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에 매물로 나온 한국투자증권과 대한투자증권(오른쪽) 건물. 우태윤 기자 | ||
서울시내 소재 빌딩들이 갑자기 매물로 쏟아지고 있다. IMF 이후 지난 2002년 말까지만 해도 빌딩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으나, 최근 대형 빌딩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매물을 쏟아내고 있는 곳은 삼성생명, 국민은행 등 주요 금융기관들. 이들은 그동안 자체적으로 확보해두었던 빌딩들을 잇따라 매물로 시중에 내놓고 있다.
현재 시중에 매물로 나와 있는 빌딩은 5백억원대가 넘는 곳만 해도 20~30여 개에 이른다. 삼성생명 여의도 사옥, 옛 서울은행 본점, 중앙종금 건물, 하나은행 잠실전산센터, 브릿지증권 역삼동 사옥, 대한투신 여의도 사옥, 한국투신 여의도 사옥, 서울증권 여의도 사옥 등이 현재 매물로 나와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올 들어 이미 주인이 바뀐 서울시내 대형 빌딩도 수십 개에 이르고 있다.
하나증권과 한화증권이 이미 1천억원대에 자사 사옥을 매각했다. 올초 브릿지증권, 세종증권 등은 본사 사옥을 매각해 대금결제를 끝낸 상태다.
빌딩 매각에 나선 대표적인 기업은 삼성생명. 삼성생명은 여의도, 충무로, 삼성동, 지방 사업장 등 무려 30여 개의 자체 빌딩 매각을 서두르고 있다. 이는 2004년 6월 현재 이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빌딩의 30%에 해당하는 숫자다. 매물로 내놓은 빌딩들의 가격을 모두 합칠 경우 평가액만 줄잡아 1조원대에 이를 전망이다.
삼성생명은 이달 초 17개 보유 빌딩에 대한 공개입찰을 실시해 일부 빌딩을 도이체방크에 넘기고 2천억원대의 현금을 확보했다. 이에 앞서 삼성생명은 지난 5월에도 5백억~1천억원대 빌딩 4개를 국내외 투자자들에게 넘겼다. 현재 매각 예정인 30여 곳 외에도 삼성생명은 10여 개 빌딩을 올해 하반기에 추가 매각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울시내 빌딩 시장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은 국민은행. 이달 초 국민은행은 보유 빌딩의 20%에 가까운 84개를 연내에 처분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조만간 본격적인 매각작업에 나설 예정이다. 국민은행은 오는 9월 말까지 부산사옥을 비롯한 30여 건의 빌딩을 팔고, 나머지는 12월 말까지 정리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국민은행이 매물로 내놓은 빌딩 중 서울합숙소의 경우 가격이나 빌딩의 가치면에서 부동산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여의도에 소재한 대표적인 빌딩인 한투, 대투, 서울증권도 매물로 나와 시장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여의도 증권가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 빌딩은 매각가격만 해도 9백억~1천5백억원대에 이르러 빅딜이 될 전망이다.
▲ 영업부진으로 부득이 건물을 내놓은 세종증권(왼쪽)과 브릿지증권. | ||
나라종금 역삼동 빌딩은 영국계펀드인 PPIM에서 매입했고, 브릿지증권 여의도 사옥과 을지로지점 빌딩은 GE캐피탈이 매입했다. GE측은 이 빌딩에 사무실을 열고 삼성과 캐피탈 제휴에 나섰다.
이처럼 매물이 쏟아지면서 서울시내 빌딩 가격이 급락하고 있다. 특히 최근 부동산경기 침체와 맞물려 빌딩값이 크게 떨어지자 외국계 투자자들이 입맛을 다시고 있다. 이미 영국, 미국계 투자자금은 증시를 이탈해 빌딩 매입에 나서는 등 가격메리트를 활용한 빌딩투자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처럼 국내 주요 증권사 및 보험사, 은행 등이 보유 빌딩을 줄줄이 매각하고 있는 이유는 현금 확보 때문. 삼성생명 관계자는 “경기 침체현상이 지속될 경우 현금유동성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금 확보를 위해서는 보유부동산을 매각하는 게 가장 쉽다”고 말했다.
일부 증권사의 경우 경영악화로 인해 부득이하게 자산을 매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서울증권이나 브릿지증권, 세종증권은 영업부진에 따른 적자누적으로 부득이하게 빌딩매각에 나선 상황. 때문에 이들 기업의 속사정을 아는 투자자들은 빌딩값이 더 내릴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소극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주요 금융기관 및 개인들이 빌딩 매각을 서두르고 있는 또다른 이유는 당분간 부동산시장이 하강국면을 그릴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2000년까지만 해도 평당 3천만~5천만원대를 형성하던 강남 테헤란로 일대 빌딩들의 값도 최근 10% 안팎까지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부동산 관계자에 따르면 “팔자”는 사람은 많은 데 “사자”는 세력이 없어 당분간 가격이 계속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같은 가격하락은 매물이 폭주한 탓도 있지만 빌딩 공급이 크게 늘어난 것도 이유. 서울시에 따르면 강남의 경우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새로 들어선 10층 이상 오피스빌딩 수가 10%나 늘어났다. 오는 10월까지 신축되는 빌딩도 40~50개에 이르러 공급이 수요를 크게 앞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