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년 IOC 총회에 참가한 한국 대표 노태우, 박종규, 조상호(왼쪽부터)가 대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그의 애칭은 ‘G.D.(Giant Dynamite)’ 혹은 ‘피스톨 박’이었다. 그 애칭처럼 겉으로는 불같은 성격에 강한 인상을 풍겼지만 실제 모습은 인정도 많고 남도 잘 도와주고 또 외국어도 나름대로 잘 구사하던 학구파였다. 그는 경남 창원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국가방위를 위해 참전했다.
필자가 처음 만난 것은 1956년 육군본부정보국(김계원 준장)에 잠깐 근무할 때였다. 그때 그는 행정과 인사계장이었는데 자기에게 인사도 없이 부임했다고 필자를 오라고 했다. 워낙 험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어 한 번 충돌할 각오를 하고 갔더니 의외로 부드럽게 대했고 그 후 친해졌다.
필자는 3개월 후 미국 육군본부 고등군사반의 교관으로 부임했는데 얼마 안 가서 박종규 소령이 레인저(Ranger) 과정 학생으로 오게 되어 자주 만나게 되었다. 특별히 아는 사람도 없었던 그는 툭하면 필자에게 연락해 만나자고 했고 만나면 나는 주로 들어주는 편이다. 이때부터 친구도 되고 가끔 충돌도 하는 질긴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귀국 후 종종 소식을 듣곤 했는데 1군에 있을 때 박정희 참모장을 가끔 만나러 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 필자는 육군참모총장실 그리고 미 군사고문단장실에 있었던 까닭에 업무반경이 달라 만날 기회는 적었다. 이랬던 그가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1961년 5·16 군사혁명 때부터다.
5·16 당시 박종규는 장면 총리 체포조를 맡아 반도호텔을 급습했다. 하지만 이때 장면 총리는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당시 장면 총리는 내각책임제 총리였지만 관저가 없어 관저를 구할 때까지 반도호텔 8층에 묵고 있었다. 이전 ‘김종필 편’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 박종규는 한·일회담 관계로 6·3사태가 벌어지고 전국이 시끄러울 때 김종필 당의장의 사퇴를 권고하기 위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쌍권총을 차고 시내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행동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어쨌든 박종규 소령은 5·16 성공 후 서울시청 앞에 박정희 소장을 보필하면서 차지철, 이낙선 등과 함께 나타난다. 박 소령은 그 후 최고회의 의장경호대장이 됐고, 내각(송요찬, 박정희, 김현철 내각수반)에 있는 필자와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얼마 후 필자는 주미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3년 11월 케네디(Kennedy) 대통령 장례식 때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가 방미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이 덜레스(Dulles)공항으로 영접나갔을 때 박 당선자가 필자를 보고 “아이들 잘 크냐”고 친근하게 물으면서 같이 손잡고 걸어 나가는데 이때 떨어지라고 뒤에서 툭 친 것도 박종규 실장이었다. 경호에 방해된다는 이야기였다.
앞서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 시절 케네디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해 미국으로 가는 도중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환영인파 중에 권총을 가진 것 같은 사람을 보고 급한 마음에 박정희 의장을 밀어 넘어지게 한 것도 박종규 실장이었다. 물론 오인으로 인한 해프닝이었다.
보통 경호실장은 충성심은 강하고, 정치 감각이나 머리가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박종규 실장은 야당 정치인과도 잘 지냈고 군대 있을 때 ASCOM City의 미군부대에서 근무도 했고 미 보병학교 유학도 다녀와서 그런지 아주 국제적이었다. 미국의 각 기관들과도 친교를 맺었는데 그의 스타일은 정보는 주기도 해야 얻을 수 있다는 식이었다.
필자가 주미대사관에 있을 때 박종규는 미국에 오고 싶다고 해서 미국조야를 시찰하게 도와주었다. 딘 러스크(Dean Rusk) 국무장관, 도드(Dodd) 상원의원, FBI, CIA, 재무성, 비밀경찰의 라일리(Riley) 부장 등 주요 인사를 두루 만나면서 친교를 다졌고, FBI학교와 Colt 총포회사도 시찰해 후일 한국이 Colt 총포건조공장을 세우는 데 일조하게 됐다.
박종규 실장은 귀국 후 바로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승진하고(4개월 간 홍종철이 경호실장을 맡았다) 그 후 비서실과 대등한 장관급 실장으로서 청와대 권력의 쌍벽을 이뤘다. 경호뿐아니라 혁명주체로서 막강한 신임과 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13년 동안 박 대통령의 정권 내부에 대한 Watch dog을 자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종규는 한때 필자 보고 유정회 의원이 되라고 권한 바 있다. 그러나 난 3·15, 4·19, 5·16 등을 다 경험하면서 정치의 무상함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던 까닭에 이를 정중히 사양했다. 그랬더니 박 실장은 “국회의원 하라고 하는데 안 하는 사람이 다 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유신 때 박종규 실장은 박 대통령의 국빈방문 준비 차 일본에 가 있다가 급히 불려왔다. 학창시절부터 꿈이었던 외교관 생활을 하던 필자가 청와대로 불려 들어온 후 박종규 실장과는 함께 근무하게 됐다. 그의 성격이 워낙 강했던 까닭에 청와대 시절 두 번 충돌하고 사표를 낸 적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다시 어울려 지내야만 했다.
박종규 실장은 대통령의 Watch dog을 자처하다보니 이후락 비서실장과도 자주 충돌했고, 김형욱 정보부장과는 대놓고 싸웠다. 동독 GK사건 때 박종규 실장의 비서 ‘미스 김’이 연루되었다 해서 김형욱이 박 실장도 모르는 사이에 연행하자 크게 충돌했다. 김형욱과는 또 미국 밀가루 도입업자 선정을 놓고 부딪쳤다. 이후락 비서실장과 공화당 4인방과 같이 나가던 김형욱에게는 박종규 실장이 제일 어려운 존재였다.
