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회 세계여자주니어핸드볼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연승가두를 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1일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활약하는 유은희(왼쪽) 이은비의 모습.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시작
여자 주니어 핸드볼 대표팀의 쌍두마차 유은희, 이은비가 핸드볼의 매력에 빠져든 건 언제일까. 두 선수 모두 초등학교 때부터 핸드볼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과정은 조금 달랐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이은비는 체육시간에 공놀이를 하다가 코치로부터 ‘핸드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재미삼아 시작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경기를 치를수록 몰라보게 실력이 향상되던 이은비는 탁월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코치의 눈이 정확했던 셈이다. 반면 평소 운동을 좋아하던 유은희는 제 발로 핸드볼 코치를 찾아갔다. “핸드볼, 해보고 싶어요.”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핸드볼을 배워보고 싶었단다. 내성적인 그의 성격을 감안할 때 이는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으리라.
핸드볼을 막 배우기 시작할 무렵, 두 선수 모두 가족의 반대에 부딪히게 됐다. 한때 핸드볼 선수로 활약한 이은비의 아버지는 딸이 본인과 똑같은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핸드볼 외에 다른 길을 생각해보라고 권유하던 아버지는 시합에 나가 맹활약을 펼치는 딸의 모습을 보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은비는 “내가 하고 싶어 하니 그냥 못이기는 척 인정해주신 것 같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 않나”라며 미소를 지었다. 유은희 역시 1년간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오히려 배구 선수였던 어머니가 딸이 원하는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묵묵히 딸의 시합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결국 유은희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 핸드볼 차기 스타 두 자리가 예약되는 순간이었다.
운명
그렇다면 두 선수가 ‘핸드볼 선수야 말로 내가 가야할 길’이라 느낀 순간은 언제였을까. 유은희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핸드볼 선수가 내 길이라 느꼈다. 그동안 운동만 하느라 공부를 해 놓은 것도 아니었고, 핸드볼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반면 이은비는 고3 때 비로소 결정을 내렸다. “중학교 때까진 그냥 즐겁게 핸드볼을 할 뿐이었다. 고3이 돼서야 핸드볼 선수가 될 것이냐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마침내 확신이 생겼고, 이렇게 코트 위에 서게 됐다.”
혹시 핸드볼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느냐는 질문을 조심스레 건넸다. 기자의 물음에 유은희는 지난해 부상을 떠올렸다. “2009년 무릎 부상 이후 복귀했을 때 생각만큼 몸이 움직이지 않아 좌절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핸드볼을 포기해야 하나’란 생각을 해봤다. 선배들과 선생님들이 ‘괜찮다, 괜찮다’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분들의 따뜻한 격려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이은비는 “바로 지금”이란 뜻밖의 답변을 내놓았다. 가장 잘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그가 포기를 떠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올해 들어 갑자기 ‘포기’란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몸이 아픈데 쉬지 못하고 계속 달려오다 보니 지친 듯하다. 다른 언니들도 한 번씩 이렇게 고비가 찾아왔다더라. 특히 실업팀 2년차 핸드볼 선수라면 한번쯤 이런 고민을 거치게 된다면서 이런 저런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 덕분에 시합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됐다.”
▲ 180㎝ 장신의 유은희(왼쪽)와 162㎝의 이은비. 둘은 신장 차이만큼이나 성격과 주특기에서도 확연히 다른 개성을 보여줬다. |
핸드볼 경기는 골키퍼를 제외한 6명의 선수들이 쉴 새 없이 위치를 변화시키며 상대팀 선수들의 타이밍을 빼앗아야 한다. 공격 기회에서 찾아오는 찬스를 정확하게 골로 연결시켜야 하는 만큼 엄청난 순간 집중력을 요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부상의 위험도 더욱 커진다. 실제로 유은희, 이은비 두 선수도 경기 중 수차례 넘어지길 반복했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 코트 위로 다시 달려나가곤 했다. 경기 직후,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이구동성으로 “성한 곳이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특히 유은희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매 경기 통증을 호소해왔다. 작년 베이징올림픽 때는 무릎 부상이 완쾌되지 않아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발목이 안 좋았다. 크게 다친 건 아닌데 유독 양쪽 발목의 통증이 사라지지 않더라. 트레이너를 통해 치료 받으며 통증을 완화시키고 있다.” 이은비 역시 허리와 발목 통증을 호소했다. 고3 때 허리 디스크 증세가 심해진 이래로 지금까지 낫질 않고 있다고. “심할 땐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잔다. 요즘은 무릎 관절까지 안 좋아져서 걱정이다. 쉬어줘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전혀 없다.”
실제로 두 사람은 경기 후 인터뷰 직전까지 병원에서 링거를 맞았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선수들은 경기 직후 이렇게 링거를 맞으며 체력을 회복한단다. 대표팀의 조별리그 5전 전승의 놀라운 성적은 선수들의 ‘링거 투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장점
분위기를 바꿔 서로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은비는 “언니는 중거리 슛이 뛰어나다. 공을 다룰 수 있는 공간이 넓어 자유자재로 다양한 슛을 구사할 수 있다. 난 몸이 작다 보니 1:1 돌파를 주로 하는 편인데, 언니처럼 강한 롱슛을 키우고 싶다”며 입을 열었다. 유은희는 지난 1월 막을 내린 핸드볼 큰 잔치에서 득점왕에 오르며 중거리 슛의 위력을 확인시켜줬다. 그는 고2 때 성인 대표팀에 선발될 만큼 차세대 왼손 거포로 주목받고 있다. 유은희는 “난 몸집이 크다보니 동작이 느린 편이다. 은비는 빠른 스피드로 상대 선수들의 틈을 쉽게 돌파한다. 슛을 할 때 타이밍이 좋다”며 칭찬에 화답했다. 이은비는 지난해 핸드볼큰잔치에서 신인상을 차지하는 등 빼어난 득점력을 자랑하는 선수다. 성인 대표팀에서 포지션을 갑작스레 윙으로 바꾸고도 뛰어난 골 감각을 선보이며 모두를 놀라게 한 바 있다.
진로
해외 진출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이은비는 일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외국에 진출해 다른 나라의 운동 문화, 비법 등을 배우는 시간을 갖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다녀서인지 일본이 가깝고 편하고 마음에 든다.” 유은희는 국내에서 더 활약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아직은 한국에서 더 뛰고 싶다. 나중에 유럽에 진출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유럽 선수들의 경기 운영 방식이 한국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배워보고 싶다.” 그러나 둘은 “지금은 세계선수권에 집중해야 할 때”라며 “우승을 목표로 매 경기 마지막 1초까지 후회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백상서 감독이 이 둘에게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그는 “중거리 슛이 장기인 은희는 수비까지 책임지며 팀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100% 이상 해주고 있다. 은비 역시 찬스 메이커로 본인이 슛을 성공시키는 것은 물론 공간을 활용해 어시스트까지 잘해내고 있다”며 칭찬을 거듭했다. 한국 대표팀이 후반 들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고기를 많이 먹일 생각이다”며 재치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백 감독은 “강팀이든 약팀이든 우승을 목표로 매 경기 최선을 다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국 핸드볼의 미래, 유은희ㆍ이은비 두 선수의 화려한 비상을 기대해본다.
광주=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