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TAR-TASS/연합 |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에 소련의 극동문제연구소(IMENO) 소장인 프리마코프의 초청장을 가지고 서울에 온 사람이 바로 이그나텐카였다. 김영삼 총재는 이그나텐카와 함께 만찬을 가진 뒤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선 “(소련에) 언제 가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어봤다. 난 가급적 빨리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조언을 했다. 김 총재가 소련으로 가는 도중에 프리마코프가 국회의장이 된 덕분에 모든 문제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고르바초프를 만난 정치 지도자로서는 김 총재가 가장 먼저였다. 이때는 소련에 갈 수 있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이후 필자가 크렘린궁에 이그나텐카를 만나러 갔을 때 고르바초프에게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양분하고 있을 때였다. 냉전시대 소련의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온화하고 합리적인 지도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서울올림픽 참가 문제로 소련을 다닐 때 샤태랜 대통령 경제고문, 이그나텐카 공보비서, 보고모로프 사회주의 정책연구소장(연방의원), 스미르노프 IOC 위원, 유스케비치 방송차관, 힐체프스키 문화차관, 그라모프 체육장관 가브린 차관 등이 많이 협조해 주었다. 미국이나 어디서나 윗사람을 만날 때는 그들의 측근을 통하는 것이 상책이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러시아연방 남서부 스타브로플지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46년 공산주의청년동맹(콤소몰)에 가입했으며 4년 동안 국영농장의 기술자로 일했다. 콤소몰에서의 활동을 인정받아 1952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고 공산당원이 되었다. 그 후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콤소몰과 당 조직의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지역당원회의 제1서기에 올랐다.
1971년에는 드디어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되었으며 농업담당 서기와 정치국원(1980)을 역임했다. 그의 꾸준한 성장 뒤에는 이데올로기 담당 서기였던 미하일 수슬로프의 후견이 큰 역할을 했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1996년에 서울에 와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아직은 시기상조지만 2년 후에 자기 후계자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오겠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어쨌든 고르바초프는 미하일 수슬로프와 유리 안드로포프의 통치기간 동안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고르바초프는 1984년 2월에 안드로포프가 사망하고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승계하면서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고 1984년 3월 체르넨코가 사망하자 최연소 위원으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 2008년 한민대에서 주최한 한민족 국제평화포럼 때 고르바초프가 명예총장 자격으로 참석한 모습. 오른쪽은 필자 부부가 러시아 방문 때 만난 알렉시 대주교. |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은 소련사회 전반에 해빙무드를 가져오고 자유와 알권리가 크게 확장되었고 언론은 보도와 현실비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정부당국은 스탈린주의 독재체제와 결별을 선언했다. 또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은 소련 최초의 민주화 시도였다. 국가에 의존하던 기업체도 스스로 생산자금 이윤을 관리하게 되었고 개인생산업도 용인되었다.
1987년 고르바초프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중거리핵전력협정(INF)에 서명했으며, 아프카니스탄 소련군도 철수시켰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사이에 냉전에 종지부를 찍고 동구 여러 나라에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소련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켰고 동서독 통일을 수락했다. 그는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자유경제와 계획경제라는 상반된 체제의 절충을 모색하면서 소련 경제가 나락으로 빠져들게 됐다. 결과적으로 경제파탄, 민중의 욕구불만, 소수 민족국가의 세력 확장을 가져왔다. 1990년대 말 소연방이 붕괴될 때 필자는 모스크바에 있었는데 먹으러 갈 식당도 없고 거리의 가게들은 살 물건도 없이 텅 빈 상태였고 생필품조차 살 곳이 없었다. 유통이 이뤄지지 않아 커피는 물론 과일도 사기 힘들었다. 공중전화조차 불통이었다. 이때 외국인용 상품은 SADKO라고 있었는데 거기도 물건이 제대로 없었다. 미국 돈 1달려는 공정 환율은 0.6루블인데 암시장에서는 500루블이 1달러였다. 호텔도 커피 마시기조차 힘들었다.
결국 쿠데타 음모와 옐친의 등장, 소수 민족의 독립은 소연방의 와해와 고르바초프의 실각을 가져왔고 스탈린에 의해 강제 구성되고 69년 동안 15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지속돼 왔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사라졌다.
