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29일 밤(한국시간)에 열린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지소연이 수비수 사이로 돌파하고 있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 5 대 1로 패해 결승 문턱에서 아쉽게 멈춰섰다.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
#2002년 새긴 ‘승리 DNA’
한국 축구가 20세 여자월드컵에 출전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 2004년 태국에서 열린 대회에 출전했지만 1승2패로 아쉽게 조별리그 탈락에 그쳤다. 이후 열린 2006년 러시아 대회와 2008년 칠레 대회에는 아예 아시아 지역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대회가 다가올 때마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이번 대표팀은 특히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선수들 대부분이 해외 클럽에서 러브 콜을 받고 있을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파주NFC에서 이들의 소집 훈련을 지켜본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등 축구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남자 중학교 및 고교 팀과의 연습경기를 봤는데 실력이 거의 대등하더라”며 혀를 내둘렀다. 윤종석 SBS스포츠 해설위원은 “신체조건을 비롯한 체격이나 몸의 밸런스, 조직력 등 모든 면에서 이전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반도를 붉게 물들였던 2002한일월드컵이 이들의 선택과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빠(?)들의 연이은 선전을 지켜보면서 운동을 좋아했던 소녀들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웠고, 축구에 인생을 걸 수 있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춥고 배가 고파’ 축구를 택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기가 문제였을 뿐이다. 축구인들은 2002년 월드컵을 보고 자란 여자 선수들에게 ‘3세대’란 칭호를 붙여줬다. 여자축구가 본격적으로 태동했던 시기인 9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선수들은 1세대로서 주로 육상이나 역도, 투창 등 타 종목에서 활동하다가 지도자들의 권유로 축구화를 신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활동한 2세대 선수들은 주로 1차 성장기가 끝난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선수 선발에는 문제가 많았다. 체격이나 신체적인 면에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축구를 할 때 사용하는 근육이 다른 근육에 비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것. 유소년기부터 단계를 차근차근 밟았던 독일 미국 등 서구권에 비해 아무래도 실력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대한축구협회는 문제점을 조기에 발견했고, 한국 축구(남자의 경우)의 황금기를 보고 자랐던 3세대부터는 비교적 좋은 지원을 할 수 있었다. 독일 등지로 떠나 담금질하는 해외 전지훈련은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스스로가 좋아서 즐기는 축구의 힘을 여실히 증명한 셈이다. “매일 빵과 우유를 줬기 때문에 축구를 했다”는 안정환(다롄스더)과는 사뭇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란 남자축구의 신세대 선두주자인 이청용(볼턴) 박주영(AS모나코) 기성용(셀틱FC)을 비롯해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축구협회의 선택도 주효했다. 한국은 2008년 처음 시작된 17세 이하 여자 청소년월드컵에서 8강에 오른 뒤 2009년에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사상 첫 우승을 일구며 더욱 밝은 내일을 예고했다.
#선수들 꿰뚫는 벤치의 힘
모두가 필드를 누비는 선수들을 주목한다. 지소연(한양여대)과 이현영(여주대)이 대표적인 케이스. 이들을 향해 선진 여자축구의 중심이라는 미국과 독일 클럽들이 손짓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시선을 벤치에 돌려도 좋을 듯싶다.
여자축구의 쾌거에는 최인철 감독(38)의 힘이 크다. 전동초등학교와 동북중학교 및 고교를 거쳐 건국대를 나온 최 감독은 놀랍게도 변변한 프로 경력이 없다. 결핵 탓에 일찌감치 현역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다른 지도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빨리 지휘봉을 잡을 수 있었던 것. 98년부터 동명초등학교에서 남자 유소년들을 가르친 최 감독은 2000년 여자 축구부를 따로 창단했고 이후 오주중(2001~2004년), 동산정보고(2004~2008년)를 거치며 ‘3세대’들을 키웠다. 월드컵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문소리(울산과학대) 정혜인(현대제철) 김혜리 김나래(이상 여주대) 등이 최 감독이 키워낸 소녀들이다.
최 감독은 2008년 8월 19세 이하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며 축구협회 전임 지도자가 됐다. 당연한 얘기지만 제자들의 모든 걸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생리주기까지 알고 선수들의 훈련량을 조절해줄 정도로 세밀한 지도력을 발휘한다. 뿐만 아니라 컨디션 및 생체리듬과 심리상태 등도 두루 파악하고 있다. 한국이 대회를 분석하는 FIFA 테크니컬 팀으로부터 ‘최상의 밸런스를 자랑하는 국가’ ‘가장 완벽한 포지션 조화를 이룬 국가’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하지만 최 감독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연구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대표팀을 이끄는 동안에도 계속됐다. A~C급 지도자 코스는 물론이고 지도자를 육성할 수 있는 3급 보조강사 및 2급 보조강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심지어 선수들에게 미팅 때 보여주는 비디오 영상자료까지 직접 제작할 정도.
