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주영의 간단한 이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강원도 통천에서 미곡상회를 하다가 서울로 와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해 1946년 4월 현대자동차 공업사를 설립했고, 1950년 1월에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 공업사를 합병, 현대건설을 설립했다. 그리고 1971년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며 입지전적인 인생을 살았다.
정주영 회장을 처음 접한 것은 필자가 청와대에 근무할 때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정주영 회장의 현대가 점점 두각을 나타내고 청와대도 많이 의존하기 시작할 때였다. 앞서 1961년 5·16군사혁명 직후 부정축재자를 조사할 때도 현대는 포함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당시 청와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성공했고, 울산 조선소도 현대에 맡겼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울산의 현대조선소가 배를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당당히 세계의 조선대국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현대가 벌인 중동에서의 건설 사업도 외화벌이에 큰 몫을 했다. 정주영 회장에게 “현대그룹의 주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잠깐 생각하더니 “건설”이라고 답했다는 얘기를 옆에서 들은 바 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권을 잡기 얼마 전 태권도에 관계가 있던 케냐의 카리우키(Kariuki) 국무장관이 서울에 오게 돼 필자가 안내해 광화문의 현대회장실에서 정주영 회장을 만났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올림픽유치전이 시작되어 롯데호텔에서 이규호, 정주영, 이원홍, 이선기, 박영수, 필자 등이 자주 유치 전략회의를 하게 됐고, 곧이어 본격적인 유치활동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정주영 회장은 국제 스포츠계에는 낯선 인물이었지만 어려운 한국의 경제력을 보장한다는 안전핀 역할을 맡게 됐다. 당연히 유치활동에서 정 회장은 필자의 인맥에 의존했다.
마침 IOC 위원 중에서 노르웨이의 선주회장을 지낸 스타우보(Staubo) 위원이 올림픽 유치준비 상황을 점검하러 와서 같이 처음으로 울산 현대조선소를 방문, 울산 영빈관에서 1박을 했다. 정 회장이 얼마나 잘 예우했던지 이때부터 스타우보 위원은 서울에 대한 절대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바덴바덴에서는 아예 정주영 회장과 함께 움직였다. 그만큼 정 회장은 국내외 인물을 가리지 않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그 방법이 경제적 지원이든, 인간적인 카리스마이든 말이다.
실제 정 회장은 88서울올림픽 유치단의 ‘물주’ 노릇을 톡톡히 했다. 서울유치단이 자금이 없자 정 회장은 그때 돈 6억 원을 유치위원회에 빌려줘 활동에 충당했는데 서울유치에 성공한 후에 그 돈을 돌려받지 않고 기증해 버렸다. 바덴바덴에서도 자금이 달리자 10만 달러를 프랑크푸르트 현대지사에서 가져와서 충당했다. 이때 한국은 외국사람들에게 돌릴 만한 선물도 없었고, 반면 일본은 세이코(SEIKO) 시계 같은 것을 돌리곤 했다. 정주영 회장이 필자와 상의하여 동대문시장 등에서 아직 조잡했지만 연수정 브로치 등을 사서 가지고 갔다. 바덴바덴 IOC회의에 가기 전에 정 회장은 영국을 들러 룩셈부르크를 경유했다. 필자는 화란(네덜란드), 벨지움(벨기에)을 거쳐 룩셈부르크에서 정 회장과 합류했다.
바덴바덴에서 정주영 회장은 필자에게 “나는 한국의 개최 능력을 뒷받침하는 상징으로 움직이니까 무조건 IOC 위원들을 만나게 끌고 다니라”고 해 아프리카, 남미, 구라파 IOC 위원, 그리고 사마란치의 중요 참모인 아디다스의 다슬러(Dassler) 회장들을 초청해서 저녁식사를 하는 등 많은 접촉을 했다.
한국의 유치활동이 늘 그렇듯이 당시도 사람은 많이 와서 몰려다니는데 일하는 사람은 적었고 능력도 없었다. 하루는 정 회장이 바덴바덴 시내공원에 가자고 해 따라갔다. 이때 이병규 비서(지금의 문화일보 사장)도 있었다. 정주영 회장 말이 ‘김 회장은 가만히 보니 일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혼자 뛰어다니는 것 같은데 기분 나쁘겠지만 부탁이니 자기를 끌고 다니고 국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달라’고 했다. 서울에 가면 그 노고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이야기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때 사람을 다루는 데 더없이 노련한 정주영 회장의 큰 인품을 다시 보았다.
9월 30일 저녁 서울이 기적적으로 나고야를 꺾고 52-27로 대승, 88올림픽 개최권을 따내자 국내외가 열광했다. 바덴바덴에서도 스케줄에 따라 회의장이 있는 CASINO 2층에서 개최도시에 의한 축하 리셉션이 있었다. 이때 정주영 회장이 기뻐서 체면도 생각지 않은 채 혼자 덩실덩실 한국의 시골춤을 추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대표단은 곧 조중훈 대한항공 사장이 특별히 불러온 B747로(이때 파리 노선은 DC9였다) 서울로 귀환,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청와대로 직행했다.
