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동안 잠잠하게 지냈던 장 전 회장의 움직임이 과거 고합그룹의 계열사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포착돼 혹시 그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는 눈길을 받고 있다.
계열사 부도 이후 사실상 기업 경영에서 물러난 그는 그동안 국세청, 금감원, 검찰 등 관계 당국으로부터 재산도피 등에 대해 집중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장 전 회장은 무일푼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던 그에게 최근 모종의 움직임이 포착된 것은 KP케미컬이라는 회사의 매각 과정에서다. KP케미컬은 지난 2001년 말 워크아웃중이던 고합에서 유화부문을 분리, 설립한 회사로 고순도테레프탈산(PTA)과 페트용 수지 등을 생산하고 있고, 현재 채권단이 매각절차를 진행중이다.
그러나 이번 KP케미컬의 매각을 두고 과거 주인이었던 장 전 회장측이 회사 매각방법, 절차 등을 놓고 여러 루트를 통해 ‘훈수’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자, 장 전 회장이 다시 경영일선에 복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
KP케미컬의 주채권은행은 우리은행이고, 우리은행은 이미 지난 3월 말 롯데그룹의 계열사인 호남석유화학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KP케미컬과 호남석유화학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계약서에 사인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주채권은행이나 금감원은 모두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매각이 늦어지고 있는지, 언제 확실히 매듭이 지어질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KP케미컬의 매각이 지연되는 이유가 매각 당사자들 간에 있는 가격 논의 등이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일부에서는 KP케미컬 매각을 두고 채권단과 오너가 의견 충돌을 벌이고 있다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채권단은 현재 KP케미컬의 주인인 채권은행이고, 오너는 전 주인 장치혁 전 회장을 뜻한다.
통상 채권단과 우선협상대상자 간에 의견 충돌이 있는 경우는 허다하지만, 현재의 주인과 과거의 주인이 의견충돌을 빚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다. 채권은행 중 한 곳의 관계자는 “KP케미컬은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 매각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과연 ‘이해관계자’와 ‘외부 환경’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실제로 장 전 회장은 올 초부터 과거 자신이 이끌던 KP케미컬 매각에 대해 탐탁지 않아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장 전 회장은 올 초 채권단이 매각에 드라이브를 걸자 주식매각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그가 가처분 신청을 낸 이유는 KP케미컬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회사가 정상화되면 대주주에게 주식을 우선 매수할 권리를 주도록 약정한 것을 이행하라는 것이었다. 장 전 회장은 나중에 이 신청을 자진철회했지만, 향후에도 그의 매각저지 시도는 계속됐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장 전 회장측이 이번 매각을 두고 각종 루트를 통해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고 말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 역시 “장 전 회장이 본인의 이름으로 수차례 KP케미컬 매각과 관련해 금감원측에 민원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금감원측은 구체적으로 장 전 회장이 어떤 내용의 민원을 접수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는 주로 KP케미컬이 헐값에 넘어간다는 것, 급하게 이뤄진 졸속 매각이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편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장 전 회장은 현재 워크아웃중인 KP케미컬의 현금 보유율이 높은 데다가, 사업실적이 흑자로 돌아서고 있어 독자생존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한다. KP케미컬이 독자생존을 할 경우, 사실상 장 전 회장이 경영일선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높아진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
실제로 KP케미컬의 사업실적을 보면 흑자를 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KP케미컬은 지난 2002년 2백91억원, 지난해 69억원의 흑자를 기록해 2년 연속 이익을 낸 데 이어, 올 1분기에는 순익이 4백억원대로 집계됐다.
그러나 채권단측은 KP케미컬이 흑자를 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향후 독자생존이 가능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고 있는 데다 매각이 우선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특히 장 전 회장이 민원을 제기한 금감원은 이에 대해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장 전 회장측이 민원제기와 함께 몇몇 근거자료도 제출했다”며 “근거자료 검토결과, 전혀 타당성이 없는 데다가 특히 그가 제시한 회계자료를 작성한 회계법인에서조차 내용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고 말했다. 결국 장 전 회장이 금감원에 수차례 제기한 민원은 흐지부지됐고, 이 자료는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에 그대로 이송됐다.
특히 금감원은 장 전 회장이 현재 공적자금특별법으로 고발된 상태인 점을 감안할 때 사실상 그의 복귀는 어렵다는 판단. 이렇게 되자 최근 장 전 회장은 급기야 감사원에 ‘KP케미컬 헐값 의혹’과 관련된 내용을 진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KP케미컬은 난감한 입장. 현재 고합그룹은 공중분해돼 KP케미컬과 잔존법인으로 나뉘어 있다. 과거 고합그룹 직원이었던 KP케미컬의 관계자는 “장 전 회장의 근황에 대해 알지 못한다”며 “혹 회사가 헐값에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지 경영 복귀를 하겠다는 의지는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잔존법인 관계자는 “고합그룹과 장 전 회장은 관계가 없다”며 “더이상 장 전 회장과 연락이 닿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