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부인 정희자씨는 91년 5·4부동산조치로 곤욕을 치렀다. 위 사진은 포천 아도니스 골프장으로 원래 정씨는 문제의 대성리 땅에 이 골프장을 만들려 했다. | ||
이 영화에서 슈퍼맨과 함께 주목받은 캐릭터는 악당으로 나오는 진 해크만이었다. 자연스런 그의 연기도 흥미로웠지만 눈길을 끈 부분은 진 해크만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이유다. 그는 부하가 “두목은 왜 선량한 사람을 괴롭히고 돈을 뺏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돈을 모으는 목적은 땅을 사기 위해서지. 내 아버지는 죽기 전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셨어. 캘리포니아를 모두 사두어라.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는 땅뿐이야. 인간은 폭발적으로 늘지만 땅은 유한하거든….”
땅.
예나 지금이나 땅은 최고의 재테크 대상물인 모양이다. 주식을 사서 떼돈을 벌었다는 사람은 드물지만 땅을 사서 돈방석에 앉았다는 사람은 많다. 요즘 신행정수도 건설 얘기가 나오면서 충청도 일대에서 떼돈을 벌었다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는 것도 그런 실례다. 어쨌든 땅과 관련한 재계의 숨은 얘기를 하나 꺼내보자.
1991년 무렵의 일이다. 당시에도 부동산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요즘 강남 땅이 천정부지로 올라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고 있지만, 그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대선 공약이던 주택 2백만 가구 설립에 앞서 재벌들의 땅을 문제삼고 나섰다.
그래서 나온 게 세칭 ‘5·4부동산조치’였다. 이 조치의 골자는 재벌들이 소유한 비업무용 부동산을 1년 안에 처분토록 하는 것이었다. 만약 비업무용으로 판정받은 부동산을 기간 내에 처분하지 않을 경우 정권 차원에서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고, 강제로 매각해버릴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 조치로 재벌들은 초비상이 걸렸다. 80년대 이후 부동산 매입에 열을 올리던 재벌들은 땅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다. 일부 기업들은 그동안 놀려두었던 땅에 간이건물을 세워 업무용으로 둔갑시키는 웃지못할 일도 벌였다.
당시 언론의 최대 관심은 어떤 재벌들이 어떤 비업무용 땅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연일 유명 재벌들의 숨겨둔 땅들이 들춰졌고, 그때마다 막대한 세금이 해당 기업주에게 부과됐다. 물론 사유재산권 침해라며 정부 조치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는 등 강력하게 대응한 기업도 있었다. 롯데그룹의 잠실롯데월드 부지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어찌됐건 당시 재벌들은 부동산 감추기에 바빴다. 땅을 가진 것이 무슨 큰 죄를 저지른 것처럼 여겨지던 분위기였다.
그 즈음, 기자는 한 통의 제보전화를 받았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부인 정희자씨가 대성리 일대에 대규모 비업무용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분위기로 볼 때 그 같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대단한 기사거리였다.
기자는 즉시 사실확인에 나섰다. 먼저 정씨의 주민등록등본부터 확인했다(당시만 해도 제3자가 타인의 주민등록을 열람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었다).
정씨의 등본에는 의외로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그중 하나는 정씨의 주소가 경기도 양주군 ××번지로 돼 있는 것이었다. 대재벌기업의 총수 부인이 수도권 지역에 주소지를 두고 있다는 것은 의문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씨는 1년 사이에 주소지를 서울 외곽지역을 비롯해 무려 5~6군데나 옮겨다녔다.
▲ 정희자씨 | ||
이 건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양수리, 대성리 일대의 땅 소유주에 대한 전반적인 취재도 곁들였다. 취재 결과 이 일대에 땅을 보유한 사람들 중 유명 재벌기업 총수와 가족 이름이 10여 명이나 쏟아졌다.
물론 이들이 가진 땅들은 대부분 개발이 되지 않은 나대지 상태의 땅이었다. 일부 인사들은 대지 3천 평 정도의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확인된 재벌총수는 D그룹 C회장, K그룹 P회장, H그룹 2세인 C씨, 또다른 H그룹 L회장 등이었다. 그중 D그룹 C회장은 나중에 별장을 짓기도 했다.
어쨌든 이 내용은 곧바로 기사화됐고, 그 충격파는 엄청났다. 기사가 나간 뒤 방송, 신문 등 모든 언론이 양수리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다. 나중에는 정치인 법조인 기업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명단이 줄줄이 나오기도 했다.
양수리 일대 부동산 소유주 명단이 언론에 등장하면서 이 지역 부동산중개소에는 매물폭주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땅을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을 정도였는데….
어쨌든 이 사건은 정희자씨에 대한 제보에서 발단이 돼 확대됐지만, 정작 정씨는 애매하게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확인 결과 정씨는 양수리 일대 땅을 평소 친분이 있던 사람으로부터 거의 반강제로 떠안았던 것이다. 정씨 명의로 돼 있는 땅의 전 소유주는 원래 정씨의 친구였는데, 사업에 실패하자 급전 마련을 위해 정씨에게 땅을 판 것이었다. 당시 정씨는 땅값도 완불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에서는 정씨가 이 땅을 넘겨받은 뒤 추가로 인근지역의 땅을 더 확보한 뒤 이곳에 골프장을 지을 생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땅이 문제가 되는 바람에 정씨는 골프장 부지를 포천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세워진 곳이 포천 지역에 있는 아도니스골프장이다.
어쨌든 당시 재벌들을 아연 긴장시켰던 5·4부동산조치도 노태우 정권이 끝나면서 흐지부지됐다. 심지어 이 조치로 거액의 비업무용 부동산 세금을 물었던 기업들도 정권이 끝난 뒤 소송에 나서 세금을 도로 받아내는 상황도 발생했다. 5·4부동산조치가 사유재산권 침해라는 법원의 판결까지 나왔다. 그야말로 이 조치는 한 편의 코미디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에도 정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동산 가격안정을 위한 정권 차원의 특단조치를 내놓았다. 노무현 정부도 강남 부동산값이 너무 뛰자 강력한 부동산억제정책을 발표했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부동산 정책은 그때 그순간에만 반짝 약발을 발휘할 뿐이라는 점이다. 상황논리에 너무 얽매이다보니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거창한 정책이 나올 때마다 느끼는 점은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는 간단한 명제를 정책담당자들이 항시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정선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