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는 데에는 당시 복역 중이었던 이부영 전 의원을 비롯해 안유 보안과장, 함세웅 신부 등의 역할이 컸다. 사진은 1994년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사진출처=서울신문 |
박정희 정권 때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 씨도 순화교육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재임 중 윤필용 사건과 하나회 해체 시도로 신군부와 대립각을 세웠던 그는 80년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영등포교도소에서 2년간 지내며 네 차례에 걸쳐 재소자특별순화교육을 받았다. 강 씨는 당시 54세라는 적잖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인 특유의 강단으로 힘든 훈련을 이겨냈지만 나중에는 체력적 한계를 토로하며 무척 힘들어했다고 한다.
1981년 4월 18일 입소한 강 씨는 낮에는 원예일을 하고 밤이면 0.71평 크기의 독거실에서 생활했는데 모포와 수건, 속옷 등을 반듯하게 개어놓고 벽은 흰 도화지로 도배하는 등 방 정리정돈이 내무반 수준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강 씨가 직원들에게 ‘박정희교 신자’라고 불렸다는 사실이다. 황 씨는 “강 씨는 주간지에서 오려 낸 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붙여놓고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했다. 우리가 10·26 얘기를 꺼내면 무척 싫어했으며 ‘각하’에 대한 충정을 종종 드러냈다”고 회고했다.
영등포교도소 1동은 주로 정치범들이 거쳐갔다. 긴급조치 1호로 구속된 백기완 씨, 민청학련 사건의 김지하 시인, 백영서 현 연세대 교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양성우 시인, 함세웅 신부, 박형규 목사, 김동완 목사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김지하 시인은 인쇄공장에 출역하며 한 달에 300원가량 돈을 받았는데 그 시절을 ‘지옥’이라는 시를 통해 묘사하기도 했다.
황 씨는 검거 직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겼던 탈주범 지강헌에 대해서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1988년 10월 8일 토요일 아침 영등포교도소에서 재소자 12명을 태운 차량이 공주교도소로 이송 중 지강헌을 비롯한 재소자들이 호송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실탄이 든 권총 등을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지 씨는 ‘전두환 동생이 70억 원을 횡령하고도 징역 7년을 선고받은 것에 비해 자신은 556만 원 절도에 징역 7년과 보호감호 10년 등 도합 17년을 선고받은 것에 불만을 품고 탈주를 감행했다고 밝혔다. 저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그의 절규와 관련해 “썩을대로 썩은 시대의 양면성을 드러낸 부끄러운 사건”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씨와 김근태 전 의원에 대한 얘기도 있다. 황 씨가 ‘이근안’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85년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 전 의원 때문이었다. 김 전 의원은 미농지 130여 장에 빽빽하게 글을 쓰고 그림까지 그려 문서를 작성했는데 그것을 본 직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김 전 의원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근안에게 고문당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고문의 정황 입증을 위해 욕조와 매트리스, 타일바닥, 칠성판 등 고문도구 등의 삽화까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황 씨는 김 전 의원에 대해 “당시 만 39세였던 김근태는 똑바로 서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매우 나빴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치아가 흔들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황 씨가 이근안을 본 것은 2000년 10월 19일이었다. 그는 당시 영등포교도소로 이송된 이근안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그를 대면하자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첫인상은 수더분했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곧추선 허리선이 예사 무지렁이는 아닌 듯 보였고 솥뚜껑만 한 손은 괴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주특기인 관절뽑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웬만한 사람은 악수 만으로도 간단하게 제압했다. 그는 두부공장에서 종종 차력술 시범을 했는데 사과를 한 손에 쥐고 으깨버리는 가공할 악력을 선보여 관중을 놀라게 했다.”
이 씨는 자신에게 중형이 떨어진 것에 몹시 분개했다고 한다. 그는 동료들 앞에서 자신이 좌익들로부터 나라를 구했음을 내세우곤 했는데 “그동안 잡은 간첩이 수십 명은 된다. 엿장수로 변장하고 빨갱이 집 주변을 감시했다. 한솥밥 먹던 사람들이 돌봐줘서 도피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동생 경환 씨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1989년 6월 21일 육척거구에 머리는 훌러덩 벗겨졌지만 어깨가 떡 벌어지고 혈기왕성한 사내가 입소한다. 새마을운동본부 회장으로 있으면서 공금 70억 원을 횡령하는 등의 비리를 저지른 전경환이었다.