서울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 올림픽 개최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필자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관심은 보이콧 전문가인 소련의 선수단을 서울올림픽에 참가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서울이 아니더라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36개국의 아프리카선수단 철수, 모스크바올림픽의 서방진영 보이콧, LA올림픽에서의 소련진영 보이콧이 있었다. 그리고 1981년 바덴바덴에서는 소련 진영의 서울반대가 나왔고, 이후 계속해서 보이콧 압력을 겪고 있었다. 올림픽의 반을 나눠주던지 보이콧을 해달라는 북한의 압력이 대단할 때였고 소련의 출전은 곧 동구권국가의 참가를 의미했다. 사마란치도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에서 있는 회의에는 전부 참석했고 필자는 사회주의 국가의 참가조건과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때다. 필자는 그 일로 인해 소련을 5~6회나 방문했고, TV 방송에 출연해 대한제국과 고종의 아관파천, 그리고 그때 알게된 가배(커피)가 고종환궁 후 보급된 경위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이 주효해서 1987년 12월 23일 헝가리를 시작으로 1988년 1월 10일에 소련이 중국에 이어 마지막으로 서울올림픽 참가를 발표했다. 고르바초프의 결단이었다. 올림픽 세계에서는 이번에도 보이콧이 있으면 올림픽은 끝이라는 비장한 공기가 흐르고 있는 상황에서 고르바초프가 용기 있는 결단을 한 것이다.
2008년 논산의 한민대학교(총장 조준상)가 주최한 제1회 한민족 국제평화포럼에 고르바초프를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한민대 측에서는 고르바초프를 명예총재로 교섭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을 때 필자가 명예부총재라고 소개했더니 고르바초프가 흔쾌히 수락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한국에 손녀, 수행원들과 함께 참석했다. 필자가 평화포럼 오찬 때 “서울올림픽에 소련선수단과 문화사절을 보내주어서 동서화합을 이루고 성공적으로 올림픽을 치를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고 했더니 “서울올림픽 덕에 소련과 동구권의 민주화가 앞당겨진 것”이라며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또 미국이 민주주의를 다른 나라에 전파하고 심는 것은 좋지만 무력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일침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 정당을 만들고 정치를 할 생각이라고 하면서도 다음에도 초청해주면 평화포럼에 오겠다고 약속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에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준 주역으로 동서독의 통일에 절대적으로 기여했으며, 서울올림픽의 소련 참가를 기점으로 역사적인 한·소 수교를 성사시킨 인물이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간 내놓고 만났다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고르바초프와의 회합 때 이미 정쟁방지를 위해서는 6자회담이 필요하다고 말한 사람이다. 또 김정일의 건강회복도 희망했다. 북한의 안정에는 아직 그가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였다. 그는 또 자기가 크리스천이라고도 언명한 적도 있고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조부도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그는 민주화와 공산주의의 종식은 나라가 국민의 것이고 당의 것이 아니며 국민이 원하는 대로 나라를 국민에게 돌려주었다고 했다. 그 후 국제녹십자단을 창설하여 환경보전에 헌신한 세계평화의 전령사다.
참고로 러시아에서 인상 깊게 만난 또 한 사람은 소련에서 러시아정교를 부활시킨 알렉시(Alexi) 대주교다. 알렉시 대주교는 고르바초프를 비롯해 옐친과 푸틴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언을 하면서 러시아 정치안정에 상당히 기여를 한 인물이다. 앞서 소련체제에서는 국가와 종교가 같이 갈 때 주요역할을 했다. 소련이 강력한 공산체제 때도 소련 어디를 가도 교회가 있고 항상 촛불을 켜놓고 사람들이 우글거린다. 동행하던 차관도 교회만 보면 우리를 기다리게 하고 나온다. 공산국가에는 무신론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정반대였다. 알렉시 대주교는 그러는 동안에 러시아 정교의 위상도 상당히 회복시켰다. 필자가 소련을 방문했을 때 대주교는 레닌그라드에 있었는데 이례적으로 우리일행을 오찬에 초대하고 선물까지 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련이 서울올림픽에 참석할 것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그리고 ‘노태우’라는 한국대통령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말하면서 노 대통령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후 모스크바와 종교도시인 자고르스크(현 세르게예프 파사드) 사이를 오가며 잠깐씩 만났지만 훌륭한 인품과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소련과 동구권이 적에서 체육, 문화, 경제, 외교관계를 갖는 협력관계로 발전하면서 서울올림픽 참가로 가는 데는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 소련의 크렘린, 정치, 외교, 체육, 문화, 종교, 방송, 교통, 모든 분야에 외교능력을 총 투입한 결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외교는 공상과 이념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확증과 실리를 가지고 하는 것이고 외교 센스가 없는 국민은 시들어간다고 한다. 지금도 외교 역량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다. 알렉시 대주교가 2008년 12월 5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이 시대가 또 한 명의 위대한 위인을 잃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