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년 올림픽이 열린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병기 보좌관, 김운용 부위원장, 노태우 위원장, 전상진 대사(왼쪽부터)가 기념촬영을 했다. |
노태우 대통령은 경북중학교를 졸업하고 학도병을 거쳐 육사 11기로 군인 생활을 시작했다. 육사시절에는 럭비 선수로 유명했고, 임관 후에는 군사정보학교 영어교관, 월남전 파견, 경호실 차장보, 병력 동원으로 12·12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9사단장, 수경사령관, 보안사령관을 거쳤다. 그 후 정무장관, 체육부 장관을 거쳐 민정당 대표, 그리고 대통령 후보로 내달렸다.
필자가 청와대에 근무할 때 그가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였기에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참고로 그가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청와대로 들어왔을 때는 필자가 청와대를 떠난 후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다만 그가 전두환 장군과 함께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 전두환과 그는 박종규 경호실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력히 건의해 윤필용 사건의 후폭풍에서 살아남았다는 말은 들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981년 정무장관으로서 88서울올림픽 유치전을 직접 맡아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노태우 장관이 필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해 만나게 됐다. 이때 노 장관은 박종규에게 의존할 때였고 필자는 이미 KOC와 GAISF 그리고 태권도 세계화로 국제스포츠계에 알려져 있어 이규호 문교장관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 후 노태우 장관과는 여러 가지 이유로 올림픽유치와 준비과정에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은 필자의 IOC나 IF에 대한 외교능력 등 스포츠의 국제관계와 전문성이 필요할 때였다.
1983년 7월에 김택수 위원이 타계하고 올림픽 개최국인 한국이 후임 IOC 위원을 추천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노태우 장관이 만나자고해서 갔더니 양해를 구할 일이 있다고 했다. 김택수 IOC 위원 후임으로 당연히 필자를 추천해야 하는데 ‘윤필용 사건’ 때 박종규 (사격)회장이 자기들을 살려준 사람인 까닭에 의리 상 이번에는 박종규를 추천하겠다는 설명이었다. 이 다음에는 꼭 필자를 추천할 테니 이번만은 양해를 해달라고 부탁해 개인적으로 놀랐다. 사실 ‘이 다음에’라는 말은 안 믿었지만 최고 권력자가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직접 당사자를 찾아 양해를 구하는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5·18광주민주화운동 후 3김이 모두 수난당할 때 특히 김종필 공화당 총재도 톡톡히 곤욕을 치렀는데 신군부 실세 중 노 장군만은 그 후에도 김종필 총재를 깍듯이 모셨고 청구동 자택으로 찾아가 “일을 하다가 보니 그렇게 되어 죄송하다”고 사과까지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올림픽 유치가 끝나고 올림픽 준비 과정에 들어가면서 노태우 장군은 체육부 장관, 대한체육회장, 그리고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 서울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두루 거쳤다. 필자도 노 장군이 맡은 위원장 타이틀에 ‘부’자를 하나 붙이면서 함께 움직이게 된다.
▲ 1992년 노태우 대통령과 영부인이 IOC본부를 방문했다. |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소련 선수단은 오지 않았지만 소련의 시소에프(Sysoev) 차관이 와 있었다. 시소에프는 국제사이클연맹 회장도 맡고 있었다. 직접은 연결이 안 되어 노 위원장과 이병기 보좌관, 이영호 장관, 필자가 아디다스의 다슬러(Dassler) 회장을 통해 베벌리(Beverly) 힐튼에서 시소에프 차관을 만났다. 이것이 소련정부와의 최초 공식 접촉이었다.
물론 1982년부터 IOC의 올림픽운동 분과위원이었던 필자는 스미르노프(Smirnov)나 시소에프 등을 자주 만났지만 화제가 서울올림픽이 아닌 다른 스포츠 관계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프로그램위원장이던 스미르노프와는 ITF와의 관계 문제 등만 논의했었다.
어쨌든 시소에프와 서울조직위의 회합에서는 서울올림픽 준비사항을 설명하고 소련 선수단이 참가하는 경우,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대화 중 자연스럽게 소련에 의한 KAL기 격추사건이 언급됐고, 노 위원장은 불행하고 비통한 일이지만 KAL기 사건과 서울올림픽은 별개로 분리해서 처리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시소에프 차관은 안심하고 모스크바의 정부당국에 보고했고, 모스크바의 최고위층도 최초의 만남에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것이 발전돼 노태우 장관은 1985년 동베를린에서 열린 IOC 집행위원회에 참석했고 호네케 동독 공산당서기장도 만나고, 에발트(Ewald) 동독올림픽위원장(장관)과의 면담에서 서울올림픽 참가에 대한 시사를 얻어냈다. 이때 동독 측은 북한과의 양보성 있는 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조언을 하기도 했다. 즉 어느 정도 한국 측의 양보가 있어야 동독을 비롯한 공산권의 참가가 가능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후 에발트 위원장 일행이 동독대표단을 인솔하고 서울을 방문했을 때도 북한과의 공동 개최를 위해 경기의 반을 내놓으라는 요구가 있었다. 남북체육회담이 있을 때라 에발트 위원장은 우리에게 몇 종목을 과감하게 북한에 떼어주라고 조언을 한 것이다.