정말이지 인상적인 것은 정주영 회장이 떨어진 양말에 오래돼 헌 손가방을 들고 다니던 일이다. 어떤 재벌처럼 구라파 왕족이나 되는 양 특권계급의 인상을 풍기지 않는 데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정 회장은 그냥 시골 할아버지로 일만 하는 분이었다.
곧 아무것도 없고 가난했던 서울은 올림픽준비에 착수했고 서울에 많은 IOC 위원과 국제스포츠연맹 회장을 불러들였다. 아무 것도 없을 때라 연락만 하면 정 회장이 차를 내주고 호텔 숙박료와 연회비를 대주었다. 보이지 않게 생색도 안 내면서 후원을 한 것이다.
서울올림픽은 조직위원회(위원장 김용식, 사무총장 이원경)가 생겨 청와대의 지시와 지원 아래 준비를 시작했고, 정주영 회장은 부위원장 중 한 사람이 됐다. 그리고 곧이어 정 회장은 대한체육회 및 KOC 위원장이 되었는데 모두들 빈약한 체육회의 재정을 위해 돈이나 많이 내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취임 직후 “나는 돈만 내는 체육회장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일본말로 ‘가오(かお·얼굴 체면)가 아니다’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한국선수단을 이끌고 갔다. 워낙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다소 체육회장 자리가 안 맞는 감이 들었기도 했지만 정 회장은 주어진 형편대로 체육회장직을 묵묵히 수행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는 정 회장과 본부 호텔인 브로드무어(Broadmoor) 호텔에서 함께 묶었는데 가끔 개인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건설공사를 딸 때에 실력 있는 왕자들 통해 로비하던 비화를 들려주곤 했다. 그런데 그 규모와 큰 씀씀이에 놀란 기억이 있다. 예컨대 한번은 왕자비를 위해 대저택을 지어준 다음, 한참 후에 가 봤더니 왕자비는 온데간데없고 다른 여성이 왕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는 내용들이다.
정 회장이 체육회장을 맡은 LA올림픽에서 한국은 금6, 은7, 동6으로 사상 처음으로 세계 10위를 차지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선수단 카퍼레이드에는 정주영 회장은 빠지고 이영호 체육장관이 유니폼을 입고 얼굴마담으로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곧이어 정 회장은 대한체육회장을 노태우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에게 넘기고 사업에 전념했다.
이때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늘 서울에 오면 정 회장의 안부를 묻곤 했다. 사마란치는 정 회장도 서울올림픽의 버팀목 중 하나로 깊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라져버리니 의아심을 가진 것 같다. 어쨌든 정 회장은 그렇게 해서 올림픽 준비에서는 완전히 물러서게 됐다. 그리고 정 회장이 경영을 주도한 현대는 이후 조선, 건설뿐 아니고 전자, 신문, 백화점, 병원 분야까지 세계로 뻗어나갔다.
정주영 회장은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또 그해 12월에는 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김영삼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셨다. 그는 경제를 하면서 정치판을 보니 실망스러워 직접 복지국가를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 경제인이 정치에 뛰어들어 실패한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를 예로 들며 정치에 발을 담그지 말고 존경받는 경제인으로 남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1998년 2월 일본 나가노동계올림픽 전에 정주영 회장 생각이 나서 알아보았더니 체육과 관련해서 한국 정부가 아무런 상훈을 주지 않은 것으로 듣고 놀랐다. 상훈이란 그냥 누가 안 챙기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마침 필자도 IOC 상훈의원이었다. 사마란치에게 정 회장의 공적서를 필자가 만들어 건의했더니 기꺼이 동의하여 위원회를 통과시켰다. 마침 일본 나가노동계올림픽이 개최 예정이라 정주영 회장을 나가노동계올림픽으로 초청했다. 정 회장은 정몽구, 정몽헌 회장이 인솔하는 현대가족들을 버스를 대절하여 도쿄에서 나가노로 와서 올림픽 훈장을 전수받았다. 곧이어 본부호텔인 고쿠사이21의 사마란치 스위트룸에서 축하오찬을 했는데 방이 작다 보니 아무리 애를 써도 식탁에 12명밖에 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주영회장 일행 11명만 초대되었다. 어쨌든 필자나 사마란치는 존경하는 거인에게 영광을 드리고 싶었고 정 회장도 무척 흐뭇해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때 이미 그 전하고는 다르게 정 회장이 무척 쇠약해져 있음을 느꼈다.
2001년 정 회장은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정몽구 회장이 체육회로 필자를 방문했다. 장례를 체육회장으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체육회장으로 정성껏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후 사정이 생겨 가족장으로 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주영 회장은 그의 저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가 말해주듯이 한국의 현대사와 한국의 산업화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체육에 있어서는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은 또 한 명의 훌륭한 체육회장이었다. 비록 그를 체육회장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말이다.
시골 할아버지 같은 친숙한 모습의 아산 정주영은 한국사에 영원히 기억될 만한 진정한 거인이라고 생각된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