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MB)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간에 해빙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현 정부의 대북 강경기조에 천암함 사태 등 대형 악재가 터지면서 극단적 대치국면을 연출했던 남북한이 연일 유화책 카드를 꺼내들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MB와 김 위원장이 3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돌입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있는 MB와 3대 세습체제를 본격화하고 있는 김 위원장이 정상회담을 매개로 상호 윈윈 전략을 구사할 것이란 관측에 점차 힘이 실리고 있는 형국이다. 정보당국 주변에서는 여권 핵심부가 오래전부터 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비밀 TF팀’을 은밀히 가동하고 있다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TF팀에는 MB의 핵심 측근인 임태희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재오 특임장관을 비롯해 원세훈 국정원장, 현인택 통일부 장관 등 외교안보라인 수장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TF팀은 이산가족 상봉 정국을 틈타 북측과 공식·비공식 만남을 통해 정상회담 시기와 의제, 장소 등 구체적인 실무작업을 본격화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MB와 김 위원장 간의 3차 남북정상회담은 성사될 수 있을까.
“3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비밀 TF팀’이 극비리에 가동되고 있고 구체적인 로드맵도 준비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9월 14일 기자와 만난 한나라당 중진 A 의원이 비보도를 전제로 건넨 말이다. 한나라당 핵심 인사이자 여권 내 정보통으로 잘 알려진 A 의원은 “이 대통령이나 김정일 위원장 모두 정상회담의 필요성 및 당위성에 공감하고 있는 만큼 명분 쌓기와 분위기 조성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큰 관심사인 정상회담 시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A 의원은 사견을 전제로 G20 정상회의를 전후로 전격적으로 성사될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그는 “변화무쌍한 북한 정세와 의제 조율 등 난제가 산적해 있어 시기를 구체적으로 예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각각 G20 정상회의 성공적 개최와 안정적인 세습체제 구축이라는 당면 과제를 안고 있는 만큼 그 어느때보다 남북 화해무드 조성이 절실하다. 두 사람이 처한 입장과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정상회담이야말로 상호 윈윈할 수 있는 더 없는 이벤트다. 따라서 의제와 장소가 조율되면 시기는 G20 정상회의를 전후해 전격적으로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A 의원의 말대로 남북이 3차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극비리에 움직이고 있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무엇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극한 대치국면을 연출해 왔던 남북이 약속이나 한 듯 갑자기 해빙무드로 전환하고 있는 사실에 정치권은 주목하고 있다.
특히 천안함 사태 이후 금강산관광지구를 폐쇄하는 등 남북교류를 사실상 봉쇄했던 북한은 돌연 태도를 바꿔 남측에 쌀 지원을 요청하는가 하면 이산가족 상봉도 제의하는 등 화해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다. 남측도 화답이라도 하듯 곧바로 대북 지원을 재개하고 이산가족 상봉 규모 확대와 정례화 작업에 착수하는 등 진일보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천안암 사태 출구 전략을 모색해 온 남북 수뇌부가 유화책으로 화해무드를 조성한 뒤 이산상봉을 매개로 정상회담 수순 밟기에 돌입한 게 아니냐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는 형국이다.
남북이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실무진들이 극비리에 접촉한 정황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10월 중순경 MB의 핵심 측근인 임태희 청와대 비서실장(당시 노동부 장관)이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과 원동연 아태평화위 실장 등을 싱가포르에서 극비리에 접촉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3차 정상회담 추진설은 수면위로 급부상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지난 2월 4일자 서울발 보도를 통해 임 실장과 김 부장 등이 10월 17일~18일 양일간 비밀회동을 통해 정상회담 일정을 합의했으나 북핵 문제 등 일부 의제들과 관련된 이견을 좁히지 못해 결렬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한 달 뒤인 11월 중순경에는 우리 측 통일부 핵심 간부와 원동연 실장이 개성에서 비밀 회동을 가졌다는 소문이 설득력 있게 나돌기도 했다.
