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1월 아벨란제 FIFA 전 회장이 파라과이 올림픽위원회로부터 메달을 받은 후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아벨란제는 1916년생으로 지금은 94세다. 젊었을 때 수영과 수구선수로 활약했기 때문에 그런지 노령인데도 수영이 건강법이다. 1936년에는 수영, 1952년에는 수구 선수로 두 번이나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의 특징은 영어보다 프랑스어로 의사소통이나 연설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언론이 공격해도 신경 안 쓰고 무시해 버린다. 그것이 전 세계 신문을 보면서 큰 것, 작은 것 일일이 반응을 하는 사마란치와는 대조적이다.
아벨란제는 1974년 영국의 스탄리 라우스(Stanley Raus)의 뒤를 이어 FIFA 회장이 되었고 그전에 1955년에서 1963년까지 브라질 NOC 위원장도 역임했다. 그리고 1963년 당시는 한 번 선임되면 종신이었던 IOC 위원이 됐다. 아벨란제는 88서울올림픽에도 참석했다. 당시 FIFA는 지금의 라마다호텔(당시 뉴월드 호텔)에 배정됐는데 그 호텔은 다소 격이 떨어졌다. 그래도 아벨란제는 네비올로(Nebiolo)처럼 불평이나 법석을 떨지 않았다.
IOC와의 관계는 대체로 협조적이지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전후로 출전 축구선수 자격문제로 크게 충돌하기도 했다. 결국은 월드컵에 중점을 두고 23세 이상 3명은 월드컵 참가선수를 올림픽에 참가시키도록 합의를 보았지만 한때 FIFA는 올림픽을 떠난다고 협박까지 했고, 사마란치도 떠나면 할 수 없다고 맞장을 뜨기도 했다. 육상이 빠지면 올림픽에 치명타지만 축구는 안 빠져 주었으면 해도 최악의 경우 견딜만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때만 해도 기본종목으로서 육상, 수영, 체조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FIFA는 TV방영권도 형편없었고 올림픽과 달리 주관방송도 없어 ISL 같은 데서 맡아서 할 정도였다. 그러나 점차 스포츠마케팅이 융성해지고 미국에 축구팀이 생기고 미국월드컵이 열리는 등 규모가 커지면서 98년 프랑스월드컵 무렵에는 아벨란제가 축구를 올림픽에 버금가는 이벤트로 성장시켰다. 아벨란제는 IOC 안에서도 초연하게 무게 잡는 사람, 예의 바른 어른이었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말을 많이 하거나 권모술수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불어로 발언하면 모두 열심히 경청했다.
한국과 관계가 생기게 된 것은 한국이 뒤늦게 2002년 FIFA월드컵 유치에 나서 이미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과 대결할 때였다. 이미 아벨란제는 일본 편으로 알려져 있었고, 일본이 크게 유리하다고 예상된 상황이었다. 반면 유치의 선봉에 선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김영삼 정부의 전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맹활약, 어느 쪽이 이길지 모를 정도로 박빙의 승부가 돼 가고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한국은 유치 비용으로 340억 원을 모금했다고 한다. 다만 부산이 또 1995년 OCA 총회에서 결정될 2002년 아시안게임을 전력투구할 때고 YS도 “부산에 내가 해준 것이 없다”며 밀어붙이고 있었다. 필자 입장에서는 둘 다 한국이 따야 되겠는데 아시안게임이 95년에 먼저 결정되고 FIFA월드컵은 그 후에 결정되니 일단 부산 먼저 결정짓고 월드컵은 그 다음에 집중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왔다 갔다 하다 둘 다 안 되면 정말 곤란한 것이었다. 당시 대한체육회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95년 브라질도 올림픽 유치를 내걸고 그 전주곡으로 리우데자네이루에 IOC총회를 유치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95년 부다페스트 IOC총회에 가기 위해 취리히(Zurich)에서 1박을 했다. 비행기 연결 사정 때문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 서울에서 전화가 와 받아보니 청와대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YS가) 지금 조깅나가셨는데 40분 후에 전화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40분 후에 걸었더니 YS가 이번 총회 때 사마란치에게 자기 부탁이라 하고 이건희를 꼭 IOC 위원에 등용시키라는 것이었다. 큰일났다 싶어 부다페스트 총회에 갔더니 마침 그 총회에서는 IOC 위원을 하나도 선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다.
그 대신 아벨란제와 파디야(Padilha) 두 IOC 위원이 추진하고 있는 리우와 필자가 제안한 서울이 99년 IOC총회를 놓고 로비를 벌이게 됐다. 필자는 나름대로 지지세력들을 점검하여 운동을 벌이는데 사마란치가 나를 부르더니 리우에 양보하고 다음해 FIFA월드컵 선정 때 도움을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아벨란제가 월드컵을 보장해주고 도와준다고 약속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곤란할 것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래서 그럼 보장도 없으니 양보할 수 없다고 했더니 “그럼 할 수 없으니 한 번 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섰다. 서울과 리우를 비교해서 리우는 범죄가 많다고 운운했더니 사마란치는 “당신이 서울에 살아서 그렇지 사실은 리우가 멋있는 도시”라고 했다. 또 리우는 올림픽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힘을 보태고 나서는 곳이라 서울이 우선 총회라도 유치해서 로비를 하겠다 하니 사마란치는 입장이 곤란하다 했다.