김종필 당의장과는 대통령 뜻에 따라 견제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친(親) 김종필’이었다. ‘윤필용(얼마 전 운명을 달리했다) 사건’을 대통령에게 보고한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 뒤에도 박종규 실장이 있었고, 공화당의 김용태 복지회사건 뒤에도 박 실장이 있었다. 박 대통령에게 조금이라도 맞서는 세력은 서슴지 않고 견제한 것이다.
윤필용 사건 때 박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살린 것도 박 실장이었다. 그 덕에 김택수 사망 후 신군부에 의해 IOC 위원으로 추천된 것이다.
1969년 닉슨(Nixon) 대통령 취임식 때 필자와 둘이서 가 본 10만 달러짜리 방탄특수유리 연설대를 보고 예산이 없어 도입은 못하고, 대신 연설대에 철판을 깐 것이 문세광 저격 때 박 대통령을 살렸다. 박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몸을 숨겼고, 문세광이 연설대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는데 그 철판이 제대로 방어를 해준 것이다.
참고로 1974년 8·15 광복절 날 문세광의 저격이 있자 단상에 있던 모두가 몸을 피하기 바빴는데 박 실장만이 권총을 빼들고 무대 위에서 응사를 했다. 이 장면이 뉴스에 공개되어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잡고 보니 문세광 단독범이었지만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쿠데타인지, 조직적 암살공격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무대 위에 있으면 모든 조명이 무대를 향해서 집중되기 때문에 관중석을 볼 수가 없다. 8·15 광복절에 대통령을 다섯 군데나 참석하게 한 것도 화근이라고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경호관은 200명밖에 안 되는데 전부 협조기관의 협조를 받아야 했고, 전자검색대도 없어 무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포가 초청장을 호텔에 두고왔다는데도 그냥 입장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8·15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후 박종규 실장은 청와대를 떠나 근신했다. 나오면서 후임으로 오정근을 추천했는데 혁명주체와 가족들 천거로 차지철이 임명되었다. 후에 그 인사가 잘못되었다고들 하는 사람이 많았다. 보통의 경호실장과 달리 박종규는 5·16혁명 주체로 박 대통령 정권을 지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경호 업무 외에도 정치도 간접적으로 간여했고, 경제, 외교, 대미관계, 문화, 스포츠 등 국가재건에 필요하다면 모든 분야에 눈을 뜨고 있었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대한사격연맹 회장을 맡아 전국에 사격장을 개설, 영업하게 했고, 태릉에 세계적인 국제사격장 겸 놀이터를 건설해 세계사격대회 유치에 나섰다. 워낙 사격을 좋아한 까닭에 대통령에게 건의해 안보의식 고양을 위한 차관급 이상 사격대회도 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올림픽이건 세계대회건 사격에서 입상한 일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위 ‘일내는 타입’의 박 실장은 무섭게 밀어붙였다. 세계사격대회의 경우 유치신청은 해놓았지만 육 여사 저격사건으로 박 실장이 근신 중이라 필자가 억지로 부탁을 받고 스위스 베른(Bern)에 가서 멕시코의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와 대결해 극적으로 대회 유치에 성공했다. 1978년 제42회 서울 세계사격대회는 소련 블록(Bloc)이 보이콧한 반쪽대회였지만 워커힐아파트도 지어 선수촌으로 대회를 치르는 등 한국은 물론 국제 스포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어쨌든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박종규 전 경호실장은 박 대통령에게 건의해 올림픽유치 타당성을 검토하는 국민체육심의회의를 총리 주재로 두 번이나 열도록 만들었다. 모두 경제적인 이유로 반대했지만 ‘일내는 스타일’인 박종규는 무모하리만큼 저돌적으로 유치를 주장했다. 김택수 IOC 위원은 자기가 투표한 한 표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서거로 무산됐다. 그러다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에 재추진됐다. 부마사태 등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박종규 전 경호실장이 정보부장, 김용식의 국무총리 기용이 임박해졌다. 하지만 이때 박 대통령이 서거한 것이다.
1979년 박종규 전 경호실장은 차지철의 강력한 천거로 대한체육회장이 되고 곧 마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박 대통령 서거 후 국회의원직은 사퇴했다. 그리고 5·18 신군부의 계엄령 선포 때 체포됐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 집에 모여 있던 장동운, 오정근, 박종규는 모두 구금되어 부정축재로 심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박종규는 곧 풀려나 김택수 IOC 위원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기간 중 IOC 위원이 됐다.
앞서 1981년 바덴바덴도 특별한 참가자격은 없었지만 노태우 장관을 도와 세계사격연맹을 통해 서울유치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그의 희망과는 달리 그에게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은 내주지 않았다. 통 큰 박 실장은 실의에 빠졌고, 건강에 탈이 났는지 마침내 암으로 1985년 12월에 타계했다. 그가 늘 말하던 ‘굵고 짧은’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저녁에 잠 들면 내일 못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박종규의 경우 오랜 지병인 간경화가 간암이 된 것이다. 그의 사망 직후 노태우 장군이 말하기를 “박정희 대통령이 섭섭해서 옆에 두기 위해 데리고 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만큼 박종규는 박정희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박종규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나오기 힘든 사람이다. 5·16군사혁명이나 박정희 시대처럼 파란만장했던 시절, 지금 들으면 무슨 전설 같기도 한, 역사를 풍미했던 주역의 하나인 것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