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BO 슈퍼페더급 챔피언 벨트를 반납하고 메이저 대회인 IBF에 도전하는 김지훈. 연합뉴스 |
먼저 흥미로운 사실부터 하나 공개. 지난달 고 배기석은 슈퍼플라이급 한국타이틀매치에서 정진기(20)라는 선수에게 TKO를 당한 후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척박한 복싱환경에서 생업과 복싱 두 마리 토끼를 쫓던 젊은 복서의 죽음에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데 이 정진기가 바로 일산주엽체육관 소속이고, 또 김지훈의 훈련을 돕는 직속 후배다. 상대 선수의 갑작스런 죽음에 정진기는 큰 충격을 받고 최근 운동을 거의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신문>의 취재 결과 김형열 관장의 김지훈 뒷바라지, 그리고 복싱에 대한 열정은 거의 감동적인 수준이었다. 기존의 다른 복싱체육관과는 확실히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김형열 관장은 한국프로복싱계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기도 한다. 시기심의 발로인지 기존 유명체육관의 복싱지도자들은 시쳇말로 ‘권투 물을 먹지 않았다’고 수군대곤 한다.
하지만 김 관장은 확실히 권투 물을 먹었다. 오래 전에, 그리고 조금 먹었을 뿐이다. 학창시절 아마추어 복서로 지역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한 것이다. 김 관장은 프로를 거치지 않았고, 링을 오래 떠나 있었다. 그러나 복싱에 대한 열정을 잊지 못해 90년대 말 일산에 체육관을 열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복싱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주엽체육관은 특이하다. 보통 복싱체육관은 선수도 선수지만 운영을 위해 일반 관원을 관리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김 관장은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는 일반 관원을 절대 받지 않는다. 이 시간만큼은 김지훈, 정진기 등 프로페셔널을 가르치는 데 매진하는 것이다.
김지훈의 경우는 훈련 때 집에 가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김 관장과 함께 붙어 있다. 훈련시간만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자세, 음식 섭취 등 모든 것을 김 관장이 관리한다. 김지훈 스스로 “직업도 복싱, 취미도 복싱, 노는 것도 복싱”이라고 말할 정도다. 김 관장은 해외원정경기 때는 식사와 간식은 물론 물 한 모금까지 한국에서 미리 가져간 것으로 관리한다. 한국 복싱 사상 처음인 미국 원정 4연승 등 김지훈의 해외원정 신화는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김지훈과 그를 키운 김형열 관장. |
이러니 김형열 관장은 김지훈에게 단순히 트레이너를 넘어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됐다. 김지훈은 “나와 한 몸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했다. 한국권투위원회의 한 관계자도 “김지훈도 대단하지만, 알고 보면 김형열 관장의 헌신적인 후원은 권투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설명했다.
지난 4일 미국에 도착한 김형열 관장은 전화 통화에서 “이번 타이틀매치가 워낙에 중요해 모든 신경을 경기에만 집중하고 있다. 나에 대해서는 (김)지훈이가 챔피언벨트를 따낸 후 자세히 소개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2005년 11월 18세의 김지훈은 10살 위의 한 고참선수와 중요한 경기를 치렀다. 경기 전 계체량 때 이 고참선수가 김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야, 연습 많이 했냐?”고 슬쩍 김지훈을 건드렸다. 기분이 언짢아도 그냥 넘어가는 게 보통인데 김지훈은 대놓고 “에이, XX 그런 거 왜 물어봐”라고 당돌하게 받아쳤다. 김지훈은 복싱에 관한 한 그런 식으로 무시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김지훈은 야누스 같다. 평소에는 나무랄 게 없는데 복싱과 관련되면 거칠어진다. 그래서 처음에는 ‘매너가 나쁘다’는 오해도 곧잘 받았다.
복싱 스타일도 그렇다. 서너 체급 위라는 평가를 받는 묵직한 펀치를 앞세워 아주 공격적인 복싱을 구사한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역습에 곧잘 다운을 당하기도 한다. 한국권투위원회의 황현철 홍보이사는 “김지훈의 경기는 매 경기가 드라마다. 그러니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술적으로 보면 다소 위험한 스타일이지만 워낙에 운동을 많이 하고, 링에 오르면 죽기살기로 싸우는 까닭에 기록적인 연승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지훈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링은 다 똑같다. 어차피 KO로 이기면 판정 불이익도 의미가 없다. 광복절에 꼭 세계챔피언벨트를 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에 김지훈이 IBF 페더급 챔피언이 되면 2007년 7월 지인진이 K-1 진출을 위해 WBC 페더급 챔피언벨트를 반납한 후 3년여 만에 한국은 노챔프국에서 벗어난다. 물론 김지훈은 지난해 9월 국제복싱기구(IBO) 슈퍼페더급 챔피언에 올랐지만 IBO가 마이너기구로 국내에서는 공인받지 못한다. 그래서 김지훈은 과감히 이 타이틀을 반납하고 메이저인 IBF에 도전하는 것이다.
참고로 한국은 WBA, WBC를 양대기구로 평가하지만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는 중미국가들이 장악한 WBA, WBC 대신 IBF나 WBO의 경기가 더 많을 정도로 권위가 높다. 보통 IBF까지 포함하면, 메이저 3대 기구, WBO를 더하면 4대기구라고 한다. 김지훈이 IBF챔피언이 돼도 홍수환, 박종팔, 문성길, 이열우, 김용강처럼 ‘두 체급 석권’으로 공인받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