업주 관계자는 “사실 아가씨들의 채무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500만 원을 빌렸는데 사채업자가 1억 원이라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원금과 이자가 일수에 따라 업자들 계산에 의해 책정되기 때문에 아가씨들도 자신의 채무가 정확히 얼마인지,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업소 관계자는 “이 바닥 아가씨들이 사채(많게는 수천만 원까지)를 끌어 쓰는 것은 예삿일이다. 한 달 뼈 빠지게 벌어 간신히 이자만 갚는 이들도 상당수다. 그녀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볼 때 수억 원은 됐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녀들이 평생 일해도 갚을 방도가 없는 금액으로 사채업자로부터 수시로 위협을 받았거나 그로 인해 살아갈 희망을 잃은 절박한 상황이었을 거라는 얘기다.
한 웨이터는 “원금 상환은 포기하고 배째라식으로 사는 아가씨들도 많다. 사채업자들이 찾아와서 뺨을 때리고 머리끄댕이를 잡고 폭행해도 ‘팔자려니’한다. 그냥 평생 벌어 이자나 갚는 시늉만 하겠다는 식이다. 그런데 누나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 누나들이 유난히 마음이 여린 데다가 이런저런 상황에 완전히 지쳐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세계에서 아가씨들끼리 맞보증 및 연대보증을 서는 일이 다반사라 언제든지 이런 비극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녀들이 굳이 살인적인 이자를 알면서도 사채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상당수의 업소 동료들은 ‘사인지(sign. 외상손님에게 수금이 안되면 마담이 술값을 떠안는 시스템)’를 꼽았다. 실제로 한 업소 종업원은 “가게 매상을 마담 개인이 채워 넣어야 되는데 급한 마음에 사채를 끌어 메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경기불황으로 6개월 후에도 수금이 안되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귀띔했다.
‘마이킹’을 이유로 든 이들도 있었다. 업소생활을 시작할 때 ‘빈 손’으로 찾아온 아가씨들은 빚탕감이나 방 보증금, 살림살이 장만비 같은 목돈은 물론이고 ‘영업’에 필요한 의상비와 미용실비 등을 업주로부터 미리 가불받는다. 하지만 업주에게 미리 ‘땡겨쓴’ 마이킹과 이자를 갚지 못해 월급을 차감당하거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채를 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채를 갚기 위해 또 다른 사채를 끌어쓰는(일명 돌려막기나 꺾기) 이들도 상당수인데 두 마담들 역시 여러 명의 사채업자들과 동시에 거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가씨들의 헤픈 씀씀이를 거론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 종업원은 “손님들에게 인기를 얻고 단골을 확보하려면 치장에 신경써야 한다. 심지어 홀복도 고급으로 입어야 하는데 마이너스 통장이나 사채를 쓸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여성은 “월세나 생활비를 제외하고 매일 고정적으로 드는 비용도 엄청나다. 머리하고 피부미용비는 기본이고 홀복 구입비나 세탁비용도 아가씨들 부담이다. 또 매일 출퇴근시 콜택시를 타는데 택시비만도 수십만 원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반드시 돈 때문에 자살을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경찰이 사채와는 무관함을 밝힌 문 씨의 자살동기는 여전히 아리송하다. 20대 초반이었던 문 씨는 측근들에게 “살 맛이 안난다” “내 삶은 왜 이렇게 안 풀리냐”며 하소연을 자주 했다고 한다. 종종 “취하지 않으면 잠이 안온다”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호소하는가 하면 “결혼해 평범한 삶을 사는 여자들이 부럽다”며 소박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씨나 김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평소 측근들에게도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술을 마시면 ‘신세한탄’을 하거나 아예 목놓아 통곡하는 일이 잦았으며 “이 바닥을 평생 못 벗어날까 두렵다”는 말도 자주 했다고 한다. 한 측근은 “항상 머리가 아프고 몸이 안좋다고 했다. 두통약을 끼고 살았고 수시로 각종 약을 먹곤 했다”고 전했다. 때문에 주변 동료들은 이들이 감당치 못할 사채에 시달리던 차에 사생활 문제 혹은 신변 비관 등의 문제들이 결합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포항=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최근 만 원 없어서 외상하더니…”
주민들은 “평소 드나드는 사람도 없었고 변변한 가족도 없다. 아가씨가 죽은 지 하루 만에 화장됐다”고 전했다. 사건이 발생한 후 이 씨의 빌라를 찾는 이도 전혀 없었다는 것. 베일에 싸인 이 씨의 삶은 업소관계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세에 가출한 뒤 줄곧 업소생활을 해왔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언제 포항에 정착했는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등 사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개인사는 얘기도 안할뿐더러 묻지도 않는 게 불문율이다. 포항에서도 수차례 업소를 옮겨 다녔고 마담생활을 한 지는 5년 정도 됐을 것”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한 업소 관계자는 “이 씨는 직접 영업을 뛰어서 유치한 손님들이 올리는 매출 일부를 받는 ‘와리마담’이었기에 월급제 마담보다는 수입이 괜찮았지만 씀씀이도 컸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씨의 단골 세탁소 주인은 “세탁물을 워낙 자주, 많이 맡기니까 배달을 하러 자주 갔는데 갑작스런 자살소식을 듣고 너무 놀랐다”고 말했다. 한 주민은 “이쁘장하고 키가 훤칠한 아가씨였다. 원래 근처 빌라에 살다가 몇 달 전부터 이 빌라에서 아는 여동생과 같이 살았다. 이 씨처럼 업소생활을 오래한 아가씨들은 동거남이랑 살면 모를까, 좁은 원룸에서 아가씨들과 같이 사는 경우는 드물다”고 전했다.
