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길 교수 |
그는 1928년 평남 맹산 출신으로 교육자며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부정불의를 보면 못 참는다. 사상가로도 나섰고 정치에도 관여했다. 1951년 연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보스턴 대학에서 링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뗏목으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9·28수복 후 서울로 돌아와 방위군에 소집됐다. 이후 다시 부산으로 후퇴, 해산한 뒤 미군부대의 통역으로 조국 방어에 일조를 했다. 제주도 훈련소로 끌려가기 직전에 미군 소속부대가 필수요원으로 요청하여 계속 근무를 한 일화도 있다.
부산 피란 시절 부민동의 도지사 관저가 이승만 대통령의 임시숙소를 쓰였는데 마침 우리 처가가 그 옆에 있어 가끔 나의 처가에도 김동길 등 연세대 동문들이 처형 박동근(신학과)을 만나러 심치선(이화여고 교장) 등과 들른 적이 있다 한다.
김동길 교수는 미국에서 돌아와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민주화 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도 치렀다. 본격적인 행동은 유신시대에 시작된다. <씨알의 소리>에 수필을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는 출감 후 “소학교 접장하던 사람도 18년째 대통령을 하는데 대학교수가, 한다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 죄냐”며 항변했다. 74년 4월에는 긴급조치 1호 위반 내란선동 등으로 몰려 중형을 받았으나 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김동길 교수는 “법이 법 같아야지” 하고 항소를 포기했다.
김동길 교수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소위 ‘정치교수’ 불리며 학원 자유화에 앞장섰다.
그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신랄하게 현실비판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조선일보> 논설고문으로 언론활동을 하기로 했다. 방우영 회장과는 동갑내기 연희대 동창이다. 이러한 현실참여는 국민당 대표, 14대 총선에서 원내진입으로 이어졌다. 정주영 김종필 등과도 손을 잡았으나 결국 갈라지고 정의감과 양심 있는 행동으로 참여했던 정치에서 손을 뗀다.
신촌 연세의료원 뒷골목의 김동길 교수 집은 누님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시절부터 냉면과 빈대떡으로 유명했고 사람들이 많이 붐볐다. 지금도 1년에 두어 번은 미어터진다. 연세대 이화여대 관계자뿐 아니라 백선엽 대장을 비롯한 군인사, 방우영 오재경 등 언론계 인사, 여성계 인사들이 몰려온다. 단순히 냉면과 빈대떡 먹으러 오는 것일까? 구수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을 보러 오는 것일까? 조그마한 마당도 2층 건물을 지어 김옥길 기념관을 만들더니 숭의학원 안에 박물관을 열었고 곧 김옥길 누님이 즐겨 가 계시던 문경에 기념관을 지을 계획이라는 말도 들린다.
개인적으로 가끔 신촌의 김동길 교수 집으로 냉면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그의 따뜻한 인간미를 제대로 알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필자가 평창방해설 운운으로 곤욕을 치를 때였다. 그는 구치소로 면회를 와선 격려와 인생담을 말해주었고 병원에 있을 때는 일부러 자기 집에서 아침도 준비해 주었다. 마녀사냥 식으로 사람을 마구 몰아붙이던 시기였는데 그렇게 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필자가 곤란한 처지에서 벗어나자 편지를 두어 번 보내왔다. 한 번은 선조 때 영의정 홍섬의 시조였는데 ‘옥을 돌이라 하니 박물군자는 아는 법이었건만 알고도 모르는 체하니 그를 서러워하노라’라는 내용이었다. 필자를 보니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 돌변하는 세상, 진실이 왜곡되고 악이 선으로 둔갑하는 세상의 인심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귀양 다니던 옛 선비가 생각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그 장래가 창창한 남이 장군을 간신들이 ‘남아 20에 미평국(平國)’을 ‘미득국(得國)’이라고 했다고 참언하여 한칼에 없애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조국의 역사를 탄식하는 말이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김동길 교수가 원래 유수의 석학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혼란한 시대 유신, 군사독재, 좌파정권 시대에 국민의 양심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에도 참여했고 정계를 떠난 후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용감하게 사상가, 평론가, 교육자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젊은 시절 공부한 대로 링컨을 닮은 삶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 백인천 전 감독(왼쪽)과 패션디자이너 고 앙드레김. |
백인천의 인생은 야구 외길로, 한국 야구의 오늘이 있기까지 크게 이바지했다고 생각한다. 백인천은 1950년대 말 경동고 시절 이미 고등학생으로서 서울운동장 최초의 홈런을 쳤고 홈런을 1년에 10개씩 때렸다. 수비도 뛰어나 포수인 그의 송구는 도루하기를 힘들게 만들었다. 이재환 주성현 오춘삼 등 이후 한국야구의 대표가 된 유망주들과 팀을 이룬 경동고등학교 야구팀은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연간 전승기록을 세웠고 단일 고등학교팀으로는 최초로 일본으로 원정가 3승 2패 3무승부를 기록하고 돌아왔다.