<일요신문>은 지난 2월 ‘정상회담 비밀 TF팀 실체’(926호) 제하의 기사에서 정보당국 고위 관계자 및 여야 정치인들의 신빙성 있는 증언을 바탕으로 TF팀의 실체와 역할 등에 대해 다각도로 조명한 바 있다. 당시 <일요신문>은 여권 핵심부가 임 실장을 비롯해 원세훈 국정원장, 현인택 통일부 장관,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 등 외교안보 라인 수장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TF팀을 은밀히 가동하고 있는 정황들을 파악했다. 여기에 여권 실세인 이상득 의원과 류우익 주중대사 등 중진급 인사들도 TF팀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외교안보 라인을 비롯해 여권 실세들이 TF팀을 전 방위적으로 지원하면서 3차 정상회담을 극비리에 추진해 온 정황들이 어느 정도 드러난 셈이다.
하지만 지난 3월 천안함 사태가 터지면서 남북 관계는 악화 일로로 치달았고, TF팀의 실체는 물론 정상회담 추진설도 수면 아래로 급속히 가라앉았다. 현 정부에서 정상회담은 아예 물건너 간 게 아니냐는 관측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특히 천안함 사태 배후자로 지목된 북한은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면서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됐다. 가뜩이나 화폐개혁 실패와 재해 등으로 극심한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던 북한은 이중 삼중고에 봉착했다. 김 위원장의 3대 세습체제 구축 전략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김 위원장 입장에선 어떻게든 천안함 사태 출구 전략과 맞물린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MB 입장에서도 남북간 극한 대치 국면은 집권 후반기로 접어든 국정운영에 적잖은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특히 오는 11월로 예정된 G20 정상회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 대치 국면은 여러모로 악재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처럼 MB와 김 위원장이 처한 국내외적인 정치 상황이 남북관계를 해빙무드로 급반전시키는 주 요인이 됐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지난 6월 대남 사업 담당자들에게 남북관계 개선 및 정상회담 재추진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이 정상회담 장소를 평양으로 정하는 대신 남측이 의제로 삼고 있는 국군포로와 납북자 송환 문제를 전향적으로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는 구체적인 내용도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남북 실무자들이 최근 개성 등에서 비밀리에 접촉한 정황들도 포착되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9월 12일자 서울발 기사를 통해 지난 8월 중순 개성에서 남북 고위관계자가 비밀접촉을 가졌다고 보도했다. 개성 접촉에서 한국 측은 천안함 사건 사죄와 비핵화를 향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한 반면 북측은 MB정부의 대북 강경기조를 ‘햇볕정책’으로 복귀할 것을 주문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개성 접촉설에 대해 청와대와 정부 당국은 ‘전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한적십자사가 대북 수해지원을 제의하자(8월 말) 북측이 곧바로 쌀 시멘트 중장비를 지원해 달라며 역제의를 했고(9월 4일), 이어 북측이 대승호 송환(9월 7일)과 이산가족 상봉을 제의하자 남한이 이산가족 상봉 확대 및 정례화를 역제의하는 등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화해무드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에서 개성 접촉설에 힘이 실리는 형국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MB가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북한 고위관계자를 비밀리에 접촉하는 등 TF팀을 이끌고 있는 임태희 실장에게 청와대 비서실을 맡기고 현 정권 2인자로 통하는 이재오 의원을 특임장관으로 발탁한 배경에도 정상회담 로드맵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정상회담 추진에 가장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임 실장을 지근거리에 두고 정상회담 전반을 진두지휘하게 하고, 이 장관은 정상회담 분위기가 무르익을 경우 대북 특사 내지는 남북 장관급 회담에 투입하려는 복심이 투영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과연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와 세습체제 구축이라는 당면 과제를 안고 있는 MB와 김 위원장이 3차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극적인 ‘빅 이벤트’를 성사시킬 수 있을까. 남북한이 천안함 출구 전략과 맞물린 화해무드를 조성하고 있는 가운데 두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