인근 마트 주인은 “얼마 전부터는 무슨 스트레스를 그렇게 많이 받는지 얼굴빛이 무척 검고 안 좋았다. 그리고 술을 많이 사갔는데 안주도 없이 한 번에 소주와 맥주를 10병 이상씩 사갈 정도였다. 놀라서 쳐다보면 본인도 민망했는지 ‘제가 술을 너무 많이 사가서 창피해요’라며 웃었다”고 기억했다. 특히 이 씨는 한 달 전에는 만 원 남짓한 돈이 없다며 외상을 했다가 며칠 후 ‘미안하다’며 값을 치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마담 김 씨’ 업소 사장 인터뷰
“월급 350만 원에 수억대 빚 져”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는 업소 아가씨들. 하지만 그녀들은 말 그대로 ‘밤에 피는 장미’였을 뿐 실상은 참혹했다. 성매매특별법 이후 공식적인 2차는 금지됐으며 업주들은 결근이나 지각, 매상부진 등으로 인한 벌금을 매기고 있기 때문이다. 업주들은 ‘착취’와 ‘노예계약’은 사라졌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측근들에 따르면 그녀들의 삶은 ‘깡통 인생’ 그 자체였다. 한 마담은 “아가씨들 대부분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 보면 된다”고 말할 정도다.
D 업소 사장 A 씨에 따르면 대구 출신인 마담 김 씨는 18세 때부터 포항에서 업소생활을 시작했다. D 업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1년 전으로 이미 수천만 원의 빚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A 사장은 김 씨를 스카우트하면서 빚을 대신 갚아주고 원금만 달아놨을 뿐 이자도 받지 않았다고 했다. 룸 7개가 있는 D 업소는 그 일대에서 상당히 장사가 잘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김 씨를 포함해 3명의 마담이 있었다. 김 씨는 오후 1시경 가게에 나와 장부정리 및 매출계산, 아가씨 점검, 외상값 회수, 단골관리 및 손님유치 등의 업무를 했고 오후 7시 30분경부터 본영업에 들어가 새벽 2시까지 근무했다. 김 씨에 대해 A 사장은 “10년 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심성이 착했다. 홀어머니와 남동생들 뒷바라지를 하고 용돈을 부쳐주는 등 가장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마담들의 수입은 생각처럼 많지 않았다. A 사장은 “마담은 아가씨들 관리 등 잡일은 많은데 수입은 오히려 아가씨들보다 못하다. 김 씨의 수입은 월 350만 원이었다. 물론 ‘외교(단골을 만들기 위한 영업)’를 잘해 더 큰 돈을 만지는 마담도 있기는 하지만 소수다. 김 씨는 여관 달방을 전전하다가 업소 인근에 월세 40만 원짜리 원룸을 얻어 살았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사채를 끌어 쓰게 된 것인지, 정확한 자살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여느 아가씨들처럼 그녀도 도통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씨가 남긴 채무에 대해 A 사장은 ‘수억대’라고만 말했다. 특히 김 씨의 ‘사인지’는 사실상 받을 방도가 없어 업주가 메워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손님들이 마담한테 외상값을 줬다고 잡아떼면 어쩔 수 없다는 얘기였다. 변변한 보호자 하나 없던 김 씨는 업소관계자들의 조의금 900만 원과 A 사장의 도움으로 간신히 빈소를 마련하고 장례를 치르는 등 36년의 기구한 삶을 쓸쓸히 마감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