전 씨가 교도소에 오기 전 직원들은 “근무자 외에는 원예작업장에 접근하지 말 것이며 타 재소자가 해코지할 우려가 있으므로 계호에 각별히 신경쓰라”는 특별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전 씨는 원예에 출역하며 교도소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치안본부장과 서울시장을 역임한 엄보석 씨와 한국해운 사장이었던 안성직 씨를 만났다고 한다.
황 씨는 이들에 얽힌 에피소드도 익살맞게 기록하고 있다. “전 씨는 원예에 나가 빈둥빈둥 놀기 일쑤다. 놀기로 치면 엄 치안본부장이 선배다. 5공 정권 때 치안총수와 서울시장을 오래 하며 전두환 장군의 신임을 받은 터라 교도소에 와서도 계급이 반쯤 남아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하며 음식을 나눠먹고 있을 때 유수의 해운회사 최고경영자 출신인 안성직은 꽃에 물주는 일부터 모종심기, 화분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어느날 화가 치민 안성직이 설거지통을 걷어차며 ‘전 회장, 엄 부장, 정말 이러기요. 나도 경기고, 서울대 나온 엘리트외다. 나이로 봐도 전 씨 당신보다 훨씬 위일 텐데 내가 당신들 설거지나 하고 있을 군번입니까’라고 불같이 화를 냈다.”
전 씨의 ‘전담 때밀이 소년’에 대한 얘기도 재미있다. “10사에는 4동 청소부인 소년수 병석이가 있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목욕탕에 들어간 전 씨와 욕실청소를 하고 있던 병석이가 마주쳤다. 물속에 들어가 몸을 불리는 전 씨에게 병석이가 ‘회장님, 등 밀어드릴까요’라고 하자 전 씨는 ‘그래, 등 민 지가 오래돼서 목욕해도 시원하지 않아. 한번 문질러 보렴’이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 병석이는 회장님 전용 때밀이가 돼버렸다. 10사에 가면 병석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그 넓은 등짝을 밀고 있었다.”
전 씨는 구속된 지 3년 2개월여 만에 가석방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하지만 전 씨가 출소한 지 4년 6개월 후인 1995년 12월 3일 전두환 전 대통령도 내란죄로 기소돼 안양교도소에 수감되고 만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킨 ‘똥별’들이 1997년 5월 2일 영등포교도소에 들어서는 얘기도 있다. 황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그날 이곳에 입소한 사람은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 그리고 보안사 영관급 장교다. 건너 바로 옆집에도 비서실장을 역임한 ‘의리의 사나이’ 장세동 대령 등 여러 별들이 장기투숙하고 있다. 그날 밤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땅에도 별, 하늘에도 별. 그야말로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황 씨는 별들의 교도소 보직과 생활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국방장관은 꽃 기르는 원예로 가고, 육군참모총장은 분류과 청소부로, 12·12 당시 보안사 대령으로 근무했던 이는 교무과 청소부가 됐다. 구치소 수감 중 몸이 아파 구속집행정지로 출소한 수도군단장은 기간만료로 재구속됐다. 그는 수염이 댓자나 자라고 병색이 완연한 낯빛으로 병원에 입원한 다음 사회 병원에 다니며 진료를 받았다. 얼마 후 그는 형집행정지를 받아 출소했는데 놀랍게도 출소 다음날 깔끔하게 이발과 면도를 하고 양복을 차려입고 안양교도소에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면회 가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됐다.”
이부영 전 의원에 대한 숨겨진 일화도 흥미롭다. 이 전 의원은 87년 민통련 사무처장 일을 보다가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영등포교도소에 구금돼 있었는데 박종철을 고문하던 고문경관 조한경과 강진규도 그의 옆방에 수감되어 있었다. 상부에서 박종철 사망의 책임을 두 사람에게 덮어씌우려는 조짐이 보이자 기자 출신인 이 전 의원은 기자정신을 발휘해 이들을 설득하는 일에 나섰고, 결국 교도소 안에서 특종을 터뜨리게 된다. 황 씨는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 전 의원이 어떻게 함세웅 신부에게 관련 사실을 적은 편지를 전달하게 됐는지에 관해서도 처음으로 털어놨다. 고문에 연관된 인사들의 신원을 파악한 안유 당시 보안계장이 이 전 의원에게 그 사실을 전하면서 은폐될 뻔한 사건이 알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황 씨는 “이부영을 비롯해 안유, 한재동, 전병용, 김정남, 함세웅 등 여섯 사람의 손에서 박 군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으며 이 전 의원이 천신만고 끝에 작성한 비밀문건은 여러 사람을 거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됐다. 이는 결국 6월항쟁의 촉매제로 작용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