가을이면 재일교포 야구팀이 서울에 와서 경기를 가졌다. 한국은 모두 참패하고 혼성대표팀도 참패할 때였는데 경동고만 서울운동장이 관중으로 가득 찬 가운데 백인천이 통쾌한 홈런으로 4대2로 역전승을 거뒀다.
1962년 4월 백인천은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대회 유일의 홈런과 장타를 때려 한국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이때 일본 프로팀의 스카우트를 받게 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인천은 고교시절 겨울엔 고등학교 빙상선수권대회에서 늘 500미터 단거리에서 우승했다는 사실이다.
그후 백인천은 일본 토에이팀에 입단, 한국인 최초로 외국 프로무대에 진출했다. 안 보내려는 움직임이 많았는데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의 지원으로 성사됐다. 그 당시 내각수반 의전비서관이었던 필자는 경동고 야구부 후원회장을 맡고 있었고 청량리의 형제주막(추어탕전문-연세대와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김충남의 형이 경영)에서 일본 진출 환송연을 열어주었다. 먹고살기 어려운 때였다.
백인천은 일본에서도 퍼시픽리그의 수위타자(타율 .319)가 되었고 다른 사람과 달리 일본 귀화도 안 하고 이름도 바꾸지 않았다. 그는 일본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필자의 여의도 집으로 인사를 왔고 얼마 후 한국 프로야구 창설 땐 MBC 야구팀의 감독 겸 선수가 되어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시즌 타율 4할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후 롯데, LG트윈스 감독 등으로 옮겨 다녔다. 그는 독단적인 행태와 더그아웃에서의 골프 스윙연습 등으로 비난도 종종 받았다.
그래도 그는 다시 삼성에서 지금의 이승엽을 있게 하는 등 후배 육성에 힘을 썼고 아직도 해설가로 국민과 야구팬을 기쁘게 하고 있다.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 외길인생을 걸어온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어려운 시절 나라의 이름을 빛낸 불세출의 스타였음은 확실하다.
▲패션디자이너 고 앙드레 김=한국이 아주 후진국에서 민주화, 산업화의 길을 달리는 과정에서 여러 분야에서 외골수로 평생을 자기분야에 전념하고 나라의 이름을 빛낸 사람들이 있다. 최근 갑자기 앙드레 김이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다. 조용히 고인을 만나고 싶어 엘리베이터 편으로 빈소를 찾아 아들 김중도에게 조의를 표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크리스찬 디올을 비롯 이브 생 로랑, 피에르 가르뎅 등이 세계 패션계를 휩쓸기 시작할 때 한국 패션계에서도 노라 노, 앙드레 김이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국제무대에서는 미미했다. 하지만 앙드레 김은 독특한 색채와 스타일로 어려운 풍토에서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66년 이미 파리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패션쇼를 열었다.
서울올림픽을 책임지면서 스포츠뿐 아니라 음악 무용 의상 등 종합제전을 준비하며 한국의 문화 수준을 세계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패션쇼를 IOC 가족과 외국 귀빈들에게 보여주기로 했는데 박세직 위원장이 김 아무개 패션디자이너를 추천했지만 좀 더 국제성이 보이고 화려한 앙드레 김에게 필자 독단으로 기회를 주었다.
당연히 앙드레 김 쇼에는 사마란치 부인에서부터 IOC 위원 부인들이 김옥숙 여사(노태우 대통령 영부인)와 함께 모두 몰려갔고, 놀랍게도 앙드레 김 패션은 외국인들에게 크게 어필하며 대환영을 받았다. 본격적인 앙드레 김의 국제화가 시작된 것이다. 특히 사마란치 부인과 사무총장 츠바이펠 여사가 단골이 돼 서울에 올 때마다 찾곤 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문화행사로서 IOC가 앙드레 김을 정식으로 초대, 패션모델도 파리에서 데려오고 비용도 많이 대주었다. 이때 잘했던 까닭에 앙드레 김 올림픽 패션쇼는 계속 이어져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열렸다.
IOC에서는 Zweifel 여사가 사마란치 부인과 함께 “일본의 하나에 모리처럼 파리에 부티크(Boutique)를 열어도 되겠다”며 “의향이 있으면 후원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색채 중에 ‘쇼킹 핑크(Shocking Pink)’라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또 조수미 독창회나 김혜정 피아노 연주회에는 외교사절을 초대해서 자신의 독특한 흰 의상을 입은 채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가 한국에 부임하는 대사 가족들에게는 드레스를 그냥 제공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외에도 가수 배우 음악가들에게 여러 가지로 후원을 끊임없이 하는 것을 보고 ‘저렇게 해서 사업이 되는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10년 전에는 파리 진출도 힘들어 못할 형편이던 것이 근간에 와서는 여러 가지 브랜드도 확장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타계 소식을 들어 안타까웠다. 아직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는데 말이다. 그나마 많은 국민들이 진심으로 추도하고, 또 대통령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는 것을 보고 위안을 삼았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