미국방송사와의 TV방영권 교섭이 한창일 때 서울올림픽조직위는 IOC와의 관계가 미묘해졌다. 이영호 체육장관이 잘 몰라서 그랬는지 IOC는 아무 것도 아니고 각국 체육장관들이 뭉쳐서 다른 기구를 만든다고 말하고 다녀 IOC와의 관계가 아주 나빠졌다. 사마란치가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이영호(체육장관) SLOOC 집행위원장을 교체하지 않으면 올림픽을 못하겠다고 건의하기 위해 서울 방문 일정을 잡아놓았을 정도로 IOC와 SLOOC간의 관계가 악화됐던 것이다.
이때 노태우 위원장(이미 민정당 대표)은 무척 고심했고, 그 바람에 해명하러 필자가 스페인의 마드리드까지 간 일이 있다. 결국 정치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친화력이 있는 노태우 위원장을 서울올림픽 성공의 안전핀으로 생각한 사마란치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이런 내용은 사마란치의 2010년 1월 27일자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대담, ‘시대의 증언’에도 기술돼 있다.
서울올림픽은 소련에 의한 KAL기 격추사건, 미얀마에서 김현희에 의한 KAL기 폭파사건, 북한을 내세우는 소련 등 공산권의 보이콧운동, 북한에 의한 남북공동 개최주장, 이어 시작된 남북체육회담 등 무수한 난관을 딛고 냉전시대의 보이콧을 종식한 평화시 인류 최대의 종합제전이 됐다.
1887년 6월 27일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전격적으로 야당의 주장을 수용하여 대통령직선제를 발표하고 이어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후보와 격돌, 3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선거 개표 당일 밤중에 사마란치가 30분마다 필자 집으로 전화를 걸어 선거개표 진행 상태를 물어봤다. 결국 노 후보가 확실하게 우세한 상황이 되자 더 이상 전화가 오지 않았다. 집에서 내자가 잠도 안 자고 너무 하지 않느냐고 푸념할 정도였는데 그 다음날 사마란치는 “어젯밤에는 미안했다. 정치 안정이 올림픽 성공에 직결되기 때문에 혹시나 걱정이 돼 전화를 걸게 되었다”고 해명한 일화도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만큼 그때 IOC는 노태우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서울올림픽 성공의 안전핀으로 본 것이다. 서울올림픽 때 노태우 조직위원장은 이미 대통령이 되어 있었고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우리 한국민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세계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올림픽 후 그동안의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북방외교를 펼치고 소련, 중국을 비롯한 동구공산국과 문화, 경제관계를 열고 곧이어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한국은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는 서울올림픽의 구호대로 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민정당이 국회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추진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무엇보다도 88년 서울올림픽 후에 남은 이익금으로 국민체육진흥공단을 설립, 그 기금에서 발생하는 이익금으로 체육시설확충, 그리고 대한체육회 예산지원, 태릉선수촌 지원, 선수연금 지급 등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이런 조치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과의 국교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간을 내놓고’ 고르바초프를 만난 것도 유명한 이야기다. 또 1991년 9월 17일 유엔(UN) 가입을 계기로 유엔에서 연설을 한 것도 역사에 기리 남는다. 이때 김영삼 민자당 대표와 필자(체육을 대표)도 동행했다.
그리고 1991년 11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은 비핵화를 공식 선언했다. 이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각각 추진하려던 원자폭탄 개발 및 핵개발의 최종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의 핵포기 선언에 대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잘못된 처사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군부통치에서 민주화로 가는 전환점에서 88올림픽을 성공시키면서 북방외교에 성공했고 나름대로 민주화를 위해 애를 썼다. 박철언 문제로 김영삼 당대표와 의견 충돌을 빚었고, 결국 대통령 지명은 김영삼 대통령으로 가고 민자당 총재에서도 물러났다. 퇴임 후 비자금 문제가 터져 나오고 12·12 군부반란 등으로 곤욕을 치르다가 1997년 말 전두환과 함께 사면복권되었다.
보통사람, 대통령직선제, 서울올림픽, 북방외교…. 생각해 보면 정치권의 실세와 대통령 등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보통사람’답지 않은 특별한 일들을 많이도 겪었다. 역사와 정치권의 평가를 떠나 확실한 것은 너무 지나쳐 ‘물태우’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던 그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한국 스포츠의 발전과 서울올림픽의 성공개최에는 큰 힘이 되었다는 점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