축구협회 김동기 기술연구팀장은 “최 감독은 공부를 대단히 많이 하는 지도자로 철두철미한 축구 철학과 지도법으로 선수들의 모든 것을 세세히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회를 앞두고 출국에 앞서 “우리 목표는 우승”이라고 최 감독이 출사표를 던졌을 때 모든 이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최 감독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주변에서는 “아무리 못해도 조별리그는 통과할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 멕시코를 3 대 1로 이겨 4강에 오른 20세 이하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응원단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
선전의 비결은 철저한 세대교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 2002한일월드컵 4강 신화와 2003년 여자대표팀의 첫 월드컵 출전을 계기로 학원 축구팀이 조금씩 늘어났고 협회 차원에서의 대표 상비군 시스템이 나름 역할을 했다.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2002년 월드컵 잉여금이 큰 몫을 했다. 팀 창단은커녕,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던 여자 축구계는 협회로부터 산하 연맹으로 분배된 잉여금으로 본격적인 풀뿌리 축구 발전을 계획하고 육성할 수 있었다.
그 같은 노력의 결과 탄생한 선수가 예성여고를 이끌고 있는 ‘왕년의 스타’ 이지은. 국제무대에만 서면 번번이 주저앉던 한국 여자축구는 이지은의 탄생과 함께 본격적인 발전을 꿈꾸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여자축구부가 탄생한 것도 이 즈음이다.
유소년 대표팀 상비군 제도는 2003년 여자월드컵 출전에서 시작됐다. 12세, 13세, 16세 이하로 구분해 연령별 대표팀을 선발했고, 여자축구 전임강사까지 두면서 조금씩 발전을 거듭했다. 안종관 전 여자대표팀 감독은 “현재 20세 이하 대표팀에서 뛰는 선수들 모두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줄곧 축구를 했던 선수들”이라며 “기본기가 나름대로 튼실하게 갖춰지다 보니 최상의 조직력을 발휘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서글픈 자화상도 함께 존재한다. 워낙 부족한 팀 숫자로 인해 선수층이 지나치게 얇다는 의미. 이는 역설이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협회가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는 공식 자료에 따르면 올해 5월 31일을 기준으로 등록된 여자 선수들은 모두 1404명에 불과하다. 한국의 4강 상대였던 독일축구협회에 등록된 105만 301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다.
지난해 초 야심차게 출범한 최초의 여자축구 실업리그인 WK리그에 속한 팀도 고작 7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팀 창단만 선언하고 아직 리그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부천시설관리공단을 포함한 숫자다. 여기에 한 팀은 국군체육부대 차원에서 하사관 계급의 선수들로 이뤄진 상무를 포함했으니 말 다한 셈.
학원축구로 시선을 돌리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등록된 초등학교 팀은 18개, 중학교 17개, 고등학교 16개, 대학교 6개이고, 유소년 클럽은 1개다. 하지만 새로운 팀 창단은 정체된 상태. 심지어 해체 수준까지 다다른 팀도 여럿이라고 여자축구인들은 귀띔한다.
익명을 요구한 여자축구인 A 씨는 “서울에 있는 팀이라곤 송파초등학교 한 팀에 불과하다. 미국처럼 ‘사커 맘’이 탄생하려면 자녀들의 진로가 확실히 보장돼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자녀들이 축구를 좋아해도 딸들에게 축구를 시키려는 분위기는 극히 드물다. 선생님(지도자)들이 운동에 소질 있는 선수들을 억지로 끌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유니폼 값, 전지훈련비, 등록금 감면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줘도 미래가 불투명한 탓에 꺼린다”며 불편하고 어두운 현실을 토로했다.
또 다른 축구인 B 씨는 WK리그나 실업팀을 늘리는 것 못지않게 학원 축구의 활성화를 요구했다. “4년제 대학들이 여자 팀을 만들어줘야 한다. 혹여 선수로서는 실패하더라도 스포츠 마케팅과 에이전트, 비디오 분석, 심판 등 다양한 진로를 모색할 수 있도록 해야 여학생들과 부모들이 축구에 보다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