곧이어 이탈리아의 카라로(Carraro) 위원이 와서 서로 타협하면 어떻겠느냐고 하기에 필자는 “우리(서울)가 99년에 하고 2001년을 리우에서 하자”고 아벨란제에 전하라고 했다. 그런데 ‘리우가 99년, 서울이 2001년에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 아벨란제의 제안이라고 해 현실성 없이 더 진전이 안 되었다. 그 만큼 아벨란제는 융통성이 없었다.
결국 투표에 들어가 55대35로 필자가 이겨 99년 총회는 서울에서 하게 됐다. 리우는 영화까지 만들어 왔는데 필자는 그런 이야기 못 들었다며 형평성을 이유로 영화는 상영하지 않기로 의사진행을 조정했다. 투표가 끝나자 아벨란제는 마이크를 잡고 서울 개최를 축하하고 훌륭한 총회를 치르기를 축원한다 했고, 필자는 감사하다는 말을 역설하고 끝냈다. 승부가 끝나면 도로 친구가 되는 미덕이 스포츠의 특성이다.
1999년 총회 때 아벨란제는 서울에 와서 즐거운 시간을 가겼고, 2000년 봄에는 리우에서 IOC집행위원회가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드니 남북동시입장을 필자가 제안해 IOC 차원의 지원을 결의했다. 이후 20년이 걸려 리우데자네이루는 룰라 대통령이 앞장서 2016년 올림픽을 따냈고, 앞서 2014년 FIFA월드컵도 가져갔다. 아벨란제 평생의 헌신과 노력이 브라질 체육, 아니 좀 더 확대하면 브라질을 오늘날의 위치에 끌어 올린 것이다.
한국도 앞으로 실용주의와 공리에 입각해서 한 번에 한 탕하는 버릇을 버리고 실패해도 성공을 향해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축구 결승도 기억에 남는다. 애틀랜타에서 한 시간 거리의 조지아대학 미식축구장에서 결승전이 열렸는데 당초 사마란치가 축구 시상을 가고 제1부위원장인 나는 농구경기 시상을 하러 가게 돼 있었다. 그런데 무하마드 알리에 대한 메달(로마올림픽 때 안 받은 것) 시상 때문에 갑자기 스케줄이 변경돼 사마란치가 농구장에 가고 필자는 당시 백성일 대한체육회 비서실장(현 KOC 국제본부장)을 대동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조지아대학의 미식축구장 결승전을 지켜봤다. 경기 후 시상 때 우승팀 나이지리아, 2위 아르헨티나 팀에 메달을 일일이 수여했고 아벨란제가 국제연맹 회장으로서 나를 따라 다니면서 꽃을 선수들에게 주었다. 사마란치가 오기로 약속돼 있다가 내가 와서 기분이 나쁜지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영접도 없고, 나는 적당히 기다리다 시상만 했는데 나도 기분이 안 좋아서 최고 스피드로 시상을 했더니, 아벨란제가 “Not too fast(너무 빨리 하지 말아)”라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어쨌든 필자는 인사도 악수도 없이 다시 애틀랜타로 돌아왔다.
▲ 위는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아벨란제 FIFA 회장(오른쪽)과 필자 부부의 모습. 아래 사진은 C총회. 앞줄과 두번째 줄 왼쪽에 필자와 아벨란제 FIFA 회장이 보인다. |
봄에 있었던 로잔에서의 임시총회 기간에 파운드(Pound) 위원과 필자가 일촉즉발까지 격돌한 것을 알고 아벨란제는 파운드와 필자, 젠리앙 헤 누즈만 위원의 미팅을 주선해 화해시키고 여러 사람에게 2001년 위원장 선거에 나를 밀어야 된다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실제 2001년 선거 때는 아벨란제가 벨기에 혈통이 좀 섞여 있었다는 이유로 로게(Rogge)를 후원했다.
마지막 서신이 온 것은 필자의 2008년 특별사면 복권소식을 듣고 “축하한다. 이제 모든 것이 바로잡히고 원상회복이 되어 기쁘다”는 말이었다. 비록 1999년 IOC총회 유치, 2002년 월드컵축구 때문에 국가이익을 놓고 격돌은 했지만 아벨란제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스포츠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손색이 없다.
축구왕국을 일으키고, 브라질 NOC 위원장에서 IOC 위원으로 가는 여정에 2014년 월드컵, 2016년 남미 최초의 올림픽을 브라질이 개최하도록 이끌었다. 룰라 대통령 말대로 아벨란제는 브라질이 G20 시대에 들어가게 한 세계스포츠계의 